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표 목사.
입추가 지나고 처서를 막 넘긴 8월 마지막 주일. 충북 보은군 회남면에 있는 회남교회(홍승표 목사)에 드린 예배는, 이현주 목사가 홍 목사의 책 [마음 하나 굴러간다]에서 묘사한 것처럼, '담백하고 구수한 한 그릇의 된장국'이었다.

가파른 철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니 슬라브로 허술하게 만든 예배당(1층은 사택)이 있다. 대청댐이 만들어지면서 모아진 물이 마을 하나를 통째로 꿀꺽 삼켜버린 통한(痛恨)의 현장이지만, 물과 산과 하늘과 마을은 한 폭의 그림이다. 낡은 예배당에서 내다보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놓았다가 이내 현실로 돌아온다.

손 글씨로 직접 만들어서 복사한 주보, 돌봐주고 어루만져줄 이 없지만 묵묵히 제 자리 지키고 있는 피아노 한 대, 낡아빠진 실내 슬리퍼들, 너덜너덜한 성경·찬송가책. 거기에 안 어울리게 강단과 강대상은 무진장 넓고 크다. 예배당의 4분 1은 족히 차지할 성싶다. "교인들이 피 땀 흘려 만든 건데 한순간에 없앨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한다. 강대상 위에 놓은 마이크도 안 어울리기는 마찬가지다. 굳이 마이크 없이 조용조용 얘기해도 맨 뒤까지 다 들릴 법하다.

예배를 시작하려 하자 할머니 한 분이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아노 위에 앉은 먼지를 쓱쓱 닦아낸다. 아무리 살펴봐도 반주할 만한 사람은 안 보이는데. 예배를 경건하게 준비하려는 마음이 그렇게 표현됐나 보다.

반주 없이 적당한 음높이를 정해서 부르는 찬송, 가사만 쓰여있는 찬송가책을 얼굴 가까이 붙이고 간신히 따라 부르는 할머니, 찬송 부르다가 종알거리고 기도하다가 옆에 앉은 친구 옆구리 쿡쿡 찌르는 아이들, 오늘은 기도 순서를 맡은 이가 오지 않았다. 장에 갔는데 아직 안 돌아왔단다. 이런 불경스런 일이 있나.

예배 시작 전부터 떠들던 할머니랑 아주머니들은 홍 목사가 단에 오르자 말이 더 많아진다. 어느 마을에 사는 누가 아파서 병원에 갔다 왔다느니, 누구는 밭에 나가 예배에 못 왔다느니, 이방인 처지에서는 잘 알아듣기 힘든 충청도 사투리들이 예배당 끝에서 끝을 오간다. 생활한복 입고 부채질 슬슬 하면서 얘기 다 들어주는 홍 목사에게는 자연스런 일인가 보다.

손마디 굵고 손톱 끝이 새까만 흰머리 할머니,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한 또 다른 할머니, 예배 끝나면 밭으로 나갈 심사로 몸빼바지 차림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 눈 꼭 감고 묵묵히 앉아 있는 머리 허연 아저씨, 고만 고만한 초등학생·중학생 아이들 서 너 명과 다섯·여섯 살 먹은 꼬마들. 보통 20명 정도 참석한다는데, 오늘은 10명이 간신히 넘는다. 밭에서 마지막 일손을 놓을 수 없는 때라, 당분간은 저녁 기도회는 생략한단다. 도시 교회라면 날벼락 떨어질 일이다.

말씀을 풀이할 시간이 됐다. 본문은 마태복음 16장 13-20절, 제목은 '내게 예수님은 누구신가?' 또 그 얘기? 베드로가 했던 신앙고백의 신학적 의미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나 밑줄 그으면서 외워야만 하는 교리적 설교의 대표적인 본문 아닌가.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곧잘 했던 성경경시대회 이야기로 시작하는 홍 목사의 설교 내용을 여기 대충 옮겨본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예수의 물음에 대답했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신앙고백은, 풍부한 성경지식을 통해서 나온 대답이 아닙니다. 지식은 보통 때는 힘이 있을지 몰라도, 비상사태 때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예수가 평소 했던 얘기들을 베드로가 잘 메모해뒀다가 대답한 것이 아니라, 그가 보고 느꼈던 것들을 가지고 가슴으로 한 대답입니다.

중요한 것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과 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머리로 알아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삶에서 조금씩 조금씩 경험하고 만나가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시인 기형도의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일부를 소개합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목사의 아이가 죽고 장마 때 교인들이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교인들 사이에서 쑥덕거림이 있었는데, 무심한 목사는 주일학교 아이들과 목사관 뒷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습니다. 결국 목사는 교회를 떠나야 했습니다. 저는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얘기에 뜨끔했습니다.

저는 요즘 예수님이 내게 어떤 분인지 가닥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교회는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대답할 것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도 없고, 서로 싸울 일도 없습니다."

기도하고 싶을 때 예배당만 찾지 말고 걸어다니면서도 언제든 기도할 수 있다고 하자, 누군가 끼어든다. "저는요, 화장실에 앉아서 기도할 때가 참 좋아요." 자칫 설교의 흐름이 끊길 것 같은데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진행되는 것은, 설교자와 듣는 이가 같은 처지에서 같은 고민을 가지고 교감하는 것들을 나누는 설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홍 목사의 설교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모르는 건 모르는 것입니다. 안 믿어지는 건 안 믿어지는 겁니다. 무조건 믿는 건 위험합니다. 아는 만큼 고백해야 합니다. 그만큼만 고백하면 더 행복해질 겁니다. 자식이 부모 마음 다 알아야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사랑을 믿고, 조바심 내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그분을 알아가도록 합시다."

아름다운 음악, 눈부신 조명, 멋드러진 강단의 꽃꽂이가 없는 예배당, 화려한 언술과 신학적 정교함이 없는 담백한 설교는, 고단한 농사 일을 잠시 접고 예배당에 모여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이들에게, 밭에서 만나는 하나님과 어떤 대화를 나누면 좋을 지 아주 쉽게 가르쳐주는 그것이다. 어쩌면 농촌이기 때문에 가능한 설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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