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함을 열자 엘 목사님의 메일이 수신되어 있었다.

'민우형제의 중도하차로 일은 더 이상 추진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에 기회를 보아 다시 만났으면 합니다.'

문예지 창간이 공식적으로 중단되는 순간이었다.

'후회는 필요없다.그만두자.'

동시에 메시지 창 건너로 심하게 일그러졌을 강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메신저창을 닫아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찰나 빠아앙, 하며 화물열차가 사무실 앞을 지나갔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말일런지도 몰랐다. 목까지 차오르고 차올랐던 그 한마디가 드디어 역류하고 만 것이다.

'그래, 차라리 잘되었다고 하자.'

민우에게는 일을 추진함에 있어 한가지 원칙이 있었다. 절대 사람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는 것. 어떤 일이든 사람을 위한 것이고, 결국은 사람으로 그 일을 이루는 것이기에, 사람과의 갈등은 결국 그 일의 가치를 희석시키는 일과도 같았다.

문예지를 만들어보자고 한 것은 민우의 아이디어였다. 문인들이 펴내는 기독교 문예지는 많았지만, 정작 문학적 향기를 대중 속으로 흩날리고 있는 잡지는 없었고, 문예지에서 논의되고 있는 기독교문학론도 정체된 채 답보상태를 면치 못했다. 기독교 문학론은 기독문인들 사이에서만 회자되는 자기만의 잔치였고, 크리스천들에게서조차도 외면을 받는 처지였다.

문학적 상상력은 우리의 신앙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을거라고 믿는 민우로서는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기독문예지는 일상에 떠밀려 정작 한줄의 소설도 쓰지 못하고 있는 민우 자신에게 스스로 자극을 주고자 하는 일이기도 했다. 선뜻 창간의사를 띄웠을 때, 기대이상으로 강희도 제안을 반겼었다. 뜻을 정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일은 시작부터 삐그덕거렸다. 발행인으로 위촉한 목사님께서 첫모임 이후 번번히 펑크를 내셨고, 강희는 민우가 추천한 발행인 목사님을 못미더워 했다. 민우의 역할이 서툴렀던 탓이기도 했다.

명동의 민들레영토에서 모임을 하자고 약속을 해놓구선 정작 난 신촌의 민들레영토라고 착각을 해버린 것이다. 상경을 한지 얼마안되어 명동과 신촌과의 지리감각이 헛갈렸리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최근에 부쩍 심해진 건망증때문이기도 했다.

이래저래 목사님이 명동으로 못오시게 되자 강희는 단단히 화가 나버린 것이다.

'더 큰 것을 보면서 작은 것은 신뢰하며 이겨보자.'

내가 보낸 문자메시지였다.

'기본적인 신뢰를 못준 것은 목사님아냐?'

강희의 메시지.

이런 일도 있었다. 새로운 문예지 편집동인 자원자 문제로 전체모임을 주선했다. 응당 우선적인 의논대상은 발행인 목사님이었다. 문제는 제이였다. 약속날짜인 화요일은 정작 학원수강 때문에 절대 시간이 안된다는 거였다. 모임약속을 확정한 뒤 바로 제이에게 전화연락을 시도했다. 전화는 신호만 보낼뿐 받지 않았다. 다음에 전화하지 뭐.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것이 그만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나를 회원으로 존중한다면 그러지는 않았을거야.'

민우는 자신의 실수를 절감했기에, 미안하노라고 거듭 사과했지만 이미 강희에게 그런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집요하게 민우의 실수를 추궁하는 강희의 목소리는 편집장 자격론으로 들렸다. 사과를 해도 듣지 않는데, 정말 당순한 건망증 때문인데, 이토록 완강하게 반발한다면 도대체 어떡하란 말인가

민우에게, 강희는 허물없이 지내고 싶었던 아이였다. 무엇보다도 매사에 적극적이고, 문화사역 특히 소설에 대한 열정이 그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민우는, 강희의 소설을 딱 한번 본적이 있었다. 관념적인 이야기였다. 대개의 소설은 이야기에 관념구조가 강하게 드러나면, 서사는 제대로 흘러가지 못하기 마련이다.

늘 제자리를 맴돌거나,서사가 제 궤도를 잃고 흐리멍텅해지는 경우가 많다. 강희의 소설이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며 추켜 세웠던 것은 습작하는 이들에겐 그것이 최고의 힘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피를 무릎쓰고 보여준 텍스트를 무안하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강희는 자기만족이랄까. 자기도취랄까, 그런 것이 꽤 강한 아이였다. 부드러운 듯 하지만, 자아는 만리장성처럼 높고 견고했다. 물론 그런것이야 자존감이 분명하다고 치부할 수 있었다.

