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포 김명식씨. 염색공장에서 일하던 도중
에 기계가 폭발하여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노동자에게 국경은 없다>에 수록된 김지연씨
의 사진)
# 1
2002년 4월 중국 여성 산업 연수생이 경기도 화성시의 모회사에 근무하던 중 언니가 위독하여 강제 적립된 월급을 받으려고 무릎을 꿇고 눈물로 호소하고 나서야 월급의 일부를 돌려 받았다.

# 2
안산에 위치한 종이박스 회사에 다니던 야르씨는 형님이 사망하였으나 ‘본국에 휴가 다녀오면 그 날로 규정에 의하여 해고’라는 사측에 주장에 의해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격분한 파키스탄 노동자들의 20일 동안의 농성 끝에 겨우 본국에 돌아갔으나 이미 형님의 장례식은 끝이 났다.

# 3
2002년 6월 시흥시 시화공단의 한 도금공장에서 일을 하던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산재를 당하였으나 회사에서 방치하여 자신의 돈으로 병원비를 지불하였다. 못마땅하여 회사를 그만 둔다고 하자 그만 두라고 하였다. 하지만 임금은 주지 않았다. 3차례에 걸쳐 회사를 찾아갔으나 계속 미루기만 하였다. 오히려 임금을 받으러 갔다가 공장장으로부터 쇠갈고리로 맞고 칼부림을 당하였다. 붕대 맨 상태에서 왼쪽 팔꿈치 뼈가 금이 가고 무릎과 발바닥이 찢어지는 폭행을 당하였다.


너희는 외국인을 학대하거나 못살게 굴지 말아라. 너희도 이집트에서는 외국인이었다.
- 출애굽기 22:21 -

지난 달 17일에 이루어 졌던 정부의 한 발표내용은 30여 개의 시민 단체들로 하여금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 산하단체와 외국인 근로자 등 30여명 남짓의 발길을 명동성당으로 이끌었다.

'외국인력제도 개선대책’ 의 제목의 정부 발표내용은 40세 이상인 중국동포를 주로 한 외국국적 동포들에게 서비스 분야의 취업을 허용하고, 산업연수생을 현재보다 7만 여명을 증원하며 불법체류 단속 및 외국인 근로자 권익보호를 위해 월 2회 이상의 단속강화를 원칙으로 하는 한편 산업재해 및 체불임금에 대한 신속한 권리 구제가 이뤄지도록 지방노동관서에 전담창구를 설치하는 것 등이다.

이에 대한 시민사회단체의 반응은 냉담하다. 박천웅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소장 등이 포함된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는 명동성당에서의 농성에 앞선 기자회견에서 그 동안 수많이 제기 되어온 인권문제의 온상인 산업연수제도를 확대 실시하고,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강제추방 등을 골자로 한 정부측의 발표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 보호에의 취지와는 거리가 먼 현실성 없는 정책이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외국인 근로자들과 기독교의 참여 근거

60-70년대 미국을 위시한 서방측의 ‘근대화 PROJECT’ 도입에도 불구하고 라틴아메리카가 저 발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로 제시된 (중심-주변부 관계를 살피는) 세계 체제론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의 한국과 동남아 저 발전 국가와의 경제관계를 살피는 데에도 적실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중심국가의 자본 및 기술과 주변국의 노동력을 결합시키는 세계체제내의 노동분업체제에서 국내의 기업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공장을 이주시키거나 값싼 노동력을 가진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로 유입되는 모습은 현재의 ‘신 자유주의’ 자본경제 체제의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이 같은 배경 하에 현재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인식은 국내 근로자의 입지를 축소 시킨다는 단면적인 생각을 넘어서 세계경제 조류인 신 자유주의 경제체제라는 큰 틀에서 고려되어야 하며 WTO등 세계 경제체제에 속해 있는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외국인 근로자의 존재가 인정되어야 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재 이슈화 되고 있는 ‘외국인력제도 개선방안 발표’에 따른 기독교의 참여는 현대 문명/세속/물 신적 문화에 대한 비판적 행위를 수행할 수 있기 위해 사회의 다른 범주들과의 교류 및 연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문화.정치학적 관점 하에서 그 동안 가려졌던 외국인 노동자들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의 해결을 위해 그 들에 대한 인식의 재정립은 물론 나아가 구체적인 실천에의 노력을 경주함과 더불어 이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이 고민해야 할 문제임이 틀림없다.

외국인 근로자 인권과 노동 허가제 도입

여러분이 고용한 가난한 품꾼이 여러분의 동족이든 여러분의 땅에 사는 외국인이든 여러분은 그를 학대하지 말고 그의 품삯을 해가 지기 전에 지불하십시오. 그는 가난하기 때문에 그 돈이 당장 필요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그 품삯을 당일에 주지 않으면 그가 이일을 여호와께 호소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그 일로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 신명기 24:14-15 -

정부 발표중의 가장 눈에 뛰는 것은 ‘산업연수제’의 확대이다. 정부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3D업종의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현행 연간 8만 명으로 묶여 있는 외국인 산업연수생수를 12만 명 수준으로 대폭 늘릴 방침으로 정했고 최종결론은 이보다 1만 명이 늘어난 13만 명으로 결정했다. 이는 그 동안 산업연수제 폐지를 주장하던 외국인 근로자들과 시민 단체들의 주장을 전면 묵살한 정부의 일방적인 입장이다.

