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비유해 주셨다. 이 세상이 마치 소금이 들어가지 않은 것처럼 무미건조한 곳이며, 빛이 비추이지 않은 것처럼 어두컴컴한 곳과 같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씀이다. 사실 우리가 매일 듣는 소식들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얼마나 사람이 악해질 수 있고 추해질 수 있는지, 과연 그 끝이 얼마인지?

이런 세상에 사는 우리들이 반응할 수 있는 방식은 몇 가지가 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이 세상의 풍조에 떠밀려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패배주의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일치감치 이 세상에 항복해버리고 이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마치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바로 왕의 통치하에 살면서, 바로의 명령을 따라 살았던 것처럼, 이 세상의 위력 앞에 굴복하고 이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한 가지 반응이 될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은 그런 패배주의적 태도가 아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니,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을 온 세상을 위해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였다(출 19:6).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온 세상의 빛으로 삼겠다고 하셨다(사 49: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온 세상의 빛으로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하셨던 것처럼, 우리들을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을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셨다(벧전 2:9).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무미건조한 이 세상에서 살맛나는 맛을 내라는 의미이며, 어두컴컴하고 절망적인 이 세상을 살맛나는 밝은 세상으로 만들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 그리고 만일 그 빛이 세상을 비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쩌면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의 모습이 세상에 소금의 맛을 내지 않고, 세상에 빛을 비추지 않는 것 같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광야 길을 행할 때, 그들은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들은 “여호와의 축일”을 선포했다(출 32:4-5). 이집트 사람들과 다른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는 이스라엘 민족들이고, 이집트의 죽은 신을 섬기지 않고 인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라는데, 정작 그 내용을 살펴보니 이집트 사람들이 섬겼던 똑같은 황금 송아지를 섬겼던 것이다. 무늬는 여호와의 종교인데, 실상은 이집트 종교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도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과 똑같아 보일 때가 많다. 기독교만이 참 종교이며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배타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데, 정작 그 기독교가 어떠한 모습인가 하고 들여다보면 돈과 권력 그리고 이 세상의 복을 숭배하고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죄를 짓고,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돈에 목메달아 살고 있고,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음란한 삶을 살며,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용서하지 못하고,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서로 물고 싸우며,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권력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무늬는 기독교인데, 실상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관을 가진 것이다.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선 소금의 맛을 낼 수 없고,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선 빛의 밝음을 느낄 수 없다. 우리가 소금의 맛을 내고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이 세상과 달라야 가능한 이야기이다.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힐 것이라고 예수님은 경고하셨다. 이 말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버려질 것이라는 경고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처럼, 크리스천들이라 하는 사람들이 아무 맛도 없다면(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면), 결국 버려질 것이다. 즉 하나님에게서 버려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이 말씀은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뒤집는 말씀은 아니지만, 우리의 신앙이 과연 진짜 믿음인가 아닌가를 돌아보게 하는 경고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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