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투수가 던진 공이 타자의 배트를 맞고 뒤로 튕겨져 내 눈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그랬다. 청년들과 함께 소프트볼을 하던 그날, 나는 생애 최초로 포수의 자리에 앉았고, 언제나 초보들이 그렇듯 안전 수칙을 무시하고 포수를 보다가 날아온 공을 눈에 맞고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오른쪽 눈이 정통으로 맞았다. 심한 통증이 느껴졌고 눈이 아른거렸다. 내가 한쪽 눈을 실명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잠시 후 일어나 앉아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을 떠 보았다. 눈이 보였다!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산산이 조각이 난 안경을 수습해 가지고 왔을 때에는 다시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안경 조각은 아주 예리한 사기그릇이 깨진 것처럼 날카로운 파편을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나는 응급실에 가서 검사를 받고, 의사가 눈동자는 다치지 않았고 파편이 눈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해 줄 때에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새로운 안경을 구하게 되었다. 좀 더 세련된 디자인의 안경테에 도수도 좀 더 내게 맞는 것으로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었다. 안경을 깨트리지 않았다면 몇 년 더 예전의 안경을 써야만 했을 텐데 안경을 깨트리는 바람에 더 좋은 안경을 쓰게 된 셈이다.

금년 초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새로운 휴대폰을 구입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의 S사가 만든 휴대폰이냐 미국 A사가 만든 브랜드냐 고민한 끝에, 한국 제품이 훨씬 더 좋다는 신문 기사를 기억하고 한국 S사의 G 제품을 구입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실망의 연속이었다. A사의 제품과 비슷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지극히 실망스러웠다. S사가 언론을 길들이고 여론을 호도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로 우리 집 식구들은 불만스러움을 가진 채 휴대폰을 사용하여 왔다. 둘째 딸아이는 휴대폰 빨리 바꿔 달라고 계속 나를 못살게 굴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 한국의 S사 제품 대신 미국 A사의 제품으로 제일 먼저 갈아탄 사람은 우리 아내였다. 그 이유는 아내가 빨래방에 갔다가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도 수없이 전화기를 잃어버렸지만, 교회에서든 차 안에서든 아니면 냉장고 안에서든 다시 찾아냈는데, 이번에는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 그 전화기를 발견하고서 가져가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새로운 전화기를 사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냥 다른 사람이 쓰던 중고 전화기 한 대 얻어서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좋은 것을 쓰다가 수준이 떨어지는 것에 적응하기는 어려운 법이어서 새로운 전화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결국 오늘 첫째 딸아이가 전화기를 업그레이드하면서 자신이 쓰던 전화기를 아내에게 주었다. 아내는 전화기를 잃어버려서 더 좋은 전화기를 얻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잃어버리는 것이 거의 드문 나는 앞으로 1년 반을 더 기다려야 더 좋은 전화기로 갈아탈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미국에서는 드림 법안이 논쟁거리다. 16세 전에 입국해 법 시행 전 최소 5년간 미국에 거주하면서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입학하거나 군에 입대한 30세 미만의 불법 체류자에게 영주권 신청 자격을 주는 게 드림 법안의 요지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거의 상관이 없이 부모를 따라 미국에 불법으로 체류하게 된 학생들에게 새로운 삶의 소망을 제공하는 것이기에 꿈의 법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법안에 반대하는 자들은 불법에 대한 '보상'을 할 수는 없으며, 이 법안이 더욱더 많은 불법 체류자들을 양산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잘못에 대해서 처벌만 있다면 이 사회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이미 망가져 버리고 잘못된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도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에서는 수많은 제도들이 잘못하고 있는 자들에게 오히려 보상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제도들이 있다. 예를 들면, 힘들고 어려워도 건강보험에 가입한 자들은 오히려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을 길이 줄어드는 반면, 건강보험이 없는 채 6개월 이상 있었던 사람에게는 정부의 건강보험 혜택에 가입할 수 있게 해 준다. 힘들고 어려워도 주택 융자금을 꾸준히 갚아 온 사람들에게는 어떤 혜택도 돌아가지 않지만, 그 융자금을 갚지 않고 얼마의 기간 동안 지내온 사람들에게는 융자금 이율의 조정 등등 여러 가지 혜택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러한 사실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 왔던 사람들에게 일종의 좌절감을 심어 줄 수도 있다. 미국의 중산층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또 그에 따라 세금도 잘 냈지만, 자녀들을 대학에 보낼 때에는 장학금 혜택도 없이 등록금을 모두 다 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시급하고 절실한 것인가를 아는가? 돈이 없는 가난한 자는 정부의 건강보험 혜택이 없다면, 병이 생겨도 병원에 가지 못할 것이다. 돈이 없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장학금 지원이 없다면, 그들의 자녀들은 대학에 갈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제도를 악용하는 자들이 생겨날 수 있으며, 우리가 쉽게 목격하는 것처럼 오히려 근로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가난한 자들에게는 이러한 도움이 절실한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고 기록한다(롬 3:23). 그런데 그렇게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처벌만이 있다면 우리는 아무런 소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런 죄를 지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사랑의 보상을 해 주시는 것이다.

양 떼를 떠나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은 분명 잘못을 범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목자는 그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 길을 잃지 아니한 99마리의 양을 남겨 두고 길을 잃은 양에게만 모든 정신을 다 쏟아붓는 것이다. 잘못을 행한 양에게 오히려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집을 떠난 탕자를 위해 아버지는 기다리는 것이고, 탕자가 돌아오면 그 탕자에게 금가락지를 끼우고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 우리는 모두 다 잘못했다. 단 한 사람도 의로운 사람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책망하시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주셨다. 이것이 우리가 견딜 수 없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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