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한겨레 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동서말씀연구회의 주원규 목사(37)의 연재 칼럼입니다. 천민자본주의와 유교적 가부장제의 괴이한 결합으로 인해 뿌리부터 그 기능이 마비된 한국교회의 현 상황을 볼 때, 2,000년 전 예수가 선포한 교회의 참모습, 그 원형을 살펴봐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구호로서의 새로움이 아닌 영적 혁명으로서의 새로움을 지향하는 교회의 방향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카타콤의 의미 본질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과거의 삶을 살았던 기독교 역사에 대해 나름의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선조들이 피 흘려 싸웠던 순교의 열정과 온갖 모진 박해를 견뎌 내고 오늘의 기독교를 일구어 낸 치적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기념하면서 기독교의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려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과거 초대교회 시절 기독교 선배들의 놀라운 순교 열정을 기념하면서 찬란한 장밋빛 미래를 계획하지만, 그 미래가 갈수록 모순의 구렁 속으로 빠져드는 현상에 대해서는 한사코 침묵하고 있습니다. 시대 상황이 다름을 적당한 핑곗거리로 내세우면서 말입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카타콤 전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카타콤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예배하기 위해 지하 깊은 곳에 예배 처소, 기도소를 만든 행위와 흔적을 의미합니다. 익숙해지지 않고선 한 번 내려가면 자신이 있는 위치조차 찾기 어려운, 빛 한 점 보기 어렵고 숨 한 번 제대로 쉬기 곤란한 지하 탄광의 막장과도 같은 곳이 바로 카타콤의 실제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카타콤이 갖고 있는 선택은 어쩌면 다분히 외부적 압력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팍스 로마Fax Roma'라는 허울뿐인 평화의 뒤란에 자리 잡은 포악한 세력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선택한 카타콤은 그러므로 실제적인 종교 탄압으로 인한 필연적인 선택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카타콤이 조성된 외부적 원인 이전에 카타콤이라는 장소 자체가 갖는 본질 의미를 묵상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카타콤의 본질은 신성한 메시아의 가르침을 상고하고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굳이 기도와 예배를 하기 위해 지하 토굴을 선택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와 예배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했다면 더 이상 카타콤의 존재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과거 카타콤의 의미를 기념하는 것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카타콤은 실제로 나타난 물리적 박해, 종교 탄압을 피하기 위한 상황적 선택이라는 압도적인 편견 말입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는 생각을 편견이라고 표현한 것은 카타콤을 기념하는 의미 심층 깊게 자리 잡고 있는 박해에 대한 차안과 피안의 측면 모두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박해받는다'고 말할 때 눈에 보이는 실제의 박해만을 인정하는 경향이 다분합니다. 박해당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들의 신념인 종교가 외부 세력에 의해 물리적으로 짓밟히는 것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한반도에서 기독교 태동 역사의 경우만 봐도 그렇습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문제가 있을 수 있으며, 공산주의 세력으로 인해 종교의 가치가 몰수되면서 교회가 불태워지고 수많은 기독교인이 순교당하는 참담한 사건들이 박해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박해의 역사는 분명히 오늘의 우리가 기념해야 할 요소임은 분명합니다. 신앙의 선진들의 고결한 희생으로 인해 지금의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음을 기념하는 것, 오늘의 교회가 이러한 신앙 전통을 소중히 간직하여 내일의 후손에게 바른 기독교 전통을 계승해야겠다는 미덕과 다짐으로 귀결되는 일련의 패턴에는 하지만 불행하게도 내적 박해의 현재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남아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잃어버린 박해의 흔적

흔히들 영적 박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박해가 다르게 말하면 실제로 가해지는 물리적 박해, 종교 탄압의 이면을 차지하는 심층적 박해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적 박해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가 이러한 영적 박해, 내적 탄압을 보거나 다루는 경향은 다분히 독특하면서도 동시에 위험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인식하는 영적 박해의 중심엔 현대 문명과 이데올로기, 각종 유행이 선도하는 무신론적 분위기의 팽배와 동시에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상상력의 창궐에 대한 우려와 두려움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가치관의 눈으로 볼 때 현대 문명의 첨예한 발달이 무분별한 윤리 의식과 성적·도덕적 타락을 가져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현대 물질문명에서 비롯된 가치관이 기존의 전통성을 파괴하고 다원적 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신성의 장엄함을 크게 훼손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박해의 중심에 서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말씀과 기도의 요체로서의 교회의 존재 의미를 더한층 강하게 부각합니다.

