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주의? 볶음주의? (그림 제공 <복음과상황>)
뜬금없는 문제 제기, 혹은 진부한 논란?

작년 하반기, 4년 만에 <복음과상황> 편집위원으로 복귀하면서 내가 붙잡은 화두는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쇄신'이었다. 분명한 한계와 적지 않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보자면 한국 복음주의 운동이 한국교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한국 사회에도 유의미한 기여를 한 점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복음주의 운동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미친 그 선한 영향력은 어쩌면 과거의 업적으로 화석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염려가 드는 것이 요즘의 솔직한 마음이다.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가 처한 문제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적지 않게 지적되었다. 보수 기득권층과 운명을 같이하는 기독교 뉴라이트의 등장, 이랜드와 한동대 사태, 온누리교회의 무리한 지교회 확장 사업과 사랑의교회의 2,100억짜리 교회 건물 건축 등… 한국 복음주의 진영의 상징적 인물과 집단 그리고 교회는 복음주의가 내세웠던 가치들로부터 중대한 일탈을 보이고 있다. 80년대 말, 민주화 운동의 격동기 이후 본격적으로 하나님나라의 확장, 사회참여, 교회 갱신 등의 소중한 가치와 대의를 위해 활동한 시작한 복음주운동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날 초라한 성적표를 들고 있는 현실에 처한 것은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자. 현재 한국 복음주의 운동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대외적으로 추구해 왔던 가치들을 실현하는 일에서의 성과는 지극히 미진하고, 대내적인 운동의 기반은 급속히 축소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 상황은 단지 운동의 일시적인 침체나 한시적인 지체라기보다는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기본 패러다임 자체에서 기인하는 구조적 차원의 문제이다.

그래서 <복음과상황>은 2012년 한 해 동안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혁신'을 주제로 연간 기획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는 단지 나의 개인적인 관심사라거나 <복음과상황>만의 고민거리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한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 광범위한 논의와 치열한 토론 그리고 깊이 있는 성찰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믿는다. 어쩌면 이러한 문제 제기에 '갑자기 왜?'라며 뜬금없어 하거나,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하며 진부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운동,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혁신이 없이는 차후 복음주의 운동의 미래는 어둡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한국 복음주의가 꾸었던 꿈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복음주의(the evangelical)는 영미 기독교의 산물이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격한 대립 사이에서 성서의 권위와 종교개혁 중심 세력의 교리에 충실하면서도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지성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중요시했던 영미 신앙인들에 의해 복음주의 운동이 탄생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복음주의라는 말은 이러한 서구적 흐름과 맞닿아 있다. 보수적 신앙고백을 유지하면서 사회적 문제에 실천적으로 개입하기 위한 필요에서 일군의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 말이 한국교회 내에서 대중화된 것이다.

오랜 세월 군사독재 정권이 지배해 온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는 절실한 역사적 과제였다. 그 과제에 응답하면서도 에큐메니칼 진영의 민주화 운동과는 구별되는 신앙적 실천의 필요가 보수적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대두되었다. 특히 사회정치사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변곡점은 1987년이었다. 87년 시민항쟁 이후 민주적 실천을 위한 제도적·이데올로기적 공간이 일정하게 확보되면서 보수적 신앙고백을 하던 기독인 진영에서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그와 같은 모색을 하던 이들이 스스로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가 '복음주의'였다는 것이다. 87년 12월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의 창립과 87년 대선 정국에서의 공명선거기독교대책위원회(공선기위) 결성으로 이러한 시도는 현실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복음주의 운동판을 형성하고 있는 집단을 '87년형 복음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참여'라는 문제의식이 87년형 복음주의의 종별성을 규정하는 핵심적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87년형 복음주의가 단지 사회참여만을 강조했던 것은 아니다. 복음주의 진영의 또 다른 화두 중 하나는 '교회 갱신'이었다. 이들은 교회가 단지 예배나 전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완전할 수는 없다고 해도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전시해 보이는 공동체라는 교회론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복음주의자들은 교회의 변화를 사회의 변화보다 더 갈망했다. 이들에게 교회의 변화란 단지 교회의 민주적 운영을 위한 정관을 정하고 교회 재정을 투명하게 집행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교회는 제한적이지만 이 땅에 임한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로서 세상에 대한 대안적 사회이자 세상과는 구별되는 대조사회였다. 그래서 복음주의자들은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공동체에 걸맞는 모습으로 변모되어야 한다는 교회 갱신에 대한 문제 의식을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있었다.

