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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로마나와 팍스 그리스도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모든 율법 정신을 완성한다"
  • 한완상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2.03.13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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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지배 제도들은 세계 도처에서 근본적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의 무한한 탐욕에 대해 세계인들은 두려움과 불신을 거침없이 나타내고 있습니다.(사진 제공 <오마이뉴스>)
오늘의 카이로스 상황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늘의 색깔을 보며 자연의 일기 변화는 알아보면서도 시대의 징조는 알아보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한 적이 있습니다(마태복음 16:2~3). 오늘의 예수따르미들도 21세기 이 세대의 징조를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지배 제도들은 세계 도처에서 근본적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의 무한한 탐욕에 대해 세계인들은 두려움과 불신을 거침없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월 가(Wall Street)를 점령하려는 움직임이 전 세계로 번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적하효과(trickling down effect)는 허울뿐일 뿐 실제로 경제적 양극화는 상존하기에 시장체제의 정당성 또한 더 거센 도전을 받고 있고 또 받게 될 것입니다. 시장의 탐욕은 커져만 가는데 이 시장을 제대로 공정하게 관리해내지 못하는 국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국민은 국가의 공익성과 공공성에 대해서도 회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대의정치를 표방하는 의회민주주의와 정당정치에 대해서도 국민과 시민들은 신랄한 비판을 서슴치 않습니다.

쌍방향 통신 매체를 자유롭게 활용하여 줄 안(on-line)에서 자유롭게 소통하면서 합의에 이르게 되면 줄 밖(off-line)에서 신속하게 집단행동을 거침없이 해내는 새로운 21세기 민중이 출현했습니다. 이들은 민주정치 과정에 엄청난 힘을 직접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줄씨알입니다.

줄씨알은 20세기의 대중(mass)과 다릅니다. 20세기 대중은 이른바 즉자적 민중이지요. 허나 21세기 줄씨알은 대자적 민중입니다. 그들은 직접 모든 조직의 최상부층에게 창조적 대꾸를 할 수 있고, 줄 안팎에서 그들의 집단적 견해를 강력하게 피력해냅니다. 이들은 모든 조직(국가에서 교회까지)의 운영을 투명하게 집행하도록 요구하며 감시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든 중요한 의견이 밑에서부터 민주적으로 위로 올라가도록 요구합니다. 버틈 엎(bottom-up)식 소통을 강조하며 톱 다운(top-down)식 소통과 운영을 거부하고 견제합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가 사회와 국가의 모든 수준에서 알차게 진행되기를 줄씨알들은 촉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는 세계적으로나 우리나라에서나 권력 기구의 책임자들이 교체가 되는 해입니다. 시장, 국가, 정당, 의회 모두가 정당성의 위기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터에 정치 지도력이 폭넓게 교체될 시점이 바로 2012년입니다. 정말 카이로스(Kairos)의 때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예수님의 하늘나라 운동을 지금, 여기에서 펼치려는 예수따르미들은 세상 권세와 국가권력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특히 지난 이천년간 '모든 권세에 복종하라'는 로마서 13장 첫 부분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 또는 재해석해야 할까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성서의 이 구절이야말로 지난 이천년간 독재 권력이 그토록 아끼고 소중히 여겼던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이 편지를 작성했던 사도바울도 수구 보수의 멍에를 그토록 오랫동안 억울하게 목에 매고 곤욕을 치루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편지를 이렇게 쓴 바울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아직도 이 세상에서 힘쓰고 있는 권력자들이 그들의 권력이 정당성을 잃게 될수록, 성서의 이 구절에 더욱 매달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기에, 바울의 신학적 의도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밝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카이로스의 혼란 속에서 우리는 진리의 빛, 복음의 참빛을 찾고 싶습니다.

바울의 신학적 의도

로마서 13장 1절에서 7절까지의 메시지가 어떤 상황(context)에서 쓰여졌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대체로 C.E(common era) 50년 중반에 로마서가 작성된 것 같습니다. 클라우디우스(Claudius, 제위기간 41~54) 황제가 죽고, 10대의 자유분방한 네로(Nero, 제위기간 54~68)가 황제로 등극했지요. 당시 정치사회적 상황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들이 박해받기 시작했습니다. 후일 베드로와 바울도 네로 폭정과 탄압으로 순교 당했지요.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로마교회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의 영향아래 있던 디아스포라 교회들은 (여러 문제들 중) 로마 당국에 조세와 관세를 바치는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하기야 이때보다 20여 년 전 거슬러 올라가 갈릴리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때도 세금 문제로 시험받으신 적이 있었지요.

