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쉐퍼 목사는 그의 저서 <이성에서의 도피>에서 중세 유럽의 세계관은 이층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즉 세계는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하되 위층은 성·하나님·은혜(恩惠)·초자연(超自然)의 영역이고 아래층은 속·인간·자연(自然)의 영역이라고 보았다.

그 예로서 중세의 미술가들은 성경을 테마로 한 성화를 많이 그렸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 성당,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고 성인들을 많이 그렸다. 이런 성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숙연해진다. 물론 그 당시 글을 못 읽는 대중들을 교육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 교회는 자연과 보통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생활상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땅과 사람들은 죄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구속의 대상일 뿐 미화하거나 즐길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런데 14세기 르네상스와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미술에도 대혁명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에 영향을 받은 미술가들은 땅과 보통 사람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네덜란드의 렘브란트가 대표적인 미술가이다. 자기의 초상화를 그렸다든지, 목욕하는 여인, 그리고 밧세바의 적나라한 목욕 장면 등은 하나님이 이 땅을 인간에게 즐기라고 주신 것이라고 믿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현실적으로 그려 냈던 것이다.

이런 세계관은 종교개혁의 영향인데 자연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깃들여 있다고 믿는 개혁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이 땅에도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마틴 루터가 "예수님이 오늘 밤에 온다 해도 오늘 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한 것이나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가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 것이 아니라고 할 영역은 하나도 없다"고 한 것처럼 말이다. 즉 예수님은 공간적으로는 우주의 모든 영역의 주이시고 시간적으로는 이 세상도 저 세상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일반 은혜(혹은 은총)와 둘째는 특별 은혜이다. 특별 은혜는 성경이고, 일반 은혜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을 말한다.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로 물들어 있고 그 결과로 자연계까지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롬 1:19~20, 마 7: 9~11). 그렇다고 사람이 자연계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믿는 사람에게나 안 믿는 사람에게 똑같이 햇빛을 비춰 주시고 비를 내려 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 은혜이다.

예로서 일반 은혜 중 하나는 생각하는 기능이다. 이 기능은 사람이 지음받은 하나님의 형상 중의 하나인데 이 부분도 죄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기능이 어느 정도 살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입시철이 되면 교회 새벽 기도에 부모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사실은 새벽 기도를 하는 사람이나 안 하는 사람이나 머리를 열심히 굴리면 대학에 갈 수 있다. 이것은 수적으로 간단히 증명할 수 있다. 대학 입학생 중 믿는 학생이 전체의 몇 할이나 될 것 같은가?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들어갔지 부모가 새벽 기도를 했다거나 십일조를 바쳤다고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 안 하면서 하나님께 안 믿는 사람들을 왜 대학에 보내느냐고 불평할 수 없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은 안 믿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 은혜를 잘 쓴 것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들이 대학 전형 때만 되면 새벽 기도 하러 오는 부모들로 붐빈다고 한다. 그것도 지성인들이 말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목사들이 이런 잘못된 미신을 고쳐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성(특별 은혜)과 속(일반 은혜)을 혼돈하는 한 좋은 예이다. 이런 잘못된 신앙은 한국인 마음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토속 신앙에 기인한 것이고 더 나아가 이런 미신적 마음 바탕을 이용한 삼박자 구원이라는 신앙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교회가 성과 속을 잘못 이해하는 영역은 교회 건물에도 있다. 교회를 구약에서 부르던 이름대로 성전이라고 하는 목사가 있다. 성전이 있으면 제단이 있어야 하고 제사드리는 제사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희생 제물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는 제사는 안 드리고 제사장도 없는데 성전이란 이름은 아직도 많이 쓰고 있다.

성전이 성스러운 이유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인데 신약에 와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파괴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성전이라고 사도바울은 말한다(고전 3:16~17).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전이고 어디서 모이든지 이들이 성전인 것이다. 믿는 자들이 모이는 건물은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에 지나지 않는다.