여기까지는 일리 있는 분석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해결책과 방향에 있습니다. 소위 현대 문명의 타락한 경향을 개탄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교회는 교회 그 자체의 존재규모 확산과 장엄함을 내세웁니다. 그와 함께 따라붙는 가치, 행동에 대한 촉구는 종말에 대한 만반의 준비에 몰두합니다.

교회는 어쩌면 타락의 징후를 말세로 규정하고 말세라는 유한적인 도래 가능성에 모든 직, 간접적인 임팩트를 가하여 금방이라도 세상의 종말이 찾아올 것만 같은 불안 심리를 조장합니다. 그와 동시에 부각되는 것은 구약시대의 유명한 비유인 노아의 방주입니다. 방주를 교회 공간, 교회의 존재 의미와 동일시하면서 이러므로 타락한 세계에서 교회는 구원의 최후 보루로 존재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여기까지도 봐 줄 만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강조되는 교회의 존재 의미가 세력화의 의미와 함께 인식됨과 동시에 물리적, 가시적인 세계에서 이루어 내는 교회의 철저한 승리를 강조하기 위한 성장의 이데올로기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성장의 이데올로기, 카타콤을 거부하는 교회

이러한 성장의 이데올로기는 흔히 생각하는 단순한 양적 팽창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교회는 나름대로 개혁을 주장하면서 양적 성장에 대한 경고를 의미 있게 설파하고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오늘의 교회가 기념하는 카타콤의 메시지는 단지 외부 세력의 압박에 대한 도피의 의미만을 간직한 한 시대에 국한된 역사의 흔적으로서만 인식하게 합니다. 여전히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에서의 승리와 교회 안에서의 승리를 강조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일종의 슬로건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와 교회가 마치 도덕, 윤리, 성실성 회복을 주장하는 새마을운동 따위의 전진기지 역할을 자임할 것을 공공연한 사명처럼 강조하기를 전혀 망설이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강조한다는 명분 아래 교회의 존재 의미를 불안과 공포의 토대 위에 옹립시켜 자신들만의 아성을 쌓아 올리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경향 또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견해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런 일련의 흐름은 성장 이데올로기, 차안(此岸)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그에 대한 평행적 대응 논리에 기인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차안의 이데올로기는 지독할 정도로 철저한 인과율의 원리에 빚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썩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바로잡고 세상을 교화시키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노력해야 한다.' 이런 식의 논리. 다시 말해 현대 문명과 흐름, 철학, 가치, 사상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기독교 역시 이러한 흐름에 맞선 또 다른 흐름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이른바 대응적 행동의 중심에서부터 성장, 혹은 승리주의에 도취한 가치관은 설득력을 얻고 기승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와 함께 이 대응적 행동을 전개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을 모조리 영적 박해, 종교 탄압이라고 외치며 울부짖으면서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 영광을 위해 고난당하는 순교자인 것마냥 생각하며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는 이른바 순교자 콤플렉스에 사로잡히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교회는 야만적으로 응집된 유, 무형의 폭력 집단으로 강화되기 시작합니다.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조차 철저히 무시되고 세상의 상식은 종교의 영광 아래 짓뭉개지고 몇몇 지도자의 아집과 독선만이 이 혼탁한 세상을 맞선 유일한 도그마인 것처럼 신봉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훤히 눈에 드러난 이단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오늘의 기독교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흐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거 로마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카타콤으로 내려갔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연 오늘날과 같은 폭력적 응집력이 발휘될 수 있었을까요? 그와는 아예 거리가 멀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카타콤을 선택한 이유는 너무나 단순한 것입니다. 기도와 예배할 장소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필사적 선택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건 엄밀히 말해 성(性)과 도덕적 타락의 내리막길을 치닫는 부패한 로마 체제에 대항하기 위한 민족주의적 선택도 아니었으며, 사회 전체를 교화시키기 위한 거대한 야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카타콤은 오늘의 교회의 눈으로 볼 때, 한심하기 짝이 없는 수치의 역사로밖에 인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명백한 증거가 오늘의 기독교 앞에 보란 듯 제시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의 교회는 결코 카타콤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말은 그럴싸하게 하지만, 감격의 눈물은 흘리며 카타콤의 전통을 기념하지만 오늘의 교회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생각은 카타콤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만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뿐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불행하지만 필자인 저는 그것이 오늘의 교회가 가진 인식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카타콤에 대한 인식 말입니다.