문제는 화해를 선언하는 그 방식이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여기는 건지, 갈등이 있을때마다 사랑한다, 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그 말은 물론 위로가 되어주었다. 한때 심하게 무너져내린 자존감을 세우는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거기뿐이라는 거였다. 민우가 문예지 중도하차를 결정내린 것은, 감정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사실 건강이 우려되어서이기도 했다. 영세한 출판사의 편집장을 맡게되면서, 일인다역의 업무량을 해치워야 하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감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두세배는 일이 커지고 있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문예지창간이 역부족으로 느껴지던 찰나였다. 그러다가 오늘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던 강희는, 문예지 창간작업의 도충하차 선언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던 것일까. 민우의 강한 어조에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잠시 건조한 몇마디의 메시지가 오고 갔던가.

메시지창에 돌연 사랑해, 라고 떴다. 메신저이기 때문에 쉽게 그런 말이 나올수 있는 것일까. 그순간 내게 그 사랑이란 단어는 가식적으로 들렸다고 해야 솔직한 표현이리라. 사랑이라는 것은, 용납하고 이해하고 인내하는 것 아닌가. 허물을 마음껏 공격하고 난 뒤 상처를 안고 쓰러진 웅크린 이에게는, 너무도 가볍고 공허하게 들릴 뿐인 그 말, 사랑해. 깃털처럼 가벼운 감성언어라니.

'나 때문이라면 내가 그만둘께.'

강희가 서둘러 메시지를 보냈으나 민우는 반응하지 않았다. 민우가 아니더라도 잡지는 만들 수 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최저생계비를 받으며 사역을 하는 민우 앞에서, 난 급여가  적은 일은 싫어, 하며 울상을 짓던 아이. 그 적은 급여가 민우의 갑절을 훨씬 넘는 것임을 알면서도, 자신은 민우의 경우와 분명히 다르다고 강변하는 아이.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민우로선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경제적 혹은 물질적 헌신없이 너무나 당차게 자신의 것을 요구하며 '헌신'하려는 아이. 주변에 널린 문학적 향기가, 자신의 실력이라 확신하는 아이. 성경적 이해의 체계가 없는데, 거창하게 기독교적 세계관을 운운하는 아이. 자신이 좋게 느끼면 좋은거라고 생각하는 아이.

노트북을 열자,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안부를 묻는 메신저창이 뜬다. 어색한 분위기를 감안해서인지 유쾌하게 안부를 묻는다. 의례적인 단답형 반응을 보이고는 윈도우를 닫는다. 일보다 관계가 중요하다고 믿는 민우의 신념에 변화가 생긴건 아니다. 다만, 지금, 강희와는 거리가 필요하다는 생각할 뿐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틈새가 필요하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관계이든, 사랑하는 연인사이든, 평생을 함께 지낸 죽마고우이든 같다. 자신의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한 영역을 무시한 거리 없애기는 서로의 자아에 상처를 주고받을 뿐이다. 그것이 민우가 체득한 하나의 철학이라면 철학이었다.

아직 사랑하는 사람이 없지만, 누군가를, 감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행복을 누리더라도, 민우는 상대방과 늘 '사이'를 두고 싶다. 이것은 소원함이나 서먹함의 거리가 아니다. 서로 아름다워보이고 서로 존중할 수 있고, 서로 아껴줄수 있는 마음의 거리이다. 다시말해 상대방의 영역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적어도 결혼전까지는. 결혼후에는 그 사이가 좀더 좁혀지긴 하겠지만, 궁긍적으로 그 사이가 사라질수는 없을 것이다. 필립얀시는 이것을 바운더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했고 어느 소설가는 이것을 두고, 모든 사람은 섬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강희와 민우 사이에는 거리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상대를 너무 가볍게 무시하고 상처주고 친근감이라고 여기는, 이것은 정말이지 절대 아름다운 관계가 될수 없다.

민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희와의 울타리가 없어진 것은, 어쩌면 민우의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지켜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장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고, 자존감의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었고, 비전과 소명에 대한 회의가 일었고, 삶에 감사함이 실종해버렸던 시절, 민우는 많이도 힘들어했고, 푸념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혹 강희는 민우의 그런 약한 모습까지도 속속들이 다 알고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처음 만났을때의 그 조심스러움과 관용의 마음이 사라져버린건 아닐까.

잡지를 만드냐 못만드느냐,는 것은 더이상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일은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필요하시다 여기시면 길가의 버린 돌이라도 일어나 일하게 하실 것이다. 문제는 일을 하면서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나라, 즉 하나님의 공동체가 없는 어떤 일도, 의미는 없다. 민우는 그렇게 믿고 있다.

시간이 조금 흐른뒤, 서로에게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기억들이 그리워질때, 민우는 다시 메신저의 윈도우를 열고 타이핑을 할 참이다. 오랜만이지? 잘 지냈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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