런던 한인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정월 초하루에 예배를 드린 후 점심을 같이 나누고 예배드리던 장소에서 윷놀이를 했다. 이 소문이 런던에 자자하게 퍼지면서 "김 목사는 이단이다"는 말까지 돌은 적이 있다. 신학교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하다.

그 비싼 땅에 아름답게 지은 '성전', 하나님이 계실 거라고 믿고 주중에도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한 대 예배실. 예수님이 지금 오면 그 아름다운 성전에서 마음 편안히 계실까? 그 꽃 냄새가 역겹지 않을까? 그 꽃값이면 노숙자가 몇 끼를 때울 텐데, 그리고 예수님은 노숙자들을 불러서 성전에서 같이 주무시지 않을까? 또 그 비싼 땅을 주중에 비워 놓고 목사들이 회의한다며 꼭 호텔로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주일예배가 끝나면 꽃을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집에 가져가도록 하였다. 주님께서는 주중에 예배당에 안 계시고 성도들 가정에 함께하실 것이다.

제단이니 제물이니 하는 단어는 이제 그만 썼으면 한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마틴 루터는 제단(Altar)을 밥상(Table)이라고 불렀고 목사는 밥상 뒤에 서서 회중을 바라보고 성찬을 나누어 주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제단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예전을 행한다. 성찬식 때마다 예수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행위는 예수님이 자신을 단번에 희생 제물로 바쳤다는 성경 말씀에 반한다(히 9:26~28).

그것뿐인가? 천주교에서는 신부가 떡과 포도주를 축복하면 떡이 살로, 포도주가 예수의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믿는다. 그래서 신부들은 잔에 남은 포도주를 예수의 피라고 버리지 못하고 다 마셔야 하는 고민이 있다. 개신교에도 문제가 있다. 한국 장로교 헌법에 보면 남은 떡과 포도주는 태우든지 땅에 파묻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개신교는 화체설을 믿지 않는데 왜 남은 성찬을 이렇게 특별 취급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물론 구약 언어를 비유로 쓴다고 변명하겠지만 평신도들은 구약 언어를 자주 들으면 구약적인 신앙을 갖기가 쉽다.

그리고 제사장처럼 가운을 입는 것도 삼가 해 주면 좋겠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주님만이 참제사장이시고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믿는 자는 다 제사장이라는 만인 제사장설이 성경적이다(벧전 2:5, 9, 계 5:10, 20:6).

혹시 목사의 권위를 세우려고 가운을 입는 건 아닌지,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 하나님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다 주님께 속한다고 고백한 이상 목사의 권위를 세우려고 형식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내용이 허술해지면 겉 장식에 신경 쓰려는 인간 심리가 작용하는 거 같다. 목사의 권위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사는 만큼 있고 하나님 말씀을 수호하고 전하는 데 있다.

강대상은 왜 크고 화려하게 만드는가? 보르네오에서 비싸게 수입한 나무인데 쓸데없이 크게 만들어 강사의 몸을 거의 가려 밑에 앉은 사람은 강사의 얼굴만 볼 수 있다. 이렇게 높고 큰 강대상은 의사 전달에도 방해가 된다는 것을 설교학에서 배우지 않았는가? 그래서 의사 전달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이해하는 부흥강사는 마이크를 쥐고 강단 앞으로 나와 설교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성과 속을 잘못 구분하는 분야 중 연보도 있다. 모든 것의 10분의 1은 하나님 것이라고 하면서 교회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 몫이라고 생각하며 마음대로 쓰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도 잘못된 성과 속을 구분하는 신앙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요'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10의 1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머지 돈도 하나님의 것이고 가정과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써야 한다.

교회도 세상 안에 살고 있으면서 세상의 일반 은혜에 단단히 덕 보고 살고 있다. 지상의 하늘나라인 교회가 세상 안에 존재하는 한, 그리고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자비로 세상에 남겨 두신 일반 은혜를 인정하고 즐겨 써야 한다.

