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처럼 기도하라」는 책을 반쯤 읽다가 찢어서 쓰레기통에 넣었다고 공개한 것은 김 목사로서는 치명적인 실수이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일부 대형 교회를 살피다 보면 각계 각층의 지도층 인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을 외치면서 기쁨으로 따라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 비밀은 설교자들의 절묘한 연막 전술 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다양한 연막탄을 사용하여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교묘하게 숨김으로써 사람들을 장악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 연막 전술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만 한다. 그래야 반쪽 진리에 어리석게 끌려 다니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이에 일조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연막 전술에 도통한 김홍도 목사가 지난 6월2일 사무엘상 2장 6∼8절에 근거해 '축복을 구하는 것이 잘못인가'라는 제목으로 한 설교를 비평적 시각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비평의 초점은 기복 신앙을 강화하는 설교를 둘러싸고 있는 연막 전술의 핵심을 분석하는데 맞추어질 것이다. 다시 한번 이 비평의 동기가 병적 시기심에서 비롯된 파괴나 자기의(自己義) 충족에 있지 않고 한국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고자 하는 충정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그러기에 이 비평에 대한 진지한 반론에도 열려 있음을 밝혀둔다.

목표 왜곡해 설정한 후 논점 흐려

김홍도 목사는 설교를 하기 며칠 전 「예수님처럼 기도하라」는 책을 절반쯤 읽다가 심령이 가라앉고 오히려 기도의 불이 꺼지는 것을 느낀 데다가 「야베스의 기도」를 까고 있어서 그 책을 찢어서 쓰레기통에 넣고 말았다는 극적인 고백으로 설교를 시작한다. 이유인즉 그 책은 '하나님의 축복을 구해도 안 되고 물질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해도 안 되고 전부 안 된다는 이야기'로만 가득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곧이어 그는 '물량주의'와 '기복 신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비판적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사람들은 고상한 척하지만 사실은 칸트의 영향을 받은 신학적 자유주의자들로서 믿음을 무너뜨리는 합리주의자요 인본주의자들이며, 그들의 주장은 '교회를 죽이는 사탄의 유혹'이라고 경고하면서 강도 높은 공격을 퍼붓는다.

김홍도 목사는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 물량주의 그리고 샤머니즘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정말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그리고 믿음과 기도라는 것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만의 이기적인 행복과 성공을 극대화하려는 경향에 대하여 강력히 의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홍도 목사는 이러한 논점을 왜곡하여 마치 그들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 자체를 불신하며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 만민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는 분임을 부정하는 자들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미 이렇게 왜곡된 허구의 표적을 향해 인본주의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허무주의자라고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연막 전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비평자들의 예봉을 무력화시켜 핵심을 비껴가고 논점을 흐림으로써 자신의 가르침 속에 있는 기복 신앙적 문제점을 절묘하게 감추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술의 진상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예수님처럼 기도하라」는 책의 진의를 왜곡시키고 그 글을 다 읽기도 전에 찢어버려 쓰레기통에 처넣은 행동이다. 일고의 가치가 없는 책으로 매장시킴으로써 그 예봉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감추려는 비겁한 행동이다. 성도들은 이런 무지하고 기만적인 행동에 속아넘어가서는 안 된다.

잘못된 해석으로 기복신앙 오류 은폐

김홍도 목사는 칼빈의 「기독교강요」(3권 20, 6)를 나름으로 해석하면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서 얻으려고 하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복을 구하지 않는 자는 심중에 몰래 다른 곳에서 얻을 것을 계산하고 있는 자라고 말한다. 이어서 아들을 낳는 축복을 구한 한나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목숨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린 예수님(요 10:17)과 상 주심을 바라고 고난의 길을 택한 모세의 예를 들면서 "하나님의 보상을 믿고 축복을 기대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지 그릇된 기복 신앙이 아닙니다"라고 역설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보상과 축복을 믿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 것은 고상한 불신앙, 허무주의인 것입니다"라고 항변한다. 한편 민수기 6장 22∼27절에 근거해서 주의 종이 성도를 위해 복을 빌어주는 것은 당연한 것임을 주장하면서 이를 '기복 신앙'이니 '샤머니즘'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생명의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없는 사람들의 불신앙에 기인한 것이라고 공격한다. 그러면서 "계속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하여 계속 축복을 받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라고 독려한다.

칼빈과 성경에 대한 이러한 해석에는 아주 미묘한 오류들이 있다. 김홍도 목사는 잘못된 해석의 힘을 빌어 기복 신앙의 오류를 은근히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역시 연막 전술의 일환인 것이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의 앞에서 언급한 부분에서 말하고자 한 바는 마음속으로는 별로 필요를 느끼지 않으면서도 마치 필요한 양 그리고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는 믿음도 없이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매우 가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기적 탐욕을 절제함으로써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김홍도 목사는 기복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도 일용할 양식과 같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을 권유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그는 칼빈을 비틀어 가지고 마치 기복 신앙의 비판자들을 논박하고 있는 것처럼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나, 모세 그리고 예수님의 예를 들어서 그들이 모두 마치 기복 신앙을 옹호하고 있는 것처럼 해석하고 있는 것도 성경에 대한 심각한 오독의 결과이다. 한나의 경우 기도를 통해 자기 행복의 극대화를 꾀한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식을 낳지 못해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말할 수 없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약자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상을 바란 것도 상이 그의 삶의 최고 목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심과 힘겨운 사명과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결국에는 승리를 주시는 분임에 대해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상을 바라보면서 위로를 받고 역경을 이겨낸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를 두고 마치 모세가 축복을 목표로 해서 살았던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주객을 전도시키는 큰 잘못이다. 예수님 역시 목숨을 버린 것이 단순히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요한복음 10장17절의 핵심은 18절에서 더욱 분명해지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결코 실패도 아니요, 예수님의 연약함에 기인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하여 기꺼이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신 것을 외면한 채 예수님의 삶을 오늘날 고난을 회피하고 축복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삶과 일치시키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과 물신, 같이 섬길 수 있다?

