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의 저항으로 말미암아 역풍이 거세게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승리의 길을 가려면 반드시 역풍을 뚫고 나가는 법을 익혀야만 합니다. 엘리야는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그가 아쉽게도 조기 은퇴하고 도중 하차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역사 속에서 더 사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만 역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기진맥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우리의 반면(反面) 교사로 삼고자 합니다. 우리는 엘리야처럼 조기 은퇴를 스스로 자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바울처럼 자신을 위해서는 주님 곁으로 당장 돌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지만, 이웃들과 어린양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한 더 오랫동안 이 땅에 머물며 구속 역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빌 1:21∼26). 그러려면 역풍을 뚫고 나가는 법을 익혀야만 합니다.

역풍이 강하다는 것을 예견해야(1∼4)

엘리야는 혈혈단신으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상대로 영적 전쟁을 벌여 통쾌한 승리를 거둡니다. 이방신 선지자를 모조리 처형합니다. 이 모든 광경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한 아합 왕은 혼비백산이 되었겠지요. 그가 엘리야의 권고를 듣고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올라갈 때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아합 왕의 마차 앞에서 달렸습니다. 개선장군의 의기양양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크게 착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신 숭배의 배후 실세인 왕후 이세벨의 뒷심을 과소 평가한 것입니다. 목격자 아합은 생생하게 갈멜산의 한판 승부의 비참한 결과를 이세벨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세벨은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살기가 등등해졌습니다. 이세벨은 전갈을 통해 서슬 시퍼런 경고장을 보냈습니다. "내일 이 맘 때까지 엘리야를 자신의 선지자들처럼 죽이지 않으면 신들의 벌을 마땅히 받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2절).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자신의 신을 여전히 의지하고 있는 이세벨! 그녀는 실로 대단한 여자입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맥이 탁 풀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광야로 도망쳐 로뎀나무 아래 주저앉아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쓰게 됩니다. 왜 이렇게 엘리야가 영광스러운 승리자에서 초라한 패배주의자로 비참하게 전락하게 되었습니까? 찬란한 승리를 거두고 난 후 상대방의 전력에 대해 지나치게 과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역풍을 전혀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이해진 가운데 엄청난 역풍을 만나자 맥없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풍을 뚫고 나가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항상 강력한 역풍의 가능성을 미리 내다보고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적대 세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나 이세벨 같은 사람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항상 악과 어두움의 세력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하셨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신 예수님은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에서 마귀와 한판 전쟁을 벌이고 이기십니다(마 4:1∼11).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그야말로 대단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의 가도를 달렸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혁혁한 승리를 거두신 바로 다음날 우리와 같이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고단하셨겠지만 이른 새벽에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를 드리십니다(막 1:21∼39). 감사와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신 것이죠. 새로운 일전(一戰)을 향한 준비 작업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예수님은 철저히 준비하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에 피가 섞여 나올 정도로 기도와 씨름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의 길을 온몸으로 받아들이십니다(막 14:32∼42).  

악과 어두움의 세력을 만만하게 보는 것은 치명적인 실책입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그 세력은 최후 항복을 앞둔 패잔병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세력은 무방비 상태의 성도들에게는 치명타를 날릴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의 세력은 우리의 아킬레스건을 향해 불화살을 날려 명중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엡 6:16).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승리한 후 더욱 그렇습니다.

한국 교회가 오늘 맥이 풀린 이유도 간단합니다. 1960∼198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교회 성장의 기적을 일으켰다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고만장해졌습니다. 그 사이에 악의 세력은 교회 심장부를 뚫고 들어 왔습니다. 값싼 은혜, 왜곡된 기복신앙 그리고 윤리적 실천을 상실한 반쪽 짜리 복음을 대대적으로 살포한 것입니다. 그 와중에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 버린 한국 교회는 이제야 무력화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재무장을 지금부터라도 서두르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국 교회를 향한 희망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고전 13:7).

쉼 후에는 다시 전의를 불살라야(5∼10)

하나님은 죽고 싶어하는 엘리야에게 충분한 휴식을 허락하십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가운데 피곤에 지쳐 잠들어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서 그를 어루만져주시고 숯불구이 떡과 물을 제공하십니다. 정신적으로 위로하고 체력을 보강시켜주십니다. 그럼에도 다시 누워 잠들어 버린 엘리야를 한번 더 어루만져주시고 먹게 하십니다. 이쯤 되면 좌절의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야 하는데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러서는 굴속에 처박히고 맙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엘리야의 도피 행각에 종지부를 찍고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9절) 그러나 엘리야는 계속 응석을 부립니다(10절). "가슴에 불을 품고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쳐들었지만 결과는 외로움뿐입니다. 적들은 이제 혼자 남은 나마저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저히 굴을 벗어나 다시 재도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개혁 진영은 엘리야처럼 수세에 몰려 있습니다. 반개혁 세력의 강한 역풍에 눌려 기세가 꺾여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토록 일부 대형교회 담임목사직 세습에 대한 강력한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 재정의 건강성 회복과 목회자의 도덕성 회복을 촉구해 왔지만 그 목소리는 철저히 외면되고 있습니다. 아니 바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자기 의에 빠져 혼자 잘난 척하는 사람들 그리고 교회를 파괴하려는 세력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개혁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은 너무나 깊은 외로움에 시달리고는 합니다.

