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 엘리트가 되고자 하는 자는 꼴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꼴찌인 자는 처음이 될 것입니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우리 민족 공동체의 가장 큰 과제는 평화 통일과 개혁에 있습니다. 평화 통일과 개혁이라고 하는 이 두 과제를 다 이루어내기 위해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회의 기득권 구조입니다. 평화 통일과 개혁도 기득권 문제에만 걸리면 나아가지 못하고 비틀거리기 일쑤인 것을 그동안 수없이 보아오지 않았습니까. 민주 언론을 위해 평생을 바친 송건호 선생은 통일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통일 문제는 언뜻 보면 민족 문제인 것 같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계급 문제이고 기득권 문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통일 문제는 분명 민족 문제입니다. 그러나 통일의 과정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우리는 대부분 '통일이 내게 유익이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생각한 후 유익이 되면 통일을 지지하고 유익이 안되면 통일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들도 통일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유익이 된다고 판단할 때만 움직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이나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7·4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서로 밀사를 주고받으며, 통일운동에 앞장서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7·4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나서는 곧바로 유신 독재를 시작했고, 김일성 정권도 유일 체제로 나아갔습니다. 유신 독재와 유일 체제라고 하는 양대 독재 세력을 강화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데 통일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것은 전두환·노태우 정권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권 말기에 통일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여겨 빗장을 걸어 잠그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김정일 정권도 겉으로는 통일을 주장하면서도 자기 정권에 이익이 되는지를 엄밀히 계산한 나머지 선뜻 나서는 일은 보기 드뭅니다.

기득권 문제 해결 안되면 통일 힘들어

김대중 정권의 통일운동은 평화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통일운동의 파트너로 현대와 같은 재벌을 선택했다는 것은 무척 아쉬운 일입니다. 규모는 작아도 자발적인 시민단체나 종교단체들을 파트너로 삼아 이들을 통해 민간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도록 지원했다면 북한과의 교류는 훨씬 촉진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는 쉬운 방식을 택했습니다. 말 안 듣고 꼬장꼬장한 민간운동 지도자들과 통일운동을 열어가기보다는 현대와 같은 재벌을 데리고 금강산 관광 단지를 만들고, 국민들의 여행비로 북한에 여러 경제 지원도 했습니다. 북한도 큰돈을 한 번에 받다 보니 민간 단체가 조금씩 모금해서 보내주는 정성스런 돈은 가볍게 여기며 민간 단체들과의 만남도 외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 이후 민간 단체의 통일 역량은 오히려 축소되었고, 권력·재력·지식을 가진 사람만이 주도하는 통일운동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갈수록 민족의 뜻에 따라 통일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 기득권층 이익에 따라 타협과 협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통일 과정에서 생기는 이득도 온 국민에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북한 당국과 협상하고 있는 일부 가진 자들의 주머니로 굴러들어갈 것이 분명합니다. 통일도 기득권을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쪽으로 간다는 것은 비극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기득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통일을 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혁이 통일운동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빨리 남한에 와서 통일운동과 평화운동에 성의를 보이는 것도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 내부의 개혁에 있습니다. 통일운동도 개혁에 성공한 쪽이 주도해야 합니다. 과거 통일운동은 더 많은 군사력을 갖고 더 많은 돈을 확보해야 주도권을 쥐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과 권리가 보전되는 사회, 인간적으로 살 맛이 나는 사회를 유지하는 쪽이 통일을 주도해야 합니다.

아쉽게도 우리는 북한 사람들과 조선족을 품을 수 있는 정신적·도덕적 힘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 자유로운 사회라고 기뻐했다가 곧 이곳이 돈 없는 사람이 눌림 당하는 사회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이 사회에서 살아갈 방법이 없어 다시 탈출하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북한군 장교 출신으로 남한에 내려왔다가 중국으로 빠져나간 신중철씨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부족한 도덕성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평화 통일과 개혁이 늘 부딪히고 좌절하고 말았던 기득권 구조.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포도원 비유(마태 20:1∼16)를 통해 기득권 구조를 극복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원리란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는 것입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은 이 절을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라고 재미있게 번역했습니다.

