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말로 '연감' 혹은 '연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영어 단어인 yearbook은 종종 미국의 학생들이 그들의 학교생활을 정리하면서 만들어 내는 기념 사진첩을 의미하기도 한다. 학생들이 만들어 낸 yearbook을 보노라면, 아이들의 추억이 어떻게 만들어져 갔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이 있다면, 학생들 사이에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실은 것이다. Yearbook의 편집진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져서, 그 대답을 yearbook에 실어 놓는다. 그런 질문들 가운데는 이런 것들이 있다. '누가 가장 최고의 부자가 될 것 같은가?' '대통령이 될 것 같은 사람은 누구인가?' '어느 커플이 결국 결혼으로 이어질 것 같은가?' '어느 커플이 곧 깨질 것 같은가?'

몇 년 동안 학교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면밀하게 관찰해 온 학생들의 의견과 10년 후, 혹은 20년 후 실제의 모습과 일치할지 혹은 일치하지 않을지는 모르겠다. 잘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고등학교 시절에 보여 준 삶의 모습이 나중의 삶과 거의 일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삶 속에서, 그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고 어떤 기회를 어떻게 처리했는가에 따라 그들의 삶은 상당히 많이 달라져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튼 아주 흥미로운 설문조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 교회의 영어권을 목회하는 David Lee 목사님은 학창 시절에 '가장 옷을 잘 입는 사람'으로 뽑혔다고 한다. 하긴 이 목사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할 정도로 미적 감각이 뛰어난 분이니, 고등학교 시절에 주변의 학생들이 그렇게 뽑았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된다.

사울왕은 '10년 뒤 혹은 20년 뒤에, 가장 성공한 삶을 살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으로 뽑혔을 법한 사람이었다. 사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키가 크고 아주 멋진 친구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아주 겸손했었다. 하지만 사무엘서에서 그려 주고 있는 사울왕은 실패한 왕이었다. 그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택이 아닌 엉뚱한 선택을 하였다.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에 연연하고 정치적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다윗을 없애는 데 자신의 역량을 다 쏟는 사람이 되었다. 블레셋 민족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였을 때에는 효과적으로 막아 내지 못하고 대응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반면,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군대를 이끌고 군사 행동을 개시하는 한참 부족한 왕이었다. 결국 사울왕의 마지막은 비참한 모습으로 끝난다.

반면 어쩌면 다윗은 '10년 뒤 혹은 20년 뒤에 가장 성공할 것 같지 않은 사람'으로 뽑힐 뻔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족들 사이에서 다윗은 인정을 받지 못했었다. 심지어 사무엘이 새로운 왕에게 기름을 붓기 위하여 이새의 집을 찾았을 때, 어린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을 후보의 축에도 끼지 못하여 밭에서 데려오지도 않았었다. 아무도 그가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재목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그의 부모조차도 다윗은 한편으로 제쳐 놓았다. 아마도 다윗은 키가 왜소하여 사람들에게 그렇게 강력한 인상을 주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선택하셨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될 사람에게 기름을 붓기 위하여 이새의 집을 찾았을 때, 이새의 큰아들인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흡족해하였다. 아마도 사울처럼 그 용모와 신장이 빼어난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을 압도할 만한 카리스마가 충분히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을 부르려고 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사람들의 관점에서 별 신통치 못한 모습을 가졌던 다윗을 하나님은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셨고, 다윗의 가계에서 메시아를 보내셨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스펙에 눈이 먼 사회가 되었다. 멋지고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최고로 여기는 사회가 되었다. 화려한 치장으로 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 화려함으로 치장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올인 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문제는 교회마저도 그러한 사회적 관점을 따라가고 있는 현상이다. 용모와 신장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최고의 관심사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외모를 보시지 않는데도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용모와 신장을 보지 않는다는 말은 화려하고 멋진 스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무조건 다 불합격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불합격이었던 이유는 그가 뛰어난 외모와 뛰어난 스펙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엘리압을 제쳐 두신 이유는 그가 뛰어난 용모와 신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불합격의 이유는 그런 외모와 신장에 걸맞은 내면의 진실함과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면서 살았다고 기록한다(마 3:4). 이 모습은 어쩌면 오늘날 홈리스의 모습과 유사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모습만 보면 존경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위대한 스승 가말리엘에게서 사사한 내로라하는 랍비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화려한 옷에 권위 있는 포즈를 하고 백성들을 훈계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평가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눅 6:24~26)."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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