교회와 가정을 생각해 보자.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인 동시에 사회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가정이 흔들리면 교회가 흔들리고 사회가 파탄 된다. 최근 영국 여러 도시에서 젊은이들의 폭동이 일어났던 이유 중 하나는 그들 가정의 자녀 교육 부족이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성과 속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면서 교회에서 시간을 더 보내고 교회에만 연보를 바치고 주일은 교회에서 하루 종일 지내는 성도들을 모범생으로 생각한다. 주일도 이산가족으로 교회에서 지내고 저녁에는 파김치가 되어 귀가한다. 더구나 주중에는 온 가족이 분산되어 지내는데 온 가족이 모여 안식할 수 있는 주일마저 교회에서 빼앗고 있다. 요새는 쇼핑몰의 개념을 기반으로 한 전원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 주일날 성도들이 하루 종일 모든 활동(예배와 교제, 오락, 경제활동 등)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어 놓고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다.

교회가 가생활은 무시하고 믿는 자들만 모여서 잔치를 벌이는 이익 단체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로 믿지 않는 친구들과 놀 시간이 없으니 전도할 기회도 적어진다.

미국 카버넌트신학교 제럼 바즈 교수는 신입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믿지 않는 친구가 몇 명이나 있느냐?" 믿지 않는 친구가 없으면 누구에게 전도하려고 신학교에 오느냐는 거다. 사람을 거듭나게 한 경험이 없으면서 신학교 졸업장만 가지고 기성 교회에 들어가 CEO가 되려는 것은 처음 단추를 잘못 낀 것이라는 말이다.

쉐퍼 목사님은 전도의 가장 좋은 방법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사귀고 자기 가정을 오픈해서 식사 초대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의 보금자리를 오픈한다는 것은 마음을 여는 것과 같다. 내 마음을 먼저 열어야 상대방이 마음을 열게 되어 있다. 식사를 같이 하면 마음 문이 열리게 되고 마음이 열려야 대화가 되고 대화가 이루어져야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일반 은혜를 이해하는 것이 전도에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전도자와 피전도자의 공통점을 일반 은혜에서 찾는다. 그 공통점은 둘 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혜택을 누리며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공동 광장에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 문을 여는 데 심리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 전도하는데 특별 은혜부터 시작해서 나는 구원받았고 너는 아니라는 성과 속을 먼저 차별화해서 말하면 대화의 문이 열리겠는가?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해서 낮은 자세로 나아가야 전도가 먹혀 들어갈 것이다.

아씨씨의 프란시스는 "열심히 삶을 보여라. 그리고 꼭 필요하면 말로 전하라"고 했다. 믿는 사람은 사는 만큼만 말로 복음을 전할 권리가 있다.

내 영국 친구가 최근에 한국을 다녀와서 경험한 것을 말해 줬다. 전철 안에서 구걸하는 사람이 바구니를 내밀며 지나가더란다. 수녀 두 사람 앞으로도 지나갔는데 수녀들이 아무 반응을 보여 주지 않더니 구걸하는 사람이 지나간 후에 일어서서 승객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더란다.

교회와 예술을 생각해 보자. 가수가 예수를 믿은 후에는 복음성가를 불러서 전도하는 데 헌신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종종 듣는다. 미술가들은 예수 믿고 나면 성화를 그리겠단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재능의 가능성을 좁히는 행위이며 자연에 나타난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신앙이다.

