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한겨레 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동서말씀연구회의 주원규 목사(37)의 연재 칼럼입니다. 천민자본주의와 유교적 가부장제의 괴이한 결합으로 인해 뿌리부터 그 기능이 마비된 한국교회의 현 상황을 볼 때, 2,000년 전 예수가 선포한 교회의 참모습, 그 원형을 살펴봐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구호로서의 새로움이 아닌 영적 혁명으로서의 새로움을 지향하는 교회의 방향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현대는 포스트모던 시대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시대의 대세임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대의 시대적 조류는 그 반대, 또는 혼동의 양태로 표류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던의 반대개념, 즉 모더니즘, 정통성의 복귀 개념이 대두되기도 하며, 포스트모던과 모더니즘의 타협점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혼돈의 표류가 가져오는 결정적인 현상은 진리의 붕괴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절대의 부정이 이제는 시대의 도그마인 것처럼 간주하고 있음이 부정하고만 싶은 우울한 시대적 흐름입니다.

현대의 시대적 흐름, 포스트모던 앞에서 기독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독교 진리는 어느새 서서히 기초서부터 썩어 들고 있습니다. 거대한 성전의 탈구됨처럼 그 근본이 비틀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신교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진리의 절대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개신교의 열광적 구령에 대한 의지는 어느새 세속화(secular)된 도시 한복판에서 우스꽝스러운 광대의 몸짓으로 희화화되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인터넷과 각종 미디어를 통해 개신교는 '개독교'가 되어 버렸고, 진리의 메시지는 온갖 악의적 흠집 잡기에 의해 더는 훼손될 수 없는 바닥으로까지 곤두박질친 것이 혼돈의 시대적 물결 앞에 선 기독교의 냉정하지만 명확한 현주소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을 거스르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러한 흐름을 개혁주의, 혹은 보수주의적 신앙으로의 회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포스트모던의 흐름을 역행하여 절대 진리를 추구하고 수호하려는 신앙의 열망은 세속주의에로의 야합에 대한 거칠고 원색적인 질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와 함께 축자영감설로의 복귀를 종교개혁의 근본적 슬로건인 '오직 믿음으로만'의 의지와 부합되는 최상의 방법론인 것처럼 선전하는 세력도 포스트모던 시대의 반대급부로서 영향력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심스럽게 질문해 봅니다. 그러한 일련의 역행적 흐름을 과연 긍정적인 보수주의 신앙의 복귀로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만 보기 어려운 혐의가 다분합니다. 일례로 초대교회에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슬로건의 위험성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로의 복귀는 필경 역사적 현실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다양한 시대와 문화적 차이를 막론하고 공동체 모두가 자신들의 소유 재산을 한데 모아 통용할 수 있는 이상적 모델로서 제시된 초대교회를 모든 교회 공동체에게 강요한다는 것 또한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에로의 복귀를 주창하는 건 정신이라는 건데, 그 정신의 계승 또한 역사적 의미의 뉘앙스가 강한 '초대교회'에로의 복귀를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는지는 심히 의문입니다.

이렇듯 이른바 보수주의 신앙이 무언가를 떨쳐 내고자 하는 강박의 이면엔 포스트모던의 절대 진리에 대한 부정과 조롱, 야유에 대한 반대급부의 반발적 야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던이 절대 진리의 해체를 주장하고 다원적인 이념의 도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그 이면에는 시대의 현상이 자리 잡고 있음을 간과해선 곤란합니다. 시대의 가치는 속도라는 새로운 괴물에 의해 놀랄 만큼 빠르게 급변하고 있습니다. 그 속도의 괴물에 한데 뒤엉켜 포스트모던의 괴물 또한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제는 속도라는 시대적 산물로서 포스트모던이 자연스럽게 한 자리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절대 진리 역시 이 속도의 괴물이 쏟아 낸 포스트모던의 불구덩이 속에 휘말려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또 다른 포스트모던, 또 하나의 우상

그런데 오늘의 기독교는 이 혼란의 시대에 또 다른 우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속도의 괴물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구시대의 유물처럼 취급되는 절대 진리를 간곡하게 붙잡고자 하는 근본주의적 야심이 또 하나의 우상으로서의 힘을 얻고 더 나아가 세력화되어 가는 사실의 발견입니다.

