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자매님의 애지중지 아끼던 애완견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갑자기 죽다. 주인이 잠들기 전에는 잠을 안자고 기다리며 주인이 일어날 때면 함께 일어나 늘 주인을 그림자 같이 따라 다니며 경호견으로 때로는 재롱둥이로 옆에서 함께 하던 애완견이 죽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슬프고 아프겠는가.

애완견을 길러보지 않은 사람은 이 아픔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슬픔에 잠긴 자매는 며칠동안 밤잠을 설치다. 하여 가까운 산 밑에 고이 묻어 주고 마음이 안됐어 바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분이지만 날마다 시간을 틈틈이 내어 강아지 무덤에 찾아가 옆에서 잠시 지내다 오는 일을 일상으로 삼다.

그러길 1년이 지났을까. 얼마 전 죽은 애완견 생각하는 마음을 스스로 달래보려고 조그만 토끼 한 마리를 장에 나가 사 오다. 눈부시도록 하얀 털에 빨간 눈을 가진 자매의 주먹만한 크기의 조그만 토끼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순진하게 쳐다보는 모습은 얼마나 청순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가.

그런데 토끼도 강아지처럼 똥오줌을 가리는 줄 알았더니 그러지 못하고 사방을 다니며 오줌을 싸고 똥을 싸 이불을 다 더럽히다. 한군데서 싸는 게 아니고 콩알만한 똥을 방구석 사방을 돌아다니며 싸니 어떻게 애완용으로 기를 수 있으랴. 외모로 예쁜 줄만 알았지 토끼의 생리를 잘 알지 못했던 자매는 더 이상 방에서 기를 수 없게 되자, 토끼와 떨어지기 서운하지만 자기 이상으로 좋아하는 이웃집 어린아이에게 눈물을 머금고 선물로 주게 되다.
  
그런데 그 토끼가 그 집에 가서 하루만에 죽었다는 거다. 목욕시킬 때 귀에 물이 들어가서 죽은 모양이라나.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일러주고 전에 쓰던 강아지 샴푸도 주며 목만 내 놓고 잘 씻기라고 시범도 보여 줬는데 그대로 하지 않아 하루만에 죽었다나. 강아지가 죽어 슬퍼하던 자매가 요번엔 토끼마저 죽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하여 너무 안타까워 안쓰러워하고 있는 데 자매의 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말하길 "그렇게 좋아하니 하나님이 질투하시지 않으시겠느냐, 네가 너무 좋아하여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시란다"고 하시다.

2.
나이가 들면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인가. 젊은 시절 결혼하고 나서는 열심히 사느라고 바쁘고 애 키우느라고 바빠 자식이 별로 귀여운 줄 모르고 지내던 분들도 나이가 들어 손자들을 대할 때는 귀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헌데 결혼한 남자가 나이 백살이 다 되도록 기다리던 자식을 낳지 못한다면 얼마나 마음이 쓸쓸하고 허전하겠는가. 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백살이 되어서야 학수고대하던 자식을 마침내 하나 얻은 아브라함은 너무 자식이 귀여워 좋아 죽을 지경이다. 이쯤 되면 그 사람의 눈에는 자식 이외에 보이는 게 없게 된다.

친구도 친척도 이웃도 모두 그에게는 액세서리다. 오직 자식만 귀여울 뿐이다. 하여 하나님도 자연히 가려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그의 인생길을 인도하신 은혜의 하나님도 안중에 없게 된다. 형식적으로 이름만 부를 뿐이다. 누군가 경고하지 않으면 아브라함은 노년에 낳은 자식에 빠져 이성을 잃을 수도 있다. 누군가 그를 간섭하고 올바른 지적을 하여 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쯤 되면 남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기에게 옳은 말하는 사람을 모두 원수 취급하게 되고 결별하게 된다. 그런 경우 대개 눈과 귀가 어두워져 스스로 침륜(沈淪)에 빠지게 된다. 권력을 쥔 자들이 자식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일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니겠는가.

이런 상황에 그를 간섭할 사람은 하나님 밖에 없다. 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자식 때문에 생겨나는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식을 번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다. 백세에 난 귀한 자식을 죽이라는 말씀이다. 그 자식을 없애야만 아브라함이 정상적으로 정신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실은 하나님의 질투가 아니요 아브라함을 위한 긍휼과 자비이다.

그래야 아브라함이 살 수 있고 그래야 이웃이 살 수 있고 그래야 사회가 평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는 일련의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를 일컬어 "사랑의 하나님" 혹은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한다. 나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리라.

자매가 강아지와 토끼를 귀여워하여 애완용으로 기르는 것은 변화하는 문화 속에서 좋은 취미생활이 될 수도 있으며, 아브라함이 자식을 귀여워하는 것은 부모의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일 수 있다. 그리고 자기 것을 자기가 귀여워하고 좋아하는데 누구도 나무랄 이유는 없다. 하지만 무엇에든지 너무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우상이 될 수도 있다.

우상이 된다는 말은 그것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다른 것과 타협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허면 그것으로 인하여 정신을 빼앗기게 되고 사물을 왜곡하게 된다. 이성을 잃어버리고 감정에 치우치게 된다. 자기 생각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내치고 원수로 간주한다.

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하시고자 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리라는 거다. 학문이건 부이건 명예이건 권세이건 교세확장이건 자식이건 취미생활이건 간에 이런 것들에 대한 너무 지나친 애착은 자기만 알게 하고 남을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집착과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하나님이 보이게 되고, 하나님이 보여야 믿음이 생기게 되며 그 믿음이 신앙으로 발전되어 순종하며 살게 된다. 하여 하나님께 대한 순종하는 마음은 사회와 인류를 위하여 헌신과 봉사를 하게 만들고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에 나타내게 된다.

해서 그것이 전도가 되고 선교가 된다. 그를 통해 세인들이 하나님의 속성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정의와 공의를 위하여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초월하고 초연한 자세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빈 마음을 갖는 훈련이 필요하다.

동양화의 매력은 텅빈 여백에 있다. 먹물을 듬뿍 먹인 붓으로 멋드러지게 간단히 터치를 한후 나머지는 여백으로 내버려둔다. 그것은 미완성이 아니요 완성이다. 텅빈 곳에 오히려 텅빈 충만이 있다. 비어있는 여백에서 무한한 상상을 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정신을 세상의 것으로 잔뜩 채우지만 말고 적당한 여백을 남겨둘 때 성령께서 찾아오실 여지가 있고 텅빈 충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닐까. 일상의 삶 속에서 멋스러운 삶을 살려면 사물에 대한 지나친 애착을 버리고 소박하고 검소하며 마음 한 구석 텅빈 여백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여유가 있고, 자유가 있고, 창조의 역동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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