로마제국의 권력이 더욱 강팍해지고 황제 신학이 더욱 강요되던 초대교회 상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유일한 그리스도, 유일한 메시아로 확신했던 초대 예수따르미들 (또는 그리스도 따르미들) 중에는 가짜 신인 황제 체제에 조세나 관세를 바치는 것을 꺼려하거나 단호히 거부하려는 열혈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로마 당국에 대해 반세(反稅)운동을 펼치려했습니다. 바로 이 같은 문제에 사도바울도 직면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폭군 네로 지배 하에서 초대교회가 반세운동에 휘말리게 되면 추방이나 순교와 같은 가혹한 징벌을 면키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에게는 예수님의 지혜가 절박하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권세에 복종하라' '조세를 바쳐라'는 표현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의 껍데기만 볼 것이 아니라 이 표현 뒤에 있는 바울의 신학적 깊은 배려와 속뜻을 우리는 찾아 밝게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우선 현재 성서에 기록된 로마서의 장과 절이 처음부터 바울이 그렇게 자기 편지를 나눈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편지의 최초 필사본은 지금의 형태로 나눠지지 않았지요. 편지의 뜻을 중심으로 단락을 나눈다면(파라그래프로 나눈다면), 13장 바로 앞의 12장 14절로부터 13장 10절까지를 한 단락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보지 않고 13장 1절에서 7절까지를 따로 떼어서 보게 되면, 사도바울의 깊은 신학적 성찰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수구 꼴통 같은 바울의 모습만 부각됩니다.

그런데 12장 14절부터 13장 10절까지를 한 파라그래프로 보아 찬찬이 읽고 그 뜻을 되새겨 보세요.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바울은 갈릴리 예수의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빛 아래서 주후 50년 중반에 로마 교인들에게 적절하게 필요한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통상적으로 적지 않은 성서신학자들과 조직신학자들이 바울은 역사의 예수에 무관심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4복음서에서는 역사적 예수의 발자취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4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 크게 변화를 겪게 된 예수의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신앙적 고백을 토대로 재구성된 모습이라 했습니다. 복음서의 예수는 실물 예수가 아니라, 부활한 하나님 아들 곧 그리스도일 뿐이기에 복음서의 예수 활동도 그리스도의 활동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20세기 최고의 성서 신학자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의 영향력이 엄청 컸지요. 심지어 1980년대 중반부터 세계 언론의 각광을 받았던 미국 중심의 예수 세미나 학자들도 기본적으로는 불트만의 제자들이라 할 수 있죠. 4복음서에서 역사의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19%도 안 된다고 그들은 주장했으니까요. 여하튼 예수와 바울 간에는 건너 뛰어넘을 수 없는 큰 간극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바울의 복음 메시지 속에 갈릴리 예수의 목소리가 담겨 있음을 지적하는 신학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세미나에서 지도적 역할을 해 온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1934~)과 보그(Marcus Borg, 1942~)가 그러하고, 한국인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신학자 김세윤 교수도 그러한 분 중 한 분이지요. (몇 달 전 김세윤 교수와 토론한 적이 있는데 그는 한국 복음주의권에서 바울의 이신칭의를 전적으로 왜곡시켰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글에서 예수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글로 당신의 뜻을 남기신 일이 전혀 없었기에, 대신 그의 육성을 영의 귀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기억을 통해 구전(口傳)으로 전승된 목소리지요. 이제 바울의 로마서신에서 갈릴리 예수님의 그 정다운 목소리를 들어 보기로 합시다.

바울의 글에서 예수님의 육성을

먼저 바울은 로마서 12장 14절에서 이렇게 로마 교인들에게 권고했습니다.

