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봄 문익환 목사의 열정적이고도 뜨거운 신앙이 최근 보수 대형 교회 목사들의 신앙과 달랐듯이, 봄길 박용길 장로도 무조건 '아멘'이나 해 대는 여느 신앙인들과 달랐다. 사진은 2008년 6월 10일 대한문에서 열린 촛불 집회 때 찍었던 박용길 장로의 모습. (사진 제공 김민수)
'늦봄' 문익환 목사의 길벗이었던 '봄길' 박용길 장로가 93세의 나이로 지난 25일 오전 1시 30분 숙환으로 별세하셨다. 24일 저녁, 지인들과 식사를 하는 도중 응급실로 실려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래도 며칠 말미는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 들어온 소식은 늦봄의 곁으로 봄길께서 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보내고 얼마 안 되어 이 시대의 어머니를 보내는 마음은 착잡했다. '아직도 그분들이 원하던 그 나라가 아닌데, 그분들이 꿈꾸던 나라가 아닌데 그렇게 가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 6월 10일, 대한문 촛불 집회에서 봄길을 마지막으로 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 사실 것으로 생각했다. 이 나라가 통일되는 날까지 사실 것처럼 느껴졌었다.

통일을 꿈꾸며 서울역에서 평양행 기차표를 사고 싶어 했던 늦봄 문익환 목사, 그분의 길벗이라는 것은 알았고 먼발치에서만 뵈었다. 가까이서 뵌 적도 있지만, 나는 봄길을 알았을지언정 그는 나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터이다.

2007년 9월로 기억된다. 그분이 출석하시는 한빛교회에서 설교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봄길'을 뵈었다. 연로하신 연세에도 꼿꼿하게 앉아서 설교를 다 들으시고는 손을 부여잡으시며 "고맙다"고 하셨다.

으레 설교가 끝나면 형식적으로 "은혜 받았습니다"하는 인사와는 달랐다. 그 따스한 손길 하나만으로도 품이 얼마나 넓은지 가늠이 되었다. 그는 참으로 뜨거운 신앙인이었던 것이다. 그 신앙의 힘으로 늦봄이 다하지 못한 통일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가는 구심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신앙인이 많다면 얼마나 목회가 신 날까? 이 문제는 목사의 책임도 없지 않으므로 단순히 교인들만의 변화를 기대할 수만은 없다.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봄길 박용길 장로의 신앙심을 그의 삶 전체를 통해서 보게 된다.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서도 결코 개인의 피안에 머무르지 않고 늘 역사를 향해 열려 있는 마음은 신앙과 행동의 분리를 가져오지 않았다.

늦봄 문익환 목사의 열정적이고도 뜨거운 신앙이 최근 보수 대형 교회 목사들의 신앙과 달랐듯이, 봄길 박용길 장로의 열정적이고 뜨거운 신앙도 무조건 '아멘!'이나 해 대는 여느 신앙인들과 달랐다. 한국교회가 이런 신앙의 열정으로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갔다면, '개독교'라고 욕을 먹는 일도 없었을 터이다.

기독교 정당을 만들어 이 나라의 정치판을 바꿔 보겠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는 '사이비 목사'도 없었을 터이며, 권력과 돈이나 좇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파는 목사나 신앙인도 발을 붙일 수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의인은 늘 고통을 받는다. '레드 콤플렉스'에 빠진 이 나라는 그들을 빨갱이로 몰았고, 심지어는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을 때 그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보수적인 목사들과 교인조차도 요한계시록의 '붉은 용' 운운하며 문익환 목사를 이단시했었다.

나는 지금도 잊지를 못한다. 내가 속해 있던 노회의 교회에서 문익환 목사님 방북 이후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를 한다고 해서 참석하러 갔다가 문익환 목사를 성토하는 붉게 쓰인 현수막들과 거기에 참석했던 교단 선배 목사들과 교인들을. 그러니 보수 대형 교회 목사들이나 다른 교단에서는 오죽했을까?

늦봄 문익환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 사회는 통일 민주 운동의 구심점을 잃어버렸다. 속된 말로 '어른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온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소선 씨와 봄길 박용길 장로 같은 분들은 이 시대 통일 민주 운동의 대모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런데 그분이 가을의 문턱에서 가셨다. 그렇지 않아도 쓸쓸한 가을에 이 시대의 어머니를 둘이나 보내고 나니 허망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교차한다. 거꾸로 되돌려진 듯한 최근 이 나라의 상황들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 앞으로 달려만 가도 모자랄 판에 거꾸로 달려가는 현실을 보면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가시고 나니 후회가 된다. 먼발치에서나마 종종 뵐 기회가 있었는데 사진이라도 많이 담아 둘 것을 하는 후회다. 그리고 그분들이 원하던 세상을 이루지 못한 죄송함에서 비롯된 후회다. 개인적으로 분노하다가 지쳐서 당분간 나만 생각하면서 살자고 했다.

그러나 그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인배와 소인배의 차이를 보는 듯하다. 목사의 한 사람으로 참 아쉽다. '봄길 박용길 장로 같은 신앙인만 있었다면 목회가 얼마나 신 날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나의 덜된 목사 자질이 내내 부끄럽기만 하다.

봄길, 늦봄 곁에서 편히 쉬소서. 이제 이 땅에 남은 자들이 그대들이 꿈꾸던 그 나라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조금 더뎌도 끝내 이루겠습니다. 봄길, 늦봄 곁에서 편히 쉬소서.

김민수 /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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