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다. 이러한 가르침은 당시에 놀라운 일이었다고 성경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지적한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아빠처럼 친근한 분이 아니라, 위엄이 있고 무서운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친근함보다는 원거리에 있는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치 어린 꼬마 아이가 아빠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듯이, 아빠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내주시기까지 하셨다.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까지 내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아깝다고 주지 않을 것은 없다(롬 8:32).

영적인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의 육적인 아버지 사이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요청을 들어주신다는 점이다. 그런데 차이점도 있다.

첫째로, 육신의 아버지는 능력에 있어서 제한적이지만 영적인 아버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육신의 아버지는 해 주고 싶어도 해 줄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때로는 돈이 없어서, 때로는 힘이 없어서, 때로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해 줄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며, 우리의 눈과 입과 코를 지으신 하나님이시고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다.

둘째로, 어느 정도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육신의 아버지는 그 마음이 변할 수도 있다. 이 세상에는 아버지와 자식 간에 소송을 하는 일도 종종 생긴다. 부모와 자식 간에 마음이 틀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가끔 보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결코 변치 않으시는 분이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이다.

셋째로, 마음이 변하지 않더라도 육신의 아버지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존재이다. 그러면 해 주고 싶어도 해 줄 수가 없다(시 146:4).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개척 교회를 하던 나의 아버지는 지병으로 이 세상을 뜨셨다. 그 이후로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누릴 수 있었을 많은 것들을 상실한 채 살아왔다. 지금도 아버지가 살아 계셔서 자식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가 그지없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서 어머니가 일을 하셔야 했고, 그래서 어머니의 자애로운 돌봄을 받을 시간들을 많이 놓쳤다. 부족한 가정 형편 때문에 가지고 있던 꿈을 접어야 할 때가 많았었다. 육신의 아버지는 해 주고 싶어도 언젠가는 우리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고 그때가 바로 내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계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아버지를 누구로 모시는가에 따라 우리의 삶이 바뀐다. 우리가 누구를 의지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결정된다. 북한은 김일성을 아바이 동무로 모셨다. 그 결과는 피폐된 오늘날의 북한이다. 김일성은 인간에 불과했으며 참아버지가 아니었고 북한 주민들을 구원할 자가 아니었다. 그도 역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던 한 인간에 불과했었다. 이에 반해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의미이다(갈 4:7). 하나님이 부요하시고 풍성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만족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다. 이 세상천지 만물을 지으신 만왕의 왕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갈 4:6).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녀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는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따라 지으셨다. 따라서 우리가 피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아니다. 당연히 아버지를 닮고 태어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닮고 태어난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닮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도 코와 눈과 입과 팔과 다리가 있어, 그 생김새가 인간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을 인간처럼 표현할 때가 많이 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손을 드시기도 하시고 이곳으로 오기도 하시며 기뻐하시기도 하시고 한탄하시기도 하셨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쓴 표현이지 결코 하나님이 인간처럼 손이나 다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우리와의 '닮음'은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이런 닮은꼴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고백이 입술로만 이루어진다면 참다운 고백이 될 수 없다.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 보면 주인공은 아기를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임신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아빠를 닮은 구석이라곤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찾아낸 것이 엄지발가락 모습이 닮았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부자 관계를 증명할 수 없다. 친자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선 닮은꼴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현대 의학에 의하면 혈액형이나 유전인자로 부자 관계를 증명할 수 있다. 영적인 부자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선 영적 유전인자가 같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

사실 우리는 사탄의 자녀였다. 하는 행동이 죄뿐이었고, 하는 생각이 나쁜 생각뿐이었다. 사탄이 '아이구 내 이쁜 자식…'이라며 좋아할 우리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과거의 나, 즉 사탄에게 종노릇하던 나, 사탄의 자녀가 되었던 나는 죽었다(갈 2:20). 그리고 다시 태어났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엡 4:22~24).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입술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증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평화를 도모하는 사람(peace-maker)이다(마 5:9). 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사탄을 닮은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육체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는 사람이다(롬 8:13~15).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사탄의 모습을 닮은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갈 3:26).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징계하심을 달게 받는 사람이다(히 12:5~13). 하나님의 자녀는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이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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