"여러분들 박해하는 사람을 축복하십시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마십시오."(로마서 12:14)

바울의 이 편지글을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다음과 같은 외침과 견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

사랑하는 자매형제 여러분, 여기서 여러분은 바울의 편지 글에서 갈릴리 예수, 특히 산 위에서 외치시는 예수의 육성을 들을 수 있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절규야말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핵심이 아니던가요!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 신학에 대한 근본적 대안으로서의 예수의 하나님나라 신학이 아니던가요!

무시무시한 무력으로 모든 원수들을 섬멸시키고 난 뒤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 마당에서 펄럭이는 깃발이 바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 깃발이 아니었던가요!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외침은 바로 이 같은 피 묻은 깃발을 내리게 하면서 인간과 구조를 함께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대안적 복음의 소리가 아니던가요!

이런 기쁜 소식의 외침이야말로 뿌리로부터의 변화를 호소하는 래디컬한(Radical, 근본적인) 기쁜 소리가 아니던가요!

예수에게는 원수란 사람일 뿐이요, 이웃일 뿐이지요. 그래서 원수란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이웃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원수 사랑의 외침은 바보의 넋두리처럼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수준 높은 바보의 넋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감동적이지요. 나는 상상해 봅니다. 바울이 로마서 12장 14절의 말씀을 편지에 쓸 때 20여 년 전 갈릴리 호수가 언덕에서 "그러나 나는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육성을 그의 영의 귀를 활짝 열고서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눈앞에 네로 황제의 폭압적 박해를 느끼면서 말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의 12장 7절의 글과 13장 2절의 글을 예수님의 명령(마태복음 5:39)과 연결시켜 봅시다. 바울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로마서 12:17)

그리고 바울은 13장 2절에서 권세에 거역한다는 표현을 두 번씩이나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서 하나님나라는 악한 사람에게 악으로 대응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음을 설파하시면서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정말 바보 같은 권고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 누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대어라."(마태복음 5:29)

먼저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울의 '거역한다'는 말과 예수님의 '맞서다'는 말입니다. 같은 명령의 뜻입니다. 바울의 '거역한다'라는 단어의 그리스어는 tasso인데, 이것은 군대의 전투 행위와 연관된 동작을 뜻합니다. 즉 싸우기 위해 전투대형을 이룬다 라든지, 전투를 위한 군인의 배치와 포진을 해낸다는 뜻이지요. 이 그리스어가 영어 tactics(전술)의 어원이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거역'이란 뜻은 단순한 반대나 반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력을 사용하는 군대식 반항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13장 2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해야 될 것 같습니다.

"조세와 관세를 요구하는 로마 권세에 대해 군대식 무력 전술로 대항하지 말라."

이런 바울의 권고는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라는 예수님의 육성을 영적으로 듣고 한 권고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나 바울은 한결같이 제도 폭력 또는 폭력적 제도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전술을 거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피 흘리는 폭력 대응 자체가 이미 악한 세력에 굴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단코 악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악순환만 거칠게 작동하게 되고 억울한 피흘림은 계속될 뿐이지요. 진실로 악을 이기려면 선함으로만 이겨야 합니다. 곧 사랑의 힘, 질 수밖에 없더라도 그 사랑의 힘으로 마침내 이겨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처절한 패배와 부활의 승리 사이의 긴장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과 바울의 만남 한 가지만 더 언급해 봅시다.

예수님의 원수 사랑의 명령이 바울의 로마서 13장 8절에서 10절까지에서 아름답게 정리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바울의 평범한 표현인 '남을 사랑하는 사람'을 좀 더 명백하게 드러내어 이렇게 옮기고 싶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율법의 정신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성되는 평화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평화요, 팍스 그리스도(Pax Christus)의 진실입니다.

여기서 가짜 평화인 팍스 로마나와 진정한 평화인 팍스 그리스도 간의 본질적 차이가 나타납니다. 한마디로 바울의 로마서 서신에서 우리가 역사적 예수의 향기, 그것도 산상수훈의 고결한 향기를 느낄 수 있어야만 바울의 속뜻, 바울의 래디컬(radical)한 신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향기는 바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향기요 팍스 로마나를 대치할 수 있는 변혁의 향기입니다.

