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헨리 나우웬 외 3인 공저 '긍휼', IVP
헨리 나우웬에게 '긍휼'은 그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긍정적인 미덕 중에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내던지라는 도전이다. 그 도전 앞에 우리는 결단을 요구받는다. 또 그 결단은 곧 내 신앙고백이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다가, 간혹 가난한 이웃을 만나면 가진 것 없는 처지에서도 통장에 있는 잔액을 확인해본 다음 적은 돈이라도 송금해주고,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탈북자들이나 제3국 난민들의 죽음 행렬을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 가슴 졸인 채 지켜보다가 잠시 뒤돌아 무릎꿇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구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리고, 잠자리에 들어선 오늘 하루도 가족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지내도록 보살펴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소박한 그리스도인을 가장 적당하게 묘사하는 단어가 '긍휼'이 아닐까.

헨리 나우웬의 답은 '아니다'. 긍휼에 관한 그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곤혹스러워지고 불편해진다. "긍휼은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깨어진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라고 촉구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부짖고,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도전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연약한 자들과 함께 연약해지고, 상처 입기 쉬운 자들과 함께 상처 입기 쉬운 자가 되며, 힘없는 자들과 함께 힘없는 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긍휼이란, 인간됨이라는 상황 속에 푹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긍휼을 바라보노라면, 긍휼에는 평범한 친절이나 부드러운 마음씨 이상의 것이 관련되어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된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벌써 부담을 느끼지 않는가. 차라리 긍휼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채 사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저 아래 절망의 나락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손짓을 하고 구원의 막대기를 던질 것이 아니라, 절망의 나락에 직접 뛰어내려가라고, 그리고 거기서 그들과 '함께 있으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고통의 자리, 두려움의 자리, 외로움의 자리, 절망의 자리, 무기력의 자리에 '직접 들어가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것이 인간됨을 회복하는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가 인간다운 삶,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추구하는 한, 이처럼 고통스럽고 잔인하기까지 한 긍휼의 삶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을.

우리가 긍휼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내 삶을 온전히 내던져야 할 뿐 아니라, 거대한 장애물과 맞서 싸워야 한다. "만일 중요한 사안들이 진정으로 긍휼어린 사람들의 손에서 결정된다면, 우리의 문명은 생존하지 못할 것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지금 편안하게 행복하게 소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긍휼한 사람들 덕분이 아니라 긍휼하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반(反)인간적 문명의 혜택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곤혹스러워진다. 지금까지 우리의 안락하고 안전한 삶을 뒷받침해주던 구조물(문명)을 거부해야만 하는 지점에 이르기 때문이다.

나우웬 역시 긍휼을 베풀고자 하는 인간의 경향에 대해 점점 확신이 없어지면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더욱 절감한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성미와는 맞지 않는 것을 하라는 부르심이며, 우리를 완전히 바꾸고 마음과 지성의 총체적인 회심(回心)을 요구하는 부르심이며, 진정으로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부르심, 즉 우리 삶의 뿌리까지 깊숙이 도전하는 부르심인 것을 깨닫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긍휼이다.

[긍휼](IVP), 엄격하게 따져서 헨리 나우웬 뿐만 아니라 도널드 맥닐, 더글러스 모리슨이 함께 쓴 이 책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도전, 그리고 희망을 준다. 이 책에 등장하는 두 사람을 볼 때 더욱 그런 마음이 솟는다.

김지하. 박정희 정권 시절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으로 수 차례 옥살이와 고문을 당했던 시인. 나우웬은 "그의 정신은 강인했고 희망은 꺾일 줄 몰랐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고난과 민중의 고난 너머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김지하 같은 증인들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위대한 긍휼에 대해 마음 깊이 감동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그런 점에 대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들은 고난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고난에 마음이 끌리지도 않는다. 오로지 고난을 줄이고 약화시키고자 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너무도 강력하게 이끌린 나머지, 고난과 고통조차도 다만 그들의 소명의 일부, 감수해야 할 때가 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일부로 삼은 것뿐이다"라고 했다.

▲ 이 책의 그림을 그린 조엘은 민중들에게 긍휼을
베푼 대가로 아들의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조엘 필라티가. 이 책에 실린 그림을 그린 그는 파라과이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사역하는 의사였다.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고통도 깊이 느낀 그는 의술을 통해 육체적 질병을 치료해줄 뿐 아니라 그림을 통해 사람들의 고통을 표현했고, 그것이 권력에 대한 저항의 물결을 일으키기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상처를 보살펴주고, 약한 자를 옹호하고, 그들의 인권은 침해하는 자들을 강력하게 고발하고, 압제받는 자들이 정의를 위해 투쟁할 때 거기에 합류하고…. 다시 말해 조엘은 자신의 친구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는 긍휼을 위해 값비싼 희생을 치러야 했다. 열 일곱 살 된 아들 조엘리토가 경찰에 납치돼 고문을 받은 끝에 처참하게 죽은 것이다.

나우웬에 의하면, 조엘은 비싼 값을 치르고 산 긍휼의 불꽃이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큰 불길이 되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기를 바라면서 이 책의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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