현대 과학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응을 소개할 때,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을 하나의 연속된 운동으로 보고 한 덩어리로 묶어서 소개하는 경우도 있고, 저처럼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을 따로 언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이 두 운동을 지난번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따로 따로 접해서가 아니고) 이 둘 사이에 분명히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지적 설계론은 성경 해석에 있어 창조 과학처럼 교조적이지 않고 과학 전반에 대해서도 창조 과학보다는 열린 모습을 보여 줍니다. 두 번째로, 비록 과학계의 강력한 반론에 부딪치기는 했지만 미이클 베히나 윌리엄 뎀스키 등 지적 설계론의 접근 방식은 기존의 창조 과학과는 달리 학문적인 방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창조 과학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과학계가 지적 설계론에는 대응을 했던 것도 이런 이유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적 설계론의 선택

그러나 창조 과학과는 다른 접근 방법을 지향하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지적 설계론의 앞날이 밝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결국 다음의 두 가지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첫 번째 길은 가능성이 있을지 의문이고 두 번째 길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지적 설계론이 과학계에서 새로운 방법론으로 인정받는 길입니다. 지적 설계론은 자신들의 주장을 과학계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과학의 '방법론적 자연주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과학 작업에서 초자연적인 요인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과학계가 설계자를 인정하는 '유신론적 과학(결국 기독교적 과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자연적 원인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깨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비종교인이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학자들도 비판적입니다. 우종학 교수가 그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한 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자연현상을 자연적 원인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과학의 범주를 정하는 것은 그것이 과학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 창조주가 자연계에 개입해서 뭔가 작용을 했다면 그것을 어떻게 과학으로 다룰 수 있을까?"

지적 설계론은 과학의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비판하면서 초자연적인 설계자를 인정하는 과학을 하라고 요구하지만, 과학이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사용하기 때문에 힌두교 과학자나 불교 과학자나 기독교 과학자가 다 같이 인정하는 과학 작업이 가능한 것입니다. '기독교적 과학'이 따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 '힌두교적 과학'이나 '불교적 과학'을 들고 나온다면 인정하시겠습니까? 저는 과학의 방법론에 관한 한 지적 설계론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두 번째로는, 지적 설계론이 과학계와 상관없이 교회에서 대중 홍보를 통해 일종의 기독인 동호회로서 생존하는 길이 있습니다. 과학을 표방하면서 어떻게 과학계와 상관없이 존속할 수 있느냐고 하실 분도 있을 것 같은데, 창조 과학도('과학'이라는 말이 붙기는 했지만) 실제 과학계와는 별 상관없이 교회에서 생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창조 과학을 부정하면 마치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않는 것처럼 몰아가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창조 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창조'를 부정하는 것과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지만, 지적 설계론도 창조 과학과 유사한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적 설계론의 선택에 관계없이 창조 과학은 존속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만큼 창조 과학이 근본주의 교인들의 생각에 깊이 자리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창조 과학'에 대한 신앙이 많은 교인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과학계가 아무리 창조 과학의 주장이 틀렸다고 해도 '하나님의 진리는 세상에서 미련하게 보이기 마련이지' 하는 자기방어 심리를 쉽게 이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유신 진화론

유신 진화론은 (1990년대에 대두된 지적 설계론은 물론이고) 1960년대에 들어서서 창조 과학이 틀을 잡기 전부터 있었던 꽤 오래된 견해인데, 창조 과학이 지배적인 한국교회에서는 아직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입장입니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 안티이거나를 막론하고 창조 과학이 기독교의 과학관과 신학의 주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 주류 신학계에서는 현대의 자연과학을 수용하면서 여러 신학적 논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이나 미국 보수 교회의 상황을 전체 신학계의 일반적 상황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지적 설계론의 입장에 있어도 마이클 베히의 접근 방식과 윌리엄 뎀스키의 접근 방식이 다른 것처럼, 유신 진화론 안에도 여러 다양한 접근 방식 내지는 설명 방식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보통 유신 진화론을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의 발견들을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구현의 한 방법으로 보는 견해'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것은 상당히 단순화된 표현이고, 실제 이 입장에 서 있는 학자들의 논의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 전반을 포괄하는 틀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기에 앞서 20세기 전반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는 C. S. 루이스를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C. S. 루이스의 견해

이전에는 유신 진화론자로 간주되던 사람이 (지적 설계론이 등장한 이후에는) 과연 유신 진화론자냐 아니면 지적 설계론자로 간주되어야 하느냐를 놓고 의견이 갈라지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등으로 한국 교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C. S. 루이스입니다.

지적 설계론 쪽에서는 C. S. 루이스가 지금 살아 있어서 지적 설계론의 설명을 들었다면 지적 설계론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반면, 유신 진화론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지금 살아서 그동안 축적된 진화의 증거들을 보면 당연히 유신 진화론의 입장에 섰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C. S. 루이스의 글을 직접 읽어 보고 각자 판단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참고삼아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 한국어 번역본의 127~128쪽에서 몇 줄을 옮겨 보겠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인간성의 매체가 될 동물의 형태를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는 엄지손가락이 각 손가락에 닿을 수 있는 손과 언어를 발음할 수 있는 턱, 치아, 목, 그리고 이성적인 사고를 구체화하는 물리적 동작을 전부 수행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한 뇌를 그 형태에 부여하셨습니다. 그 피조물은 인간이 되기 전 오랫동안 이런 상태로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 피조물은 현대의 고고학자가 인간성의 증거로 받아들일 만한 물건들을 만들 만큼 똑똑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피조물이 여전히 동물에 불과했던 이유는, 그의 모든 육체적, 심리적 작용이 순전히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목적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가 이르자 하나님은 이 유기체의 심리적, 생리적 기능에 새로운 종류의 의식, 즉 '나'라고 말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을 대상화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알고 진선미를 판단할 뿐 아니라, 시간 너머에서 시간이 흘러 지나가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의식이 임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다음 글에서는 유신 진화론의 기본적 견해를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황윤관 / 작은자교회 목사, School of Intercultural Studies, Biola Univ. 박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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