▲(그림 제공 <복음과상황>)
사회참여와 교회 갱신을 아우르는 보다 폭넓은 이론적 전망은 '하나님나라'라는 성서신학적 개념에서 도출되었다. 하나님나라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의미하며, 그 통치를 차안적 세계 속에서 확장해 가야 함을 주장하는 '하나님나라'론이 이 시기 복음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당시 제임스 사이어와 브라이언 왈쉬 및 리차드 미들톤의 저서들을 필두로 한 기독교 세계관 저작이나, 로날드 사이드, 르네 빠디야, 사무엘 에스코바 등 남미의 급진적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참여 관련 저작들 등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를 위한 다양한 신학적 논거들과 교회 갱신에 대한 담론들이 '하나님나라'의 관점 안에서 통합될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87년형 복음주의는 당대 현실 속에 구현되고 확장되는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는 전망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와 교회의 갱신이라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하나님나라 신학, 사회참여론, 교회 갱신론은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의 이론적 토대였던 것이다.

한국 복음주의 운동판, 이렇게 돌아갔다

복음주의 운동의 세대론

하나님나라, 사회참여, 교회 갱신이라는 말들은 87년형 복음주의의 이념적 지향을 표시함과 동시에 운동 이론의 근거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운동(movement)'에서 이념적 지향이나 이론(mind)이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지만 그것만으로 현실에서 운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운동은 실제로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man)과 조직 체계(mechanism)를 필요로 한다. 87년형 복음주의가 형성한 운동판은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을까?

나는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의 성립기에 형성된 기본 패러다임이 현재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형성기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패러다임을 한국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세대론적 분석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1세대

복음주의 운동의 패러다임은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지식인들과 중·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의 협력 체제 속에서 형성되었다. 편의상 전자를 지식인 그룹으로, 후자를 목회자 그룹으로 부르기로 하자. 전문가 그룹은 사회참여 운동 조직을 운영함에 있어서 '대표'의 역할을 하며 최상층 리더십을 형성하였고 운동의 기본적인 방향과 전략을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자원 동원에서도 핵심 인물(key person)로 활약하였다. 이들이 동원한 자원은 재정, 대중, 그리고 전문 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전문 인력들이다. 사실 87년형 복음주의 운동 진영의 최상층 리더십의 상에 가장 걸맞게 활동한 전문가는 이만열과 손봉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윤실이나 남북나눔 등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이 주도한 운동에는 적지 않은 기독인 교수, 변호사, 의사, 전직 고위 관료, 언론인 등이 참여하였다. 이 전문 인력 그룹과 이만열, 손봉호의 역할은 일정하게 구별된다. 전문 인력들은 일종의 공익 활동 차원에서 특정한 복음주의 운동 분야에서 국한하여 활동한데 반하여 손봉호와 이만열은 특정 영역이나 기관 혹은 조직에 제한되지 않고 복음주의 운동 전반에 관여하는 리더십을 행사하는 '메타 리더'적 존재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본업에 준하는 강도로 이 활동들을 수행하는 헌신성을 보여 주었다.

목회자 그룹은 전문가 그룹과 최상층 리더십을 공유하며 강단을 통하여 당위 차원에서 보수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이 정당한 것임을 교회 대중에게 설득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전문가 그룹의 리더들이 상대적으로 확보하기 힘든 영적 권위 내지는 신앙적 정당성을 목회자로서 확보해 가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들을 통해 복음주의 사회참여 운동에 자금 지원과 자원봉사자들을 실질적으로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도 하였다. 그런데 목회자 그룹에 속하는 인물들의 경우에도 복음주의 사회참여 운동이라는 견지에서 보자면, 결합도 내지는 활동 범위에서 일정한 차이가 존재한다. 아마도 목회자 그룹 가운데 전문가 그룹의 이만열과 손봉호의 위상에 필적할 인물은 김진홍과 홍정길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두 사람 외에도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은 존재했다. 사랑의교회의 옥한흠, 온누리교회의 하용조, 지구촌교회의 이동원, 할렐루야교회의 김상복, 강변교회의 김명혁 목사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김진홍과 홍정길만큼 복음주의 사회참여 운동 전면에 직접적으로 나선 사람은 없었다. 복음주의 사회참여 운동에서 그들의 역할은 측면 지원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2세대

