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국의 비판적인 신문 가운데 하나인 <경향신문>에 한국의 몇몇 대형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구멍 뚫린 헌금 봉투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일부 대형 교회, 헌금 봉투에 구멍 왜 뚫었을까'라는 제목의 기사의 요지는 그 뚫린 구멍으로 봉투 속에 1,000원짜리가 들어 있는지 5,000원짜리가 들어 있는지 1만 원짜리가 들어 있는지 쉽게 알 수 있게 되어 있어서, 결국 교회가 헌금을 더 많이 거둬들이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고안해 낸 착상이 아닌가 비판하는 기사였다. 이 기사에는 구멍 뚫린 헌금 봉투에 불만을 품은 몇몇 사람들이 그 교회를 결국 떠나게 되었다는 사람들의 반응까지 실었다.

내가 오랫동안 알고 있는 어떤 분은 이 기사를 보고 욕을 바가지로 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그분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지옥 가기 전에 똥물에 튀겨 반쯤 죽여 놓을 목사 새끼들"이라고 했다. 비록 나중에는 자신의 표현이 너무 과했다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지만, 기본적으로 교회가 헌금을 더 많이 거둬들이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이 중세의 가톨릭에서 면죄부를 파는 것 이상으로 뺨을 치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헌금 봉투에 구멍을 뚫는 것은 미국에서는 아주 보편화된 현상이다. 구멍을 뚫는 이유는 헌금 봉투에 아직 현금이나 체크(check, 수표 : 미국에서는 현금보다 수표를 더 주로 사용한다)가 들어 있는데도 실수로 계수하지 않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종이 봉투를 하늘로 들어 올려 빛에 비추어 보면 돈이 있는지 없는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구멍이 뚫린 헌금 봉투는 일일이 그런 작업이 없이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실례로 나는 헌금 계수가 다 끝난 헌금 봉투들 중에서 아직 돈이 들어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하고 다시 헌금함에 넣은 일이 여러 번 있었는데 우리 교회보다 수십 배 혹은 수백 배 규모의 교회에서는 그런 일들이 적지 않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미국의 헌금 봉투에는 구멍이 두 개씩 뚫려 있다. 하지만 기사에서 보는 한국의 헌금 봉투에는 하나의 구멍만이 뚫려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헌금하는 반면, 한국 사람들은 체면을 중요시하는 문화이기 때문에 이것이 더욱 문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의 마음속은 알 수 없다"는 말처럼 헌금 봉투에 구멍을 뚫는 것을 한국에 도입한 교회에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기사에서 비판하는 것처럼 그저 헌금이나 많이 거둘 목적으로 구멍을 뚫었는지 아니면 성도들이 드린 헌금이 새지 않게 하기 위한 발상이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마음을 아실 것이다.

내가 아는 지인의 글을 읽고 난 뒤, 한국의 어떤 대형 교회의 재정부에서 봉사한다고 자신을 밝힌 성도가 글을 올렸다. "봉투에 구멍을 뚫은 이유는 저희가 계수하다가 헌금을 봉투에서 잘 꺼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저희들이 건의해서 구멍을 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댓글이 달렸음에도 계속적인 비난이나 충고가 끊이지 않았다.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말로. 하지만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자 앞에서는 모든 행위가 갓끈을 고쳐 매는 행위처럼 비난받을 수 있다. 지금 이 세대가 그런 세대이다.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을 의혹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대이고 무슨 일을 하든 이런저런 이유로 욕을 먹게 되어 있다. 이렇게 해도 욕을 먹고 저렇게 해도 욕을 먹는다.

얼마 전 필라델피아 필리스야구단은 시키고 컵스와의 경기에서 7대 1로 이기고 있었다. 그러자 감독은 중간에 구단의 에이스인 로이 할러데이를 빼고 중간 계투를 투입했다. 그러다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시카고 컵스는 맹타를 두드리며 7-5로 따라왔다. 마치 경기를 뒤집을 기세였다. 결국 그 위기 상황을 간신히 넘기고 승리한 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은 감독에게 질문을 던졌다. "로이 할러데이를 너무 일찍 경기에서 빼낸 것은 아닙니까?" 그러자 챨리 메뉴얼 감독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여러분들은 내가 투수들을 너무 혹사시킨다고 그동안 수차례 지적해 오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여러분의 기억이 내 기억만큼 좋았으면 좋겠군요. 우리는 7-1로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투수를 쉬게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선발투수를 늦게 빼 주면 혹사시킨다 하고 선발투수를 일찍 빼면 너무 성급했다 하는 것이 사람들의 반응이다. 어떻게 하든 비판적인 시각 앞에서는 그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그 비판의 마음을 충분히 안다. 그렇게 비판을 하게 만든 충분한 이유가 교회에 있었다는 사실도 충분히 인정하고 공감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교회에 대한 비판들을 볼 때마다 다시 한번 스스로 자책하고 정말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것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개혁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secundum verbum Dei)"는 원칙이 종교 개혁자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처럼 혹시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떠난 것이 있는지 살펴보고 고쳐 나가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신선도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가만 놔두면 저절로 썩어져 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날마다 기경하고 가꾸고 청소하고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들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왜곡돼 보인다. 그렇다면 문제는 바라보는 자에게 있는 셈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가정들이 왜곡된 시선 때문에 망가지는 모습을 본다. 이해하고 수용하며 바라보기보다는 비난을 쌓아 가면서 가정은 무너진다. 실은 가정을 바르게 세우고 싶은 마음에서 잘못되어 보이는 것들을 비난하지만 실제 결과는 의도와는 반대로 일어난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허물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맡겨진 사명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야 가정이 세워진다.

참고로 "지옥 가기 전에 똥물에 튀겨 반쯤 죽여 놓을 목사 새끼들"이란 욕에 대하여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고 100% 그 말은 '적어도 내게 대하여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욕이 아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아니, 나는 그보다 더한 놈이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당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수치와 모욕을 대신 당했다고 하니 그것이 내가 견딜 수 없는 100% '은혜'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아직 헌금 봉투에 구멍을 뚫지 못했다. 뚫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기술적인 문제와 비용의 문제 등의 이유로 뚫지 못했다. 하지만 기회가 되면 뚫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보이는 헌금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가 병행될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껏 그러하듯 예배 시작 전에 입구에서 헌금함에 넣는다든지 아니면 손가락으로 구멍을 가리고 헌금 봉투에 넣으라는 안내를 하든지 등등.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