속도의 괴물이 정교하게 세공된 현대 문명과 궤를 같이하여 찬란하게 꽃을 피우지만 인간의 내면엔 근본적으로 무언가에 의지하려 하는 본능적 의존성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종교성이라고 해도 무관할 것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에서 더한층 특별하게 부각되는 것이 바로 이 종교성입니다.

종교성, 종교심은 시대의 불확실성이 압도할 때 더욱 세력의 흥왕을 맛봅니다. 오늘의 시대는 분명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절대 진리가 무너졌으므로, 과거 중세 암흑시대와 같은 불변한 하나의 도그마가 역사의 유물 속으로 유기되어 버린 지금 도그마는 오히려 온갖 자연재해와 과학 문명으로도 통제되지 않는 인간 욕망의 오물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불안과 공포가 속도의 괴물이 무한정으로 방출해 내는 포스트모던의 가혹한 빠름처럼 그야말로 광속으로 인류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듭니다. 이렇듯 불확실성에서 기인한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과 종교 집단, 그리고 사회는 본능적으로 종교심에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종교심이 다시금 도그마로서의 진리를 갈망하고 절대 진리의 그늘에 의지하여 안식을 누리고자 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언뜻 보면 시대적 흐름의 반발적 충동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이 속도의 시대가 품고 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또 하나의 포스트모던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안과 공포에 의해 다시 규합된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욕망은 개신교의 종교개혁의 모토를 이루었던 '오직 믿음으로만'의 개혁적 추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종교성이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던의 또 다른 이면을 차지하는 이러한 절대 진리의 추구는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진리와는 거의 무관한 방향으로 발전함을 보게 됩니다. 불안과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마약과도 같은 '망각'의 이념으로서의 진리 추구 외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인간의 결속력, 그로 인한 종교적 집단화가 가장 흥왕할 수 있는 시기도 바로 존재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불안과 공포가 극대화될 때입니다.

바벨탑 쌓아 올리기의 홍위병이 되어 버린 교회

가혹한 수위로 넘쳐나는 불안과 공포로 인간은 극심한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갑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어느 순간 장엄한 종교의 깃발을 내건 누군가들의 선동으로 인해 경외심으로 둔갑합니다. 집단으로서의 종교는 이때 또다시 힘을 얻기 마련입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기형적으로 출산한 포스트모던의 또 다른 이념으로서 태동한 절대 진리는 그러므로 진리의 겉모습을 갖고는 있지만 사실 그것은 그토록 야유와 조롱, 환멸의 적대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포스트모던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그런데 이 얼굴이 수상합니다. 이 또 다른 포스트모던은 정의의 얼굴을 하고서 스스로 자신을 심판자의 위치를 올려세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얼굴을 통해 인간의 종교심은 극한을 향해 치닫습니다. 종교심의 깃발 아래 다시금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불안과 공포를 조금이라도 잊기 위한 마약, 아편으로서의 종교가 깃발을 높이 들면 그 아래 모여드는 이들은 자신의 영혼의 심장에서 벽돌 하나씩을 자발적으로 내어놓습니다. 그리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거대하고 드높은 바벨탑 쌓아 올리기에 헌신되는 것입니다. 바벨탑의 목표는 하늘에 닿는 것입니다. 하늘에 닿고자 하는 궁극의 목적은 욕망에 세뇌된 존재가 존재의 원형이 차지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고자 함입니다. 곧 절대 진리라는 이름을 가진 우상의 독소에 마취되어 그 우상이 예수가 되고 구세주가 되어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으로 믿는, 혹은 믿고자 하는 신념의 극한까지 밀고 올라가고자 함이 바벨탑의 근본적 추동력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바벨탑은 끝내 붕괴한다는 진리 말입니다. 오늘날도 예외는 아닙니다. 불안과 공포, 불확실성을 미끼로 새로운 신념을 충족시키려는 또 다른 이름의 바벨탑은 결국 어느 순간에 가선 그 바벨탑을 세우기 위해 영혼의 심장에서 꺼낸 벽돌로 인해 더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욕망의 불구덩이 속으로 내던져질 것입니다. 경쟁과 착취에서 비롯되는 고통으로 아우성치는 천민자본주의의 추악함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종교개혁의 찬란한 모토를 가슴에 품고 있는 개신교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러한 바벨탑을 쌓아 나가는 데 스스로 홍위병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메시지, 그 순수성은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근본부터 다시 돌아보아야 할 문제적 현실 앞에 오늘의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란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인 예수의 십자가를 어느 순간부터인가 존재의 불안과 공포의 염증을 해소하기 위한 망각의 사탕발림, 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중증의 효력을 지닌 부적으로 남용하기 시작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피 흘림은 진리를 옹립하고자 하는 신념의 범주 속에서 너무나 쉽게 절대의 심판자로 군림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심판의 시각 속에서 세상은 다시 불안과 공포를 조장한 사탄으로 변개됩니다. 세상이라는 사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바벨탑을 쌓기 시작하는 종교, 종교심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단 한 줌의 희망도 없습니다. 바벨탑의 첨단에 십자가가 내걸리고 사랑의 메시지가 선포된다 해도 그것은 끝내 붕괴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품은 바벨탑에 불과합니다. 뿐이며, 불안과 공포를 잊기 위한 미신의 토대로부터 세워진 욕망의 신념으로서의 예수는 결국 찬란한 빛을 발하던 진리의 섬광을 완전히 망실해 버릴 것이며, 그 후 존재는 노아의 방주 안이 아니라 방주 밖, 거대하고 막막한 혼란의 홍수 속을 표류할 것입니다.