전문가 그룹과 목회자 그룹은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의 기초 패러다임을 마련한 이들로서 이 운동의 1세대를 이룬다. 1세대는 전문가들이 운동의 과제를 설정하고 조직을 구성하며 대표하는 역할을 하였다면 목회자들은 이들의 활동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전문가들이 이끄는 운동에 물적·인적 토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 방식으로 많은 복음주의 운동 단체들이 만들어지고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운동을 위해서는 실무적 차원에서 움직이는 활동가들이 필요하다. 그러한 실무진들은 일선 활동가들(즉, 간사)과 실무 책임자급 활동가들(즉, 국장,총무,처장,총장) 형태로 조직된다. 87년형 복음주의운동의 초창기부터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간 동안 복음주의 운동 단체들의 실무 책임자급 역할을 하였던 이들이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2세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운동 당시 1세대들은 이미 자신의 분야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축적하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사회적 위치를 확보한 명망가들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성과와 지위를 토대로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반면 민주화 운동 시기 대학가에서는 80년대 학생운동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보수적 기독교 신앙과 사회변혁 운동을 접목시키려는 소수의 흐름이 존재하였다. 가령, 이후 공안사건으로 비화되는, 서울대의 기독교문화연구회를 비롯하여 한국외대 기독교사회연구회와 같은 그룹이다. 이런 독자적 조직으로 가시화되지는 않았지만 기존 선교 단체나 지역 교회 청년대학부에 소속되어 있지만 현실적 실천은 일반 운동권들과 같이 했던 젊은이들 역시 다수 존재했다.

그리고 지역 교회, 선교 단체, 대학가에서 젊은이들의 문제의식에 공명하면서도 그들을 보수 기독교 신앙 안에서 지도하려고 노력하던 젊은 목회자 그룹이 또한 존재하였다. 이 젊은 목회자 그룹이 복음주의 운동의 2세대를 형성하게 된다. 김회권, 김호열, 고직한, 한철호, 박철수, 강경민, 이문식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복음주의 운동의 2세대를 형성한다. 2세대들은 복음주의 운동의 최상층 리더들과 대학 선교 단체 및 지역 교회 청년대학부의 젊은이들을 매개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3세대는 바로 당시 대학 선교 단체와 지역 교회 청년대학부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하던 인물들로 구성된다.

복음주의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2세대들이 중심이 된 운동을 1세대들이 후원하는 방식으로, 혹은 1세대들이 중심이 된 교회나 기관에 2세대들이 합류하여 중간 리더, 실무 책임자급으로 활동하는 방식으로 두 세대의 결합이 본격화되어 갔다. 이후 2000년대 초중반에 이르면 1세대 지도자들이 일선에서 은퇴함에 따라 2세대들은 실무 책임자에서 서서히 당시 1세대들이 수행하던 대표자급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에 따라 3세대들은 비슷한 시기 2세대들이 담당하는 단체 실무 책임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3세대

3세대의 특징은 복음주의 운동을 대학생 시절에 '학생운동'으로서 시작하였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80년대 변혁적 학생운동의 영향권 아래에서 대학 생활을 하며 사회참여와 교회 갱신을 고민했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나라 운동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세대였다. 그리고 이들이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 본격적인 복음주의 운동이 전개되었기에 3세대들에게 당시 복음주의 운동은 자신들의 신앙적 문제의식을 현실화할 수 있는 좋은 경로이자 실현 가능한 진로였다. 3세대의 대표적 인물들은 현재 복음주의 운동의 주요 단체에서 실무 책임자들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이다. 가령 본지 편집위원장이자 한빛누리 본부장인 황병구, 청어람아카데미 대표 양희송, 한반도평화연구원 사무국장 윤환철, 기윤실 사무총장을 역임한 양세진, 성서한국 사무총장 구교형, 복음주의연구소 소장 이강일, 희망정치시민연합 사무총장 최은상 등이 그 대표적 면면이다.