김홍도 목사가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가난해진 것도 우리를 부요해지도록 복 주시기 위함이다(고후 8:9).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것이나 복을 비는 것이 왜 잘못입니까"라고 반문하고 있다. 정말 매력적인 논지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물질적 축복을 사랑하는 것이 아주 편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야베스의 기도」의 매력이기도 하다. 윌킨슨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기 원하시는 축복을 구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고 하나님께서 듣고 싶어하는 기도라는 것을 역설한다. 물질적 축복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과 맞아떨어지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물론 윌킨슨처럼 김홍도 목사도 축복을 받아 자기 육신의 편안한 삶과 세상 쾌락을 누리려고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에 있어서 하나님과 필적할 만한 유일한 존재는 맘몬 즉 돈과 재물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별로 주목하고 있지 않다(마 6:24). 하나님을 의존하여 물질적 축복을 구하는 삶을 살다 보면 그 축복이 목표가 되고 하나님은 수단으로 전락될 위험성이 너무 크건만 이러한 위험성을 가볍게 넘어간다(딤전 6:10).

더구나 김홍도 목사는 성경 전체로 보면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 땅에서 경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른바 믿음 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의 35∼38절만 보더라도 믿음의 사람들 중에는 악형을 받은 사람도 있고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힌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 돌아다녔으며 가난과 고난과 학대를 겪은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했기에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며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도 현재 우리들을 구름처럼 둘러싸고 응원하고 있는 위대한 믿음의 증인들 가운데 속한다(히 12:1). 이는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는 복이 현세적이 아닌 경우가 제법 많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목사는 설교할 때 이 세상에서의 물질 축복이 믿음과 비례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기복 신앙에 담겨진 탐욕을 감추는 또 하나의 연막 전술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길에 들어서는 사람에게 고난을 받을 준비를 시켜야 한다(빌 1:29).

기복신앙 포장에 능해

김홍도 목사도 "물론 기독교는 샤머니즘과 같이 죄를 따지지 않고 도덕적인 것을 무시하고 무조건 복을 비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서 복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축복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팔복을 말하는 것으로서 세상의 축복보다 차원이 높다고 말한다. 또한 헌금 생활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헌금을 할 때는 이권 획득을 위한 뇌물 드리듯이 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영광과 더 많은 영혼의 구원을 위한 선교사업 등을 위해서 쓰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헌금하면서 일확천금을 꿈꾸거나 도박을 한다든지 신용카드를 남발해서는 안 된다고 쐐기를 박고 있다. 얼마나 바르고 좋은 말들인가? 김 목사가 말하고자 하는 축복 구하기는 개인과 교회의 현세적 욕망이 서려 있는 기복 신앙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의 설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기복 신앙을 감싸고 있는, 한낱 포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역시 연막 전술이다. 김 목사는 축복을 구하는 사람의 도덕성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설교의 말미에서 제시된 중요한 실화는 그것이 속 빈 강정임을 보여준다. 수용로교회의 김종호 장로 이야기인데 IMF가 터져 사업이 부도나기 직전이었는데 건축헌금을 드리고 보자는 심정으로 2억을 드렸더니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엄격히 말하면 채권자에게 돌아가야 할 돈을 의도적으로 건축헌금으로 드려버린 도덕적으로 무책임한 행위이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결과론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신앙은 도덕을 초월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김 목사의 동영상 설교에 기도와 헌금을 잘해서 축복 받은 예가 5번(설교문에는 4번) 등장하는데 한결같이 그 축복은 모두 물질적인 축복이다. 앞서 언급한 산상수훈의 고차원적인 팔복은 온데 간데 없어진 것이다. 더구나 기도와 헌금의 예도 5번 중에 3번이 교회 건축을 위한 것이다. 초대형 교회 건물과 주차장 마련을 위해 140억의 부채를 지고 있는 김 목사 교회의 형편을 생각할 때 이해는 가지만, 이는 고아와 과부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경제적으로 돕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삼는 성경 전체의 교훈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 교회에서는 딱 세 마디를 배운다. 예수 믿자. 헌금하자. 교회 짓자"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올 만한 것이다.

속내는 드러났는데…

「예수님처럼 기도하라」는 책을 반쯤 읽다가 찢어서 쓰레기통에 넣었다고 공개한 것은 김 목사로서는 치명적인 실수이다. 그 행동이 그렇게 정성껏 뿌린 연막을 일거에 제거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렇게 김 목사를 의분하게 만들었는가? 사실 그 책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 예수님의 기도처럼 살려고 하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김홍도 목사도 자신의 설교에서 강조하는 바이다. 그런데 왜 찢었는가? 김 목사의 설교 속에 담겨 있는 기복 신앙의 탐욕을 정곡으로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연막은 거쳐지고 김 목사의 속내는 드러나고 만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는 드러난 속내를 다시 감춘 채 주님 앞에 서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기도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박득훈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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