주인이 모두에게 '공정한' 품삯을 준 이유

성경 본문에서는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의 결실기를 맞이해 품꾼들을 고용하러 나갔습니다. 6∼7시쯤 아침 일찍 나가 품꾼들과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계약을 맺고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주인은 제 3시에 또 나가보았습니다. 제 3시는 오전 9시쯤 됩니다. 장터에는 놀고 있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미 이른 아침 고용 시장에서 쓸모 있는 사람들은 다 팔려 나가고 남은 자들입니다. 이른 아침에 불려가지 못한 사람들은 사실상 하루종일 불릴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간을 죽이며 놀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이들에게 공정한 품삯을 약속하고 불러들였습니다. 또 이 주인이 제 6시(12시)에, 제 9시(오후 3시)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도 똑같이 공정하게 주겠다고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제 11시(오후 5시)에도 나가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오후 5시에 서 있는 사람들을 성경은 종일토록 놀고 있는 사람들로 표현합니다(보통 하루 일이 오후 6시에 끝을 맺습니다). 이 사람들이 왜 놀고 있겠습니까? 놀고 싶어서 노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들은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어 놀고 있는 사람입니다. 고용되지 못했다는 것, 직업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못 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은 쓸모 없는 존재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놀고 서 있는 것은 깊은 소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지 못해 살아 있는 고통과 절망을 놀이로 때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 사람들조차도 불러들였습니다. 이들은 포도원에 들어가며 품삯을 계산하기보다 내가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를 써주는 사람, 내 존재를 인정해주는 사람에 대해 감사했을 것입니다.
저물어 오후 6시가 되었습니다. 주인이 청지기를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했습니다. 왜 주인은 나중 온 자부터 똑같이 한 데나리온(하루 품삯)을 주라고 했을까요? 주인은 그들의 절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버림받은 존재로서 절망을 안고 장터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한스런 유희를 본 것입니다. 그들의 놀이 속에 숨어 있는 허무와 권태와 좌절과 깊은 아픔을 들여다본 주인은 그들에 대한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들에게 한 데나리온은 단순한 하루 품삯이 아닙니다.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존재에 격려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재생시키고 새롭게 일으키기 위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 다음에 온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3시에 온 사람과 12시에 온 사람도 이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9시에 온 사람은 받으면서 조금 표정이 굳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뭐 다른 곳에 갔으면 덜 받았을 텐데' 위로하며 받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아침에 일찍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먼저 온 자들은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이들은 비록 한 데나리온씩 받기로 계약했지만, 주인이 하는 것을 가만히 보니 주인은 후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늦게 온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준다면 마땅히 나에게는 보너스가 있겠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주인은 이들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만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나중 온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이 사람들의 주장은 언뜻 보면 옳은 것 같습니다. 주인이 부당하게 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른바 엘리트들입니다. 인간 시장에서 잘 팔리는 인생들입니다. 남보다 먼저 가는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기보다 늦게 팔리고, 좌절하고 있는 인생, 못 나가는 인생들에게 조금의 애정도 긍휼도 없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먼저 팔려나갈 때마다 나는 날마다 잘 팔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뿐 아니라 남길 수도 있고, 축적하고, 집도 사고,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안 팔리는 인생에 대해서 평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방식은

"나는 오늘 하루 먹을 것을 버는데 옆집 김씨는 어제도 못 벌었고, 그저께도 못 벌었는데, 오늘도 못 벌어 어떡하나. 여보시오, 나는 데려가지 말고 오늘은 이 사람 좀 데려다가 쓰시오" 이렇게 말해야 참다운 인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내 능력으로 잘 팔리는데 어때"라며 주변에 더불어 살아야 할 낙오한 인생들에 대한 일말의 사랑과 애정도 없이 인생의 경주에만 전력하는 인생들이었습니다. 대체로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이렇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1등으로만 살아온 인생, 칭찬만 받고 살아온 인생, 남을 짓밟고 승리할 때마다 박수 갈채를 받았던 인생들은 떨어진 사람, 낙오한 사람, 무너진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없습니다. 그 삶의 절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인은 이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은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법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법을 넘어선 인간애와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 앞에서는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 대했습니다. 이어서 말합니다. "나중 온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하나님의 정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항상 능력 중심의 정의가 아니라 사랑에 기초한 정의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대할 것이 아니냐." 이것은 주님의 주권입니다. 이 사람들의 문제는 주님마저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기득권에 유익한 대로, 자기들의 권력과 자기들의 공로와 보상에 유익한 대로 주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비유가 나온 이유는 베드로 때문입니다. 바로 앞장에서 베드로는 "주님, 저는 부자 청년과 달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았으니 제 상이 얼마나 많을까요"라고 자신의 공로를 자찬했습니다. 주님은 상이 있기는 있지만 공로주의·보상주의를 내세우고 기득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잘나서 예수님을 좇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재물을 버리고 주님을 좇는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에 일찍 들어온 품꾼처럼 제자들도 "우리의 것을 많이 주시옵소서" 하며 주님 앞에 손 내밀고 있으니까, 주님이 "그래 주긴 주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런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며 질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자, 낮아지는 자를 통해서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 이후에 나오는 말씀이 섬김과 낮아짐에 관한 교훈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에 들어옵니까. 가진 것 더 가지려고 하는 자, 더 많은 것 주장하는 자, 잘난 척하는 자들에게 먼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득권을 주장하는 자들, 인간성을 상실한 엘리트들을 뒤집어엎는 방식으로 들어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기득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보상을 요구하는 자들이 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주님은 순서를 뒤바꾸는 것입니다. 첫째를 꼴찌로 만드는 하나님입니다.

통일·개혁에 성공하기 위해서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떻습니까. 경쟁과 비교 우위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이 잘 살고 좀더 우리 자식이 똑똑해 이 사회에서 엘리트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극복하지 않는 한 이 땅의 개혁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이 땅의 통일도 가진 자들의 잔치가 될 것입니다. 권력자들의 통일이 될 것입니다. 백성을 위한 통일은 가진 사람들이 먼저 되려고 하지 않고 뒤서는 일, 기득권을 확대 재생산하지 않고 내려놓으려는 실천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21세기 한국의 첫 과제는 통일과 개혁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은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려는 욕망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다스림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요, 가장 똑똑한 것 같지만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 엘리트가 되고자 하는 자는 꼴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꼴찌인 자는 처음이 될 것입니다. 정말 똑똑한 엘리트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의 편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대열에 서 그들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고 우리 시대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이 없이 자기의 기득권과 특권만을 누리려는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교회가 망하고 하나님 나라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문식 / 남서울산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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