그런데 3세대와 관련하여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이는 2세대와 3세대의 차이다. 2세대의 경우 핵심 인물들은 대부분이 목사였거나 사실상 목회자로서 활동하는 이들이었다. 김회권, 이문식, 강경민, 박철수, 김호열 등은 목사였고, 한철호와 고직한은 목사 안수를 받지는 않았으나 선교사로 불리며 실제로 목회자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목사들은 자생 가능할 뿐 아니라 어느 정도 복음주의 운동을 지원할 수 있는 대중적 기반과 물적 토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3세대 핵심 인물은 대부분이 목사가 아니다. 황병구, 양희송, 윤환철, 양세진의 경우 모두 목사가 아니다. 이 그룹에 속한 목사는 최은상, 구교형, 이강일이다. 그중 구교형과 최은상은 담임으로서 목회를 하고 있음에도 교회 규모가 작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구교형과 최은상은 자신이 주도하고 있는 복음주의 운동의 지원을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로부터 받아 낼 수 없다. 즉 3세대는 지역 교회를 통해 자신들의 운동을 위한 자원을 동원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것이다. 3세대의 인적 네트워크에서 목회자가 상대적으로 소수인 것, 그리고 그 목사들 역시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자원 동원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점은 향후 이 그룹이 복음주의 운동을 주도하는 데 있어서 적지 않은 장애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나는 지금까지 언급한 이들과 미처 언급하지 못했지만 이 그룹들에 소속된 인물들이 87년형 복음주의운동의 '휴먼 리소스'를 구성하고 있다고 본다. 교회, 학교, 선교 단체, 운동 조직 등을 매개로 이들은 수평적·수직적으로 연결되면서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의 인적 실체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의 패러다임이 형성되었다. 사회적 명망가들과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이 전면에 나서고 이들과 관련 있는 교회에서 물적·인적 자원을 제공하며, 이들의 인도와 지원 속에서 전업 활동가들이 실무를 맡는 조직 운동 형태. 이것이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의 기본 패러다임이다.

87년형 복음주의 운동과는 다른 흐름의 출현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지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2000년대를 지나면서 범복음주의 진영에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운동의 형태와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존 복음주의 운동의 중심 인적 네트워크에 적극적으로 포함되지 않거나 그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그룹이 복음주의 진영에 적지 않은 비중을 가지고 자리 잡게 되었다. 가령 <뉴스앤조이>가 그렇다. 사실 <뉴스앤조이>는 복음주의 운동의 중심적 흐름 밖에 있던 인물군에 의해 만들어진 매체다. 김종희를 비롯한 일군의 교계 신문 기자들이 교회 개혁의 기치를 걸고 보수 교계의 각종 비리들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인터넷 신문을 창간하면서 복음주의 진영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하게 된다.

이와 궤를 같이 하는 사례들로는 기독대학총학생회운동을 하던 '새벽이슬' 그룹, 일군의 총신대 포스트386그룹이 시작한 '새날을 사는 사람들'을 모태로 하는 '아름다운 마을 공동체'와 그들이 주도하고 있는 '기독청년아카데미', 그리고 평화운동 단체인 '개척자들' 등이다. 이들은 비록 복음주의 진영에 대한 결합도가 상대적으로 크지만 에큐메니칼 진영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일정한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은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의 구별을 넘어서려고 하는 경향성을 띤다. 또한 신학적 입장이나 정치적 실천의 방식에서 기존의 주류 복음주의자들에 비해 '왼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주의 운동의 주류적 그룹과 이들 사이에는 일정한 긴장감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한 것 아닌가

핵심 과제에서의 실패

이제 87년형 복음주의의 패러다임은 그 유통기한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내 직관적 판단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동안 복음주의 운동이 주력해 온 과제에서, 즉 사회참여와 교회 갱신의 영역에서 무능력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제한적 민주화가 제도화된 87년 체제 성립기에 형성된 한국형 복음주의는 사회참여라는 모토를 통해 그토록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노력해 왔지만 정작 현재 기독교 진영에서 가장 강력한 파급력과 대중적 동원 능력을 가지고 사회참여를 하는 진영은 한기총, 기독당, 지져스아미, 에스더기도운동 따위의 수구 우익 기독교 세력과 기독교 뉴라이트이다.