이제 말씀 증거를 정리하면서 네 가지 진실에 새삼 주목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긴 기독교 역사에서 보면 세속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독재자들이 가장 애용했던 성서 구절이 바로 로마서 13장 1절과 2절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정치적 고초를 겪었을 때 군사정부가 이 구절로 여러 번 괴롭혔습니다. 해방 후 오늘까지 우리의 역사를 보면 국가권력이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청와대나 조찬 기도회로 초청하면, 이들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독재 권력을 주님의 이름으로, 성서의 여러 말씀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특히 로마서 13장의 일부 말씀으로 권력을 정당화시켜 주었습니다.

나는 이 같은 우리 한국교회 현실에 대해 사도바울께서 지금 살아 계신다면 심히 불쾌해하리라 생각합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 사도바울의 목에 기독교 지도자들이 매어 둔 무거운 권력 축복이라는 멍에를 우리는 벗겨 주어야 합니다. 복음주의 신학의 미명 아래 높은 보수주의 감옥에 가둬 둔 사도 바울을 이제 해방시켜야 합니다. 바울의 신학이 예수의 하나님나라, 곧 사랑 나라(Love-dom)의 신학이기도 한데 이 신학을 보수주의 신학의 감옥에 그렇게 오랫동안 가둬 두어서는 안됩니다.

둘째로, 바울이 오해받기 쉬운 13장 1절에서 7절까지의 편지글을 쓰게 된 동기를 우리는 미움의 문을 열고 이해해야 합니다. 천방지축처럼 놀았던 네로 황제의 탄압 속에서 로마교회의 반세 운동이 자칫 피비린내 나는 순교의 참상으로 비화될 것을 바울은 심히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반세 운동이 초대 교인들이 목숨을 걸만한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했지요. 정말 목숨을 걸 주요한 사안이 따로 있다고 믿었지요. 그는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가 1940년에 겪었던 경험에서 다시 유추해 볼 수 있겠습니다. 1940년 6월 17일 그는 카페에서 프랑스 항복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 카페 안에 히틀러 정권의 하수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 항복 소식에 독일인들은 마땅히 기뻐해야 하는데 카페 안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이때 본회퍼 목사는 이렇게 외쳤답니다. "여러분, 당신의 팔을 들어 올리시오… 당신들은 제 정신이요. 우리는 지금 매우 다른 중요한 것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지 그딴 경례 따위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경례 거부 행위로 순교당하는 어리석은 짓 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회퍼목사는 1세기의 사도 바울과 역지사지하고 역지감지한 듯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바울사도의 더 깊은 속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반세 운동으로 순교당하는 것도 바울에겐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를 더욱더 가슴 아프게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초대교인들이 로마체제에 대해 군대식 무력 대응을 함으로써 피살되는 아픔도 바울에게는 컸지만, 그를 더 아프게 한 것은 상대방을 살해하는 비극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악을 악으로 대응하게 되면 하나님나라는 이미 끝장난 것이지요. 다만 보복적 악순환이 거칠게 작동하면서 사랑은 증오로 대치되고, 정의는 보복으로 추악하게 변질되고 말지요. 팍스 그리스도는 사라지게 되고 팍스 로마나는 피비린내 나는 승리주의 깃발아래 더욱 극성을 떨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더 걱정했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골고다로 우아하게 십자가 지시고 처참한 패배의 길로 한 발짝 한 발짝씩 나아가신 예수님을 가슴 깊이 모시면서 바울의 편지를 새롭게 읽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팍스 로마나의 죽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팍스 그리스도의 승리를 뜻한다는 진실을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괴로워하는 예수님에게 무자비하게 창을 던진 로마의 권력을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기도를 드렸지요. 그런데 이 기도의 순간 팍스 로마나는 그 뿌리로부터 흔들리게 되고 무너지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마침내 예수의 부활로 팍스 그리스도는 참평화의 빛을 세상과 역사 속에서 영원히 비추게 되지요. 우리는 지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떨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밝아 올 부활의 빛을 바라면서, 더욱 용기를 내어 팍스 그리스도의 빛과 그 영광을 2012년 우리 국민과 민족 그리고 온 세계인들이 함께 누릴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한완상 /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이 글은 2012년 3월 11일 서울 새길교회에서 전한 한완상 박사의 설교문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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