내 아내 씬시아는 예수 믿고 미술 대학에 진학했을 때 복음주의 교회의 '좁은' 신앙에 답답함을 느꼈다고 한다. 소위 경건주의적 교회에서는 세상적 예술과 거룩한 예술을 구분하여 세속적 영화를 감상한다든지 세속적 음악 감상을 죄악시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라브리에 가서 쉐퍼 목사의 일반 은혜에 기반한 세계관을 배우고 나서 경건주의 족쇄에서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성()과 일반 은혜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가족이라는 단체를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 주셨다. 그렇다면 성(행위)도 좋은 선물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성을 죄악시하거나 부끄러운 행위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태도는 육체(물질)과 영혼을 구분하여 육체는 천한 껍데기이고 영혼이 진짜 내용인데 천국에 가면 영혼이 육체의 감옥을 탈출한다는 영지주의의 이론을 닮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영국 라브리에서 '기독교적 성관'(Good Sex)라는 제목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이 강연은 성행위의 기교에 관한 것이 아니고 성과 성행위를 기독교적 세계관의 입장에서 설명한 것이다. 기독교인이면 꼭 듣고 이해해야 할 좋은 강의이다. 관심 있는 독자는 요청하면 강연 CD를 보내 주겠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싫증나면 망가뜨리는 버릇이 있듯이 인간들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오용 내지는 악용하는 죄가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이라는 좋은 선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려면 교회에서 연구하고 가르쳐야 한다. 교회에서 이런 작업을 안 하니까 교인들까지도 세상의 물결에 휩쓸린다. 교회에서는 성의 신성함과 동시에 성의 오용의 결과인 낙태, 간통, 이혼, 성매매 등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가르칠 의무가 있다.

낙태 문제를 들어 보자. 필자가 설교에서 낙태가 생명을 죽이는 살인 행위라는 것을 말했을 때 그 반응은 놀라웠고 어떤 성도는 강대상에서 성을, 그것도 낙태 같은 것을 언급한다는 것은 위험한(필자는 여성도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여 위험하다고 해석했다) 것이라고 귀뜸해 주는 것이었다.

중년이 넘어서 임신한 여성도가 낙태하려고 한 것을 겨우 말려서 낙태 직전에 수술을 포기하고 아들을 낳은 사실이 있다(그 가정은 딸만 넷이 있었다). 그 아들은 지금 버젓이 청년이 되어 결혼도 했고 그의 부모들은 기회만 있으면 낙태 반대를 하고 다닌다고 한다.

천주교에서는 오래 전부터 성교육을 시켜 왔지만(성행위는 하나님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한 후손을 잇기 위한 유일한 목적이라고 잘못 가르치기는 했지만), 개신교에서는 성을 수치심 없이 즐길 수 있는 하나님의 좋은 선물임을 인정하는 정도이다.

반 낙태 운동도 선교 단체에서 시작했지 교회에서는 일언반구도 없었고 지금도 낙태가 죄라는 것을 설교에서 언급하는 목사는 드물다. 성도들만 낙태를 안 해도 그리고 믿는 의사들만이라도 낙태 수술을 안 하면 한국의 낙태 통계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어떤 친구의 누이가 의사인데 월급은 적지만 일반 병원에서 대학 병원으로 간 이유가 대학 병원에서는 낙태 수술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교회가(목사가) 비상식적인 언동을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사회 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을 반(反)하거나 초월하는 언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신 양심이라는 일반 은혜를 무시하는 태도에 기인한다. 물론 인간의 양심도 죄에 물들어 온전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일반 은혜로 인간에게 남겨 두셔서 인간 사회가 평화를 누리고 살도록 하셨다.

어떤 교인은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인간의 뜻에 따르면 안 된다고 하면서 상식(양식)에 벗어난 언동을 하고 심지어는 세상 법까지 무시한다. 이런 행위야말로 하나님이 일반 은혜를 사용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이해 못한 결과이다(롬 13장).

일반 은혜를 이해하는 것은 지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해 줄 것이며(이것이 기독교 문화 창조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을 엔조이하는(소요리 문답 1.) 올바른 길일 것이다. 더 나아가서 안 믿는 자들과의 관계를 더욱 폭 넓게 그리고 아량을 가지고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도에는 꼭 필요한 신앙이다. 신학교에서 '일반 은혜'를 배워도 실천하기 힘든 이유는 우리의 생각 깊숙이 토속 신앙과 유교 사상, 심지어는 영지주의의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인데 이 뿌리를 복음으로 뽑아야 한다.

김북경 / 국제장로교 영국교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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