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마다 전도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 달라졌다. 한국교회 초창기에 최권능 목사님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표현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70년대에 복음을 전할 때에는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고 전도했다. 한참 개발에 대한 붐이 일고,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가 한국 전역에서 퍼져 나갈 때, 예수를 믿어 복을 받아 보라는 메시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메시지였다.

시대가 많이 바뀌어, 오늘날 필라델피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에게서 자주 듣게 되는 메시지는 "우리 교회 목사님 설교 테이프 좀 들어보세요!"이다. 가난에 찌들었던 예전에는 복 받는 것이 시급했고, 잘사는 것이 소원인지라 이러한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들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별로 아쉬울 것이 없고 충분히 먹고 살고 있기 때문에 복 받는 것이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은 현시점에,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메시지가 바뀌는 것은 어쩌면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보다 목사와 교회를 선전하는 시대가 되었나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래도 예전에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예수를 소개하려 했었고 예전에는 불신자들에게 다가가려고 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고 했던 옛날식 메시지가 꼭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곧 복된 길이라며 더 나아가 진정한 복된 길임이 분명하지만 그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마치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적 관점에서의 행복이 보장되는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이 세상에서의 형통함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정한 복은 세상의 관점에서의 형통함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종종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릴 때, 하나님께서 그곳을 피하게 만드셨음을 고백하는 간증을 종종 듣게 되고, 9.11 사태 때 하나님께서 그곳을 피하게 만드셔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는 간증을 듣는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성경은 예수를 믿는 자들은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9·11사태 때 내가 알던 어떤 신실한 크리스천은 목숨을 잃었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릴 때 그곳에서 죽은 사람은 불신자들뿐만이 아니라, 크리스천들도 상당수가 재난을 당했다.

이번에 한국에 물난리가 났는데 그 가운데서도 피해를 본 사람들 중에는 신실한 크리스천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형통하게 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망하게 된다는 법이란 없다. 시편 73편에서 시편 기자가 고백하듯이 불신자이며 악한 자가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살다가 죽을 때에도 편안하게 아무런 고통 없이 죽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크리스천들이 고통을 당하며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바울 사도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듣지 않으셨지 않은가? 수많은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힘들게 인생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따라서 예수 믿는 것이 '궁극적인 의미에서,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 복된 일임에 틀림없는 일이지만, 마치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인 양 소개한다면, 이것은 복음을 왜곡한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러한 복음의 왜곡을 피하셨다.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어른만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셨을 때, 당시의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셨다. 나중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예수님은 군중들을 떡으로 먹이실 수 있었고 그들의 병을 치유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떡 때문에 찾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기적의 떡을 통해서 '표적'을 보기 원하셨다.

하지만 우리들은 표적보다는 떡이 더 눈에 더 급한 법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보다는 하나님의 유용성이 더 절실한 셈이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들고 전쟁터에 나갔다. 광야 40년 동안 그들을 이끌었던 하나님의 유용성이 그들은 그리웠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경배할 대상이라거나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자세 같은 것들은 하나도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단지 하나님의 힘이 다급할 때 필요할 뿐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싶지 않으셨다. 그래서 법궤를 들고 간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무참히 지고 말았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복과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마치 그것이 예수의 유용성이라 선전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아무리 화려함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거짓 선지자일 뿐이다.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자들을 사랑하신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돌보심이 이 세상의 관점에서의 축복으로 반드시 나타나지 않는다. 성경은 이 세상의 축복의 관점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영적인 진리를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비유이다. 표적을 바라보게 만드는 기적이 떡인 것이다. 크리스천이라 해서 반드시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자녀들이 모두가 잘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질병이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 때로는 전혀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우리가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어려움과 고통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점이다(롬 8:38~39). 우리 중에는 지금 아주 힘든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힘든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외면하시는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볼 능력이 없기 때문도 아니다.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를 우리가 우리를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의 확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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