두 가지 투쟁, 해체의 요구

오늘의 교회는 이러한 이중적 투쟁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성인 진리의 붕괴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하는 싸움과 우리 내면에 쌓고 있는 신념으로서의 바벨탑을 무너뜨려야 할 싸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때문에 오늘의 교회는 급진적일 만큼 해체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체입니까? 현대 문명으로 대표되는 신념으로서의 이성과 공포와 불안의 기반 위에 세워진 불확실성으로 윤색된 종교의 바벨탑, 이 두 가지 근본 프레임 자체를 해체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포스트모던 시대와 무책임하게 동거하는 속도의 괴물이 쏟아 내는 하수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어느 시대보다 더욱 천박하고 야만스런 극단의 세속 도시 속으로 무기력하게 섞여 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신비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의 실체는 바로 오늘의 현실 한복판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불안과 공포의 종교성에서 발아된 신념의 바벨탑이 아닌 세속 한복판과 진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포스트모던의 막장에서 숙주처럼 기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영혼의 심장에서 죽음보다도 더 깊고 강렬한 불안과 공포의 휘장을 찢어 내고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적 임현이 더없는 강렬함으로 체험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예수를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변방의 한복판에서 출생하여 세속도시 한복판에서 가장 비참하고 비루한 삶을 연명하던 세리와 창녀들의 품속에서 그 사자후를 토해 내던 풍운아 예수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던의 쓰레기더미 위에서

그 변방, 포스트모던의 쓰레기더미 위에서 예수는 살아났습니다. 진리가 철저히 짓밟히고야 만 '유대인의 왕'이란 조롱의 가시면류관을 뒤집어쓰고 살아났습니다. 야유와 가학적 첨단인 십자가 처형으로서 죽임을 맞이한 그 예수가 부활한 것입니다. 죽음의 피막으로 무장된, 더할 수 없이 가혹하게 존재의 영혼을 얼어붙게 만든 죽음의 공포와 불안으로 세워진 바벨탑을 무너뜨린 바로 그 순간 진리는 부활하고 말 것입니다. 공포와 불안의 노예였던 우리의 심장, 그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말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모험은 어쩌면 또 다른 불안과 공포를 잉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속도의 괴물에 의해 잠식당해 버린 오늘의 현실이란 급류에 휘말려 버려 길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바벨탑의 그늘 아래, 그 명료하고 확고부동한 도그마를 부여잡고 존재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 차라리 그게 더 평안할지 모른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신념, 그 도그마는 반드시 우리 손으로 직접 무너뜨려야만 하는 바벨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바벨탑을 무너뜨리지 않고선, 죽음의 공포가 잉태해 낸 종교의 신념을 해체하지 않고선 단언건대 부활의 참기쁨은 체험되지 않을 것입니다. 체험된다 하더라도 그 체험은 표층적이고 감상적인 일회적 이벤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더 격렬하고 짜릿한 체험을 가져다줄 또 다른 힘을 좇는 중증의 마약중독자처럼 말입니다.


(1) 여기서 필자가 밝힌 축자영감설은 기계주의적, 결정주의적 가치관으로 호도된 성서해석학의 한 견해로서의 축자영감설임을 밝히며, 축자영감설의 근본취지 자체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음을 밝힙니다.

주원규 / <열외인종 잔혹사>·<망루> 저자, 동서말씀연구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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