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를 해내듯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었다. 2008년 말에 처음 출간된 이래 여러 매체에서 대단한 호평을 쏟아 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영어로도 번역되어 또다시 영어권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책이어서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가중되었다. 하지만 늘 마음만 있을 뿐, 내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항상 밀려나는 우리 엄마처럼 미국에서 책을 구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나 이런저런 이유로 그 책을 구입하여 읽는 일은 언제나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내일로 밀려났었다.

그러다가 교우 중에 이 책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일 먼저 빌려 달라고 했다. 순식간에 내 뒤로 여러 명의 대기자들이 생겨났다. 내가 빨리 읽고 다시 내 뒤에 기다리는 대기자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라도 이 책은 빨리 끝내야 했다.

하지만 잔뜩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한 이 책은 내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눈물을 왈칵 쏟아 내 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 않았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 보이는 집안일들을 아침 일찍부터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묵묵히 해내던 우리 엄마처럼, 이 책은 엄마의 일상을 하나씩 하나씩 그리고 천천히 묘사했다. 그래서 이 책은 스펙터클에 입맛이 들여지고 좀 더 강한 자극을 원하는 21세기형 우리들에겐 결코 매력적이지 않고 따분하게 느껴질 수 있다. 처음에는 조금 지루한 듯 보이는 일상을 그려 내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하나씩 던져 내다가 결국에는 울음을 짜내게 만드는 영화 '집으로'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중간 중간에 따분함으로 인하여 책 읽기를 중단해야 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책에 감동적이라는 말을 했을까 의구심을 품으면서. 멋진 위엄을 부리며 많은 사람들의 찬사 속에 행진하는 임금님이 실상은 벌거벗었다고 외친 꼬마들이 생각났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책을 집어 들었고 빨리 다음 타자에게 넘겨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라도 빨리 다 읽어 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참기까지 하면서 읽었다. 사실 그런 책 읽기는 처음부터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의 행동과 대화를 마음속에서 그대로 재현해 내는 실재화가 동반되지 않는 소설 읽기란 늘 실패하기 마련이니까. 아마도 이 책이 감동적이라 했던 수많은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엄마를 매개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엄마를 투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 투영이 어려웠던 것은 책에서 그려 내는 엄마가 처한 상황과 우리 엄마의 상황은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책 속의 엄마에게는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고 그에겐 한스러운 일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엄마의 영상은 계속해서 내 마음속에 떠올랐다. 책 속의 엄마가 가졌던 마음은 바로 우리 엄마의 마음과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엄마를 잃어버린 책 속의 가족들처럼 나의 삶에서도 엄마의 실종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인생 속에서 잊힌 엄마가 결국은 잃어버려진 엄마가 되기 전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생겼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가 엄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떠오르지 않았다. 내 자식을 위한 것이라면 고민이 없이 자동으로 나오는데 엄마를 위해 할 것은 여전히 의지적으로 결단해야 할 숙제인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면서 엄마에 대한 우선순위가 밀려남을 어찌할 것인가?

책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엄마의 실종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사실 그들은 엄마를 잃어버린 순간 엄마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겐 엄마의 실종 상태가 현재 진행형인 것은, 여전히 엄마가 살아 계시다는 사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잃어버린 후에야, 그 진가를 발견하는 못된 습성이 있다. 엄마는 잊히든 잃어지든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엄마는 그것을 상관하지 않는 것 같다. 책에서 그려 주는 것처럼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고 엄마에게도 힘들고 어려울 때면 찾아가 위로를 받을 마음의 의지처가 필요한 것이겠지만 자식 앞에서 엄마는 항상 쉘 실버스타인이 그린 것 같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다. 그저 내가 잘되고 행복할 수 있다면 엄마는 그게 행복인 것 같다. 엄마는 100%를 다해 주고서도 그것이 부족하다 생각하여 여전히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진다. 엄마를 생각해서 그런지 100%를 하고선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언제나 마음에 차지 않는다.

어제 인디애나에 있는 큰 딸아이에게서 아침부터 전화가 왔다. 가려움증이 생겼는데 밤새도록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전화를 받고 마음이 쓰여서 안절부절못한 것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나님께 이 아이를 위해 기도해도 여전히 마음이 불안하다. 나중에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고 좀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좀 나아졌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엄마는 결코 자식을 잊지 않는다. 엄마는 자신이 행복이 아니라 자식이 행복이다. 그런데 그런 엄마보다도 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할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십자가는 그 사랑의 확증이다(롬 5:8). 그렇다면 지금 내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난다고 해서 절망할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잊었거나 잠시 외면한다는 증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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