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강이지만 어제 보았던 강과 오늘 보는 강이 같지 않다는 말이 있다. 그 강이 담고 있는 물이 다르기 때문이고, 그 물속에서 노니는 물고기나 여러 가지 조건들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도 어제 만났던 사람이지만 오늘 다시 만났을 때 그 사람은 달라져 있을 것이고 또한 그 사람을 만나는 나도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과대하게 그려 내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만화를 본 적이 있다. 그 만화는 데이트를 하려고 예쁘게 치장하고 나온 여자에게 남자가 같이 데이트를 갈 수 없다고 거부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만화 속에서 그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와 같이 데이트를 할 수 없어. 왜냐하면 어제 내가 데이트를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던 여자는 머리를 땋아 올리지 않았었거든. 너는 내가 약속한 여자와 달라."

옷이 달라지고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심지어 팔이 하나 없어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어떤 사람이 예전의 어떤 인물과 동일한 인물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 종종 학교에서는 어릴 적 사진을 가지고 와서 누구의 어릴 적 사진인지를 알아맞히게 하는 일이 있다. 우리는 미국으로 이주할 때, 이렇게 우리의 이민 생활이 길어질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살림살이를 그대로 놔두고 가방만 몇 개 들고 들어왔다. 그래서 학교에 제출할 우리 아이의 어릴 적 사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는 한국 사람의 갓난아기 사진을 손에 들려 주어 보낸 일화가 있다. 어린아이의 모습 속에서 1학년짜리 아이와 같다고 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 어떤 사진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맞히기도 하지만, 어떤 사진은 아무리 알려 줘도 동일 인물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3:5). 옛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일은 내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가 잉태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지,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서 어머니를 선택하여 태어나는 적극적인 행위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것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요 3:16)"이다. 새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 8~9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가 어떤 특별한 노력을 해서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거짓 종교와 참종교를 나누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과 헌신에 달려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새사람이 될 수 없다. 이런 절망적인 일을 예레미야 13장 23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아무리 장대높이뛰기를 연습한다 해도 우리가 높이 뛸 수 있는 것은 겨우 6.14m에 불과하다. 이 기록은 우크라이나 선수 세르치 부브카가 1994년 7월 31일 이탈리아 경기장에서 세운 세계 신기록이다. 하지만 장대높이뛰기를 더 열심히 연습한다고 해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올라갈 수 없다. 위에서부터 헬리콥터가 날아와서 우리를 데리고 올라가든지, 아니면 엘리베이터를 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거짓 종교는 열심히 마음 수련하고 열심히 도 닦고 열심히 헌신하고 헌금하고 하면 구원받거나 복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구원의 가능성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다. 구원은 하늘로부터 거저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우리가 구원을 은혜로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상반된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첫째, 그러니까 나의 노력이 아무 필요도 없고 이제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생각이다. 이것을 율법 폐기론자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경향이 기독교 역사상 많이 존재해 왔다. 두 번째, 구원받았으니, 그 구원에 맞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가? 후자가 옳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후자가 맞다. 장기가 망가져 죽어 가는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장기를 기증받았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장기를 기증한 사람이 잘못돼서 죽었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정상인가? 감사로 그의 인생을 살며 성실하게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전장에서 목숨을 내놓은 소대원들의 무덤 앞에 선 라이언은 아내에게 묻는다. 자신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아내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당신은 인생을 참으로 의미 있게 보람되게 살았다고. 다른 사람들의 희생으로 내가 살아났다면, 나는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구원받는 것이 내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내가 마음대로 죄악을 저지르며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그 사람 이 구원받은 사람인지 의구심이 간다.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영역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정의 전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한 여인을 연애하게 된다면, 온통 그 사람 생각만 날 뿐인 것처럼, 그리고 그와 함께 있기를 좋아하고,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고 싶은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기뻐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헛것이다(약 2:19~20).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내주하셔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하게 만드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여전히 실수투성이겠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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