더욱이 이들이 자신의 기득권 유지와 수구적인 정치사회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사회참여' 등과 같이 87년형 복음주의의 모토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은 일종의 아이러니를 느끼게까지 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수사와 논리가 하나님나라 신학, 기독교 세계관, 로잔언약 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 사회참여 운동이라는 맥락에 보자면 현재의 상황은 그동안 소위 '근본주의'와 구별된 자신의 특유한 정체성으로 87년형 복음주의가 내세웠던 키워드들이 오히려 그 근본주의 진영에 의해 장악당해 버린 형국으로 규정될 수 있다. 더욱이 수구 우익 기독교 진영의 나쁜 영향력에 비하면 복음주의 진영의 선한 영향력은 사회적으로 그야말로 미미한 수준이다.

반면 복음주의 진영의 사회참여론은 이론적 측면에서나 실천적 측면에서 이 운동의 초창기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사회참여는 일종의 당위적 구호로 남아 있고 사회참여의 구체적인 내용도 모호하며 그에 대한 신학적 성찰의 깊이도 심화되지 않았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에서도 그 현장성은 여전히 떨어진다. 가령 최근 한국 사회의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현장이었던 용산 남일당, 홍대 두리반, 대우 한진중공업을 비롯한 비정규직 투쟁, 명동 마리, 제주 강정마을 등에서 복음주의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 (그림 제공 <복음과상황>)
개인적인 참여가 아니라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참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입장도 명확하지 않았다. 복음주의권은 평화비행기에 활동가들을 진영 차원에서 파견하지 못하고 있으며, 복음주의 진영의 희망버스 한 대도 제대로 조직해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아니 사실 이러한 참여에 대한 합의 자체가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형성되기 어려운 것이 솔직한 현실일 것이다. 이는 특히 복음주의 사회참여 운동의 집결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성서한국이 한미 FTA에 대해 어떤 공식적 입장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회참여라는 핵심적 과제에서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은 답보 상태에 있다.

이러한 답보 상태는 복음주의가 집중했던 또 다른 의제인 교회 갱신의 차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한국의 보수교회는 복마전인 상황이며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기존의 수구 우익적 교회들의 행태가 개선되지 않는 상황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때 그러한 교회들의 대안으로 주목받았던 복음주의권 교회들이 복음주의적 정신이라고 상정되던 어떤 지향으로부터 이탈한 사실이다.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들 교회가 현재 보여 주는 역기능적 모습은 복음주의가 교회 갱신의 영역에서도 분명한 대안적 모델을 창출하고 실현하는 것에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복음주의적 교회의 모델을 보여 준다고 생각되었던 교회들도 결국은 담임목사 개인의 캐릭터와 지도력에 대한 전적인 의존, 물량주의적 성장주의라는 수구적 대형 교회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87년형 복음주의는 자신이 핵심적 과제로 설정하고 있었던 사회참여와 교회 갱신에서 자신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수구 우익 기독교, 혹은 근본주의 교회를 극복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존의 복음주의 운동은 진전하지 못했다. 아니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퇴보했다고도 할 수 있다.