이렇게 지친 하나님의 일꾼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파김치가 되어 버린 제자들에게 쉼의 기회를 주십니다(막 6:31). 교회와 사회 개혁을 위해 애쓰다 지친 이들이 엘리야에게 위로와 쉼을 주셨던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낄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마냥 쉬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잠깐' 쉬라고 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쉬었다 싶으면 벌떡 일어나 다시 전의를 불태워야 합니다. 불리한 환경과 정황을 핑계삼아 그 뒤에 숨으면 안 됩니다. 아군 진영의 패색이 완연한 순간! 바로 그 때가 그리스도인에게는 반격의 기회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숨을 한번 고른 다음에는 역풍보다 더 강력한 성령의 바람을 힘입어 역풍의 중심부를 향하여 돌진해 들어가야 합니다. 굴속으로 움츠려 들어가려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강력히 도전해오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조용한 말씀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11∼13)

하나님은 엘리야의 문제를 정확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화려한 기적을 통해서 역사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불로 역사하셨는데도 적들이 완전히 백기를 들지 않는다면 이제 다른 대안은 없다는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위하여 일종의 멀티미디어 교육을 시키십니다. 엘리야에게 산에 서라고 명하신 후 지나가셨습니다. 이때 거센 바람이 인 후 지진이 일어나더니 다음에는 불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디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이 지나가고 엘리야가 의아해하고 있는 순간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렸습니다. 궁금해진 엘리야가 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다시 소리가 그에게 들렸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13절) 하나님은 조용하고 여린 말씀 가운데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람, 지진 그리고 불 속에서 기적적으로 역사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조용하고 여린 말씀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이 점을 엘리야에게 가르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한국 교회도 이 점을 깊이 깨닫고 조용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담대하게 전할 수 있다면 어떠한 역풍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자신의 강론에 대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낙심치 않고 두란노 학당에서 2년 동안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손을 통해서 희한한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에베소는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마술을 행하던 자들은 사용하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역사를 서술하면서 저자 누가는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20)고 해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역사를 창조해 가는 힘의 원천은 희한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역사관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관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더구나 한국에서 가장 설교를 잘 한다는 분들의 설교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진리를 교묘하게 왜곡하고 있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뒤집는 힘 역시 하나님 말씀에 있습니다. 깊은 기도와 묵상 그리고 실천적인 삶을 통해 순수한 하나님 말씀의 생수를 길어 올려 황무지 같은 이 땅을 적셔나가야 합니다. 성서에 새 역사 창조의 희망을 두고 성서를 조선에 주려는 열정으로 온 몸을 불살랐던 김교신 같은 사람이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역풍을 뚫고 나가는 길입니다.

엘리야는 조용하고 여린 소리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고도 깨닫지 못하고 똑같은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너무나 외롭고 혼자서는 결코 역풍을 뚫고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할 수 없이 엘리야를 포기하고 은퇴 준비를 시키십니다. 하사엘을 아람의 차기 왕으로, 예후를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세우고,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삼게 하십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적들을 섬멸하고 바알 신앙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 사람 7천명을 남겨 놓겠다는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 남은 자가 엘리야가 생각하는 것보다 7천 배는 많다는 점입니다.

엘리야는 계속 자기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는데 그것은 사실 스스로 자초한 불필요한 고독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방신 선지자 850명과 대결을 벌일 때 자기편은 자기 혼자라는 점을 강조한 것도 사실 어폐가 있는 발언이었습니다(왕상 18:22). 왜냐하면 엘리야는 이미 오바댜를 통해 그가 보호해준 선지자 100명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왕상 18:13). 엘리야의 눈에 이 100명을 포함한 남은 자 7천명이 보이지 않은 이유는 그의 지나친 영적 우월감 때문이었습니다.

7천명의 동지가 있다(14∼18)

우리도 이런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 타락한 시대에 나만큼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에 젖어 있으면 동지를 찾을 생각도 안하고 스스로 자초한 고독의 수렁으로 빠져 버립니다. 어쩌면 이런 잘못된 고독을 슬퍼하면서 은근히 영적 우월감을 즐기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종종 엄습해오는 고독을 깊이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바른 길을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일정 정도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길이 좁고 험하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사람이 적은 것은 항상 역사적 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혼자인 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면 같이 좁은 길을 가는 길벗이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과 교회가 타락했다고 해도 남은 자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7천 배는 많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동지를 찾아내 불필요한 고독을 날려 버리고 7천명과 연대운동을 벌여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까지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제 역풍을 늘 대비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다음에는 다시 전의를 불태웁시다. 기적만 바라보지 말고 조용한 말씀의 힘을 믿읍시다. 겸손한 마음으로 7천명의 동지를 찾아내 연대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강한 역풍도 뚫고 나가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박득훈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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