현재 근로자 신분으로 인정하지 않는 산업연수제도는 그 동안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문제 및 여러 불법.비리의 온상으로 지적되어 왔다. ‘한국산업사회연구회와 외국인 근로자 인권을 위한 모임’ 자료를 살펴보면 95년 까지 산업연수생의 한달 평균 임금은 외국일 불법 체류자의 임금의 1/2배를 조금 웃돌 정도이고, 임금체불 경험은 88.7%가 ‘있다’고 답했으며 주당 55-56시간에 가까운 노동을 하면서도 국내 근로자들의 임금 수준의 40-50% 수준이라고 밝히고 있고, ‘아산노동자지원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불법체류 노동자의 경우 월70∼80만원선의 월급을 받으며 산업연수생의 경우 최저임금을 적용해 실질 수령액 30∼40만원선 수준이며 잔업 특근수당 등 모두 합쳐 50∼60만원선 정도이다.

이러한 외국인 근로자들의 사회적 무방비 노출 상태를 무기 삼아 사용자 측은 이 들의 월급을 강제 적립시키거나 심지어는 감금. 폭행을 일삼고 있다. 산업 연수생들의 한국말 교재 중 ‘우리도 사람이 예요. 함부로 때리면 안돼요.’라는 문구가 들어있음은 이들에 대한 국내의 법적 사회적 보호장치가 얼마나 부실한지 직접적으로 말해준다.

외국인 근로자가 합법적으로 국내에서 노동을 할 수 있게끔 하는 ‘노동 허가제’의 묵살의 이유로 정부가 들고 있는 ‘줄어들게 될 국내 근로자들의 입지’에 대한 근거는 이미(자진 신고한 수) 26만 명 이상에 달하는 외국인 불법 체류자들과 국내인력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했다고 밝힌 중소 기업측의 발언에 비추어 보아 그리 설득력이 있게 보이지 않는다.

이 같은 앞 뒤가 맞지 않는 정부의 산업연수제 확대 발표에 대해 박천웅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소장은 95년부터 2002년 3월까지 총 6차례에 걸쳐 중앙기업협동조합 간부들의 외국인 노동자 불법 입국 브로커 역할을 한 것을 언급하면서, 중소기업중앙회와 정부간의 ‘돈과 권력의 입맞춤’이라고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산업 연수제의 장점을 고스란히 가지고 이미 노동 허가제를 실시하고 있는 국가들의 불법 체류자들의 비율(싱가포르 3.2%, 독일 6.5%)과 비교되는 한국의 77.7%라는 높은 수치를 외국인 근로자들의 인권탄압의 비율로 본다면 필자의 억측일까.

우리들의 침묵이 그 들을 억압하고 있다면

너희는 너희 땅에 사는 외국인을 학대하지 말고 그들을 너희 동족같이 여기며 너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한 때 이집트에서 외국인이었음 기억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  -레위기 10:33-34 -

어느 철학자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철학은 없다라고 말했다.
국내 한 작가는 80년 광주 이후 그 어떤 사고(思考)도 무의미하다고도 했다.

분명 외국인 근로자들은 억압과 핍박을 받고 있으며 주님이 풀어주신 손과 발의 매듭이 좀 더 가진 자들에 의해 또 다시 묶이고 있다. 역사는 끝났다고 거대 자본주의 국가의 한 지식인은 설파했지만 ‘끝난’ 역사의 흐름이 그 흐름의 주요기제(자본)에 의해 다시금 ‘얽매이고’ 있다면 ‘묶였던 자들을 풀어주었던’ 예수의 제자 됨을 선포하고 있는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60-70년대 우리나라 역시 독일과 중동 등지로 노동력을 수출했고 그 즈음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차별대우에 항의하며 농성하던 우리 근로자들의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예전에 우리가 수출하는 노동력을 이제 수입 받는 위치가 되었다고 우리의 그들이 받았을 설움과 고난을 국내의 외국인 근로자에게 똑같이 되돌려 준다면 우리 사회는 어디로 흘러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샤르트르는 칼라스 사건과 볼테르, 드레퓌스의 사형선고와 에밀 졸라 그리고 콩고 문제와 지드와의 관계를 말하며 구성원들의 자기 시대에의 무관심을 소리 높여 비난했다.

분명 그 들은 고통 받고 있다.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현실적 문제 아래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잔칫집의 바닥이 보인 포도주를 다시금 채워 넣어주셔서 당신의 피조물들의 삶이 생명의 축제가 되어야 함을 몸소 보여 주신 예수와 그런 예수의 제자 됨을 선포하는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밀린 임금을 받으러 갔다가 사측으로부터 쇠갈고리질과 칼부림을 당하는 근로자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십자가’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있으며, 억압과 핍박을 일삼는 우리가 믿는 십자가를 상처 입은 그들은 또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어두운 가운데 빛나는 교회당의 붉은 전등의 십자가가 그들에게 더 이상 ‘핏빛 첨탑’만으로 보여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우리들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 큰 것일까. 천만 기독교인을 가진 우리들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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