패러다임적 위기

복음주의 운동의 이와 같은 무력함은 그동안 주력해 온 운동 과제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놓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이 보다 더 심각한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복음주의 운동의 대중적 지반이 매우 부실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인지하고 복음주의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평신도 그룹이 줄어들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성서한국대회의 대중적인 참여도다. 성서한국대회는 명실공히 복음주의 사회참여 진영의 연합체이다. 그러나 전국적 규모의 성서한국대회를 개최한 2005년 이래 최근 전국대회가 열렸던 2011년까지 참여 인원과 대회 규모는 축소되어 왔다. 물론 이는 일개 수련회에서 나타나는 경향이라고 일축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복음주의권에서 이 수련회만큼 많은 기관과 단체가 조직적·재정적 측면에서 공동 역량을 투여하는 사업이 존재할까? 성서한국대회는 복음주의 운동 진영의 '총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대회의 규모가 축소되고 있는 현상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어떤 문제를 보여 준다. 그것은 복음주의 운동 진영이 보수 기독교 대중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며 동원하는 데 실패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징후라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이 이제 청년 대중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말해 이 운동의 대중적 기반이 부실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복음주의 운동의 대중적 기반의 부실화 경향은 그동안 복음주의 운동의 조직화 방식, 혹은 조직 커뮤니케이션의 방식과 관련이 있다. 운동의 저변을 이루는 대중적 토대를 상징적 권위에 의해 끌어내는 일방적 동원 방식. 가령 87년형 복음주의의 전형적인 '대중운동'의 방식인 '수련회'나 '집회'를 생각해 보자. 그 옛날 '복음, 민족, 역사' 대회부터 오늘날의 '성서한국' 대회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집회에서 대중들은 유명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전문가에게 영역별 강의를 듣고, 찬양 리더의 인도에 따라 찬양을 하고, 목회자의 인도에 따라 기도를 하는 일방향 커뮤니케이션(one way communication) 방식 집회에 주로 청중(audience)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동원된 대중이라는 수동적 역할에서 크게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명망가들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 집단(peer group)과의 수평적인 상호작용적 커뮤니케이션(two way communication)을 통하여 스스로 문제를 접하고 집단적으로 학습하는 능동적이고 성찰적인 고민의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자발적 대중운동이 현재 복음주의 운동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형성된 능동적 대중 없이 운동은 지속될 수 없다.

대중적 저변의 취약화라는 위기 상황과 더불어 살펴보아야 할 문제가 복음주의 운동 기관들과 단체들의 위기, 즉 복음주의 운동 조직에서 발생한 위기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언급해야 할 부분은 최상층 리더십 교체기와 결부된 문제다. 한국 복음주의 운동을 이끌어 온 최상층 리더들인 이만열, 손봉호, 홍정길, 김진홍, 옥한흠, 이동원 등의 1세대 복음주의자들이 일선에서 은퇴했거나 복음주의 운동의 중심적 궤도에서 이탈하였다.

이들은 이미 언급했듯이 전문가와 목회자로서 폭넓게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기에 운동을 위한 인적·물적 자원 동원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의 자원 확보 패러다임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일선에서 물러선 지금 카리스마적 리더들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카리스마적 리더들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다른 형태의 리더십이 극복하고 대체하고 있는 상황도 아니다. 이는 결국 복음주의 운동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한 대중적 동의를 끌어낼 수 있는 상징적 권위의 상실과, 이 운동의 기반이 되는 대중과 재정의 확보라는 자원 동원 시스템의 부실화로 귀결된다.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컸고, 이들의 리더십이 사라지면 운동 자체가 정체되거나 위기에 처하는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진하고자 하는 선의보다 더 중요한 것

칼 마르크스는 1848년 유럽 혁명이 실패로 끝난 뒤 영국으로 망명하여 오랜 시간 동안 런던의 대영제국박물관 자료실에 틀어 박혀 자본주의에 대한 심도 있는 공부 시간을 가졌다. 그 결과 이후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자본>의 원안이 되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라는 저작을 출판한다. 그가 혁명적 실천의 현장에서부터 물러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 이유는 이 책의 서문이 밝히고 있듯이 '전진하고자 하는 선의가 세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가로막는 시대'를 극복하고자 위함이었다. 자기 시대에 대한 정확한 이해, 자기 운동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명확한 파악,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적합한 전략 없이 그저 전진하고자 하는 선의만 앞세우는 것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우리 복음주의 운동에도 '전진하고자 하는 선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세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라고 본다. 그것은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의 한계를 규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철저한 반성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

<복음과상황>은 2012년 첫 호의 커버스토리로 이 문제를 다룸으로써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혁신'이라는 연중 기획을 개시한다. 차후 1년간 이 문제에 관한 논의들이 전개될 것이다. <복음과상황> 독자들과 복음주의 진영의 동료들이 이 논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주시기를 바란다.

정정훈 / <복음과상황>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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