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그 기간이 다하였을 때에는 시장하셨다. 악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 하였다." (눅 4:2-4)

황금을 좋아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황금을 원했던 그가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 황금으로 변하게 하는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의 손이 닿자마자 그릇도, 의자도 모두 황금으로 바뀌었습니다. 황금으로 둘러싸이게 된 그는 너무도 좋아했습니다. 사랑하는 그의 딸이 그에게 다가오자, 세상에서 최고의 부자가 된 그는 너무도 행복해 하며 딸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손에 닿는 순간 그의 사랑스런 딸도 황금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욕망은 인간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살려는 욕망을 상실한 사람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재미없고 시시하다는 표정으로 넋 놓고 있는 사람에게서 과연 어떤 의미와 희망을 볼 수 있겠습니까? 욕망이 있기에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욕망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만족할 줄 모른다는 점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자신의  창고가 비어 있음을 한탄합니다. 사람마다 가진 바가 다르기에 누군가는 만족하는 사람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제 가질 만큼 가졌다고 자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전히 부족한 배를 어루만지며 끊임없이 돈이 없다고 타령을 늘어댑니다.

욕망은 생명체가 살기 위한 수단이지 목표가 아닙니다. 어떤 생명이든 먹어야 산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식욕을 상실한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원천인 식욕이 수단이 아닌 목표로 군림하게 되는 순간, 그 생명은 마찬가지로 죽음의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즉, 의미(가치)의 상실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식욕에 의해 유지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인간이 만족할 수 없는가 봅니다. 사는 게 재미없다고 한숨 짓는 사람들이 먹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닌 듯합니다. 삶의 허무는 배고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부름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허덕이는 사람에게는 허무의 그림자가 찾아들 겨를이 없습니다. 오히려 먹어야 한다는 강렬한 의욕이 넘쳐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인생 허무 타령이란 다소 사치스런 취미인 셈입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은 단지 먹는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육체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만으로는 삶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육체의 생존이 삶의 기본적 토대라면 그 토대 위에 지어질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토대만 튼튼한 삶은 무의미합니다. 그 토대 위에 어떤 그림이 세워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먹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도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이는 영혼의 생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생존이 생명의 유지라면 영혼의 생존은 삶의 의미입니다. 나라는 생명이 살아있다면 그 살아 있음이 어떤 의미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단지 살아있다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물론 죽음의 위기에서는 살아남는다는 것이 절대 절명의 필요사항이겠지요. 그러나 일단 살아남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의미라는 것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지내시다가 받은 첫 번째 유혹은 먹는 것이었습니다. 시장한 배를 움켜쥔 예수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을 때, 식욕이야말로 행동 선택에 있어 가장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할 에너지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도 인간이기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다는 광야의 상황이 그의 식욕을 더욱 부채질했는지 아니면 절제시켰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없으니 포기하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없으니까 더욱 안달이 나는 사람도 있으니 말입니다.

-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야
푸념처럼 내뱉는 말속에서 인간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굴레를 엿볼 수 있습니다. 먹는 것에 대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집착이 인간에게는 심각한 장애가 됩니다.
예수께서는 단호히 선언하십니다.

-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
먹고살겠다고 버둥거리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먹고사는 것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을 넘어서, 잘 먹고 살겠다는 욕망의 굴레를 벗어 던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숱한 사람들이 생계에 대한 근심을 하면서 삶에 집착합니다. 그래도 집 있고, 자동차 굴리고 사는 현재의 삶이 유지되어야만 한다, 만일 이보다 못한 생활로 전락한다면 '도저히 난 못 살아'라고 중얼대며 말입니다. 하나님, 부디 지금의 삶보다 나아지지 않아도 좋으니 지금처럼만이라도 먹고 살아가게 해주세요. 처절한 고백입니다.

-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
지구상에는 거무틱틱한 빵 하나로 하루를 때우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바다가재 요리를 먹으며 거만스레 입술을 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 다 생계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검은 빵을 먹는 것과 바다가재를 먹는 것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검은 빵보다는 바다가재를 먹는 삶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입으로 검은 빵이 들어가느냐 바다가재가 들어가느냐가 중요하며 이것이 삶의 목표인 것입니다.

-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는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문제입니다. 먹고사는 것이 중요한 입에서 나오는 것은, 좀더 좋은 것 비싼 것을 먹어야 한다는 욕망의 입김입니다. 그 욕망은 결코 자족할 줄 모를 것입니다.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치 않은 입에서 나오는 것은, 먹는 것이 삶의 수단일 뿐이라는 절제의 칼날입니다. 그에게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검은 빵을 먹든 바다가재를 먹든 개의치 않습니다. 때로는 먹기 자체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광야에 널려 있는 돌이라도 팔아서, 먹는 것을 더 마련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먹고 허기를 면한 육체가 할 일이 무엇인가가 그의 삶의 주된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유성오 / 휘문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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