카타콤이 기도와 예배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한 최소한의 선택이었다는 점은 과거나 오늘의 상황 모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눈에 드러난 종교 탄압을 행사하는 로마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과 문화적 흐름의 홍수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의 기독교는 이 세속 흐름의 홍수 속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것에 대한 저항의 한 방편으로 보이는 공간으로서의 교회를 사수하는 것과 기독교적 문화, 기독교적 정치 사상의 양적, 질적 팽배를 위해 고군분투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 참된 내면의 박해를 철저히, 또는 의도적으로 간과하고 있습니다. 내면의 박해는 조심스럽고도 은밀하게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습니다. 어느새 우리의 내면엔 성공과 승리의 이데올로기라는 박해가 더는 박해가 아닌 주술의 부적처럼 아로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욕망의 세례를 거부하는 교회, 카타콤으로 내려가는 교회

세속의 문명을 교회의 가치관과 신념 앞에 무릎 꿇린 다음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강제적인 세례를 베풀고자 하는 욕망이 어느새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독교 문화와 기독교 가치관의 절대 우월성을 과시하며 세속의 문명과 타락한 문화를 더는 구제할 수 없는 타락된 소돔의 매음굴 정도로 단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가 했던 기도와 예수가 품었던 예배의 이상향은 과거 원주민들에게 죽음과 세례, 둘 중 하나를 강조하던 가톨릭 사제들과 종교 신봉자들의 칼과 창이 아닌, 더는 내려갈 수 없는 카타콤과 같은 지하의 심연, 타락의 심연으로 내려앉아 그 타락의 중심에서 신음하는 병자, 창녀, 소경, 세리, 앉은뱅이, 인생 낙오자들과의 연대가 아니었습니까. 그 세속의 진창에서 그들의 신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셨던 분이 예수가 아니었습니까. 예수는 그들을 강제로 꿇어앉히고 '한심한 인간아. 왜 사느냐' 하며 그들의 무지와 타락을 개탄하면서 억지스러운 교화의 정서 속에서 세례를 베푸시지 않으셨습니다.

회개와 변화는 더 내려갈 곳도 없는 카타콤의 밑바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으로 볼 때 더 바닥일 것도 없는 쓰레기 같은 신성모독만의 메카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예수는 그곳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하셨습니다. 여인과 말을 섞었으며, 생명의 호흡을 같이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예수는 결국 사마리아 여인의 심장 안으로 직접 말씀이 되어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그 말씀, 그 기도를 듣고, 느끼고, 강렬히 체험하기 위해 카타콤은 마련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할 내적 박해를 피하는 우리 안의 카타콤입니다. 이 내적 박해의 유혹을 피하는 것, 성공과 승리주의의 이데올로기의 모든 토대로부터 결별하는 영적 결단이 시작되는 순간 비로소 우리 눈에 카타콤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더는 내려갈 곳도 없는 바닥에서 참되고 진실한 부르짖음이 나타나는 곳, 참됨으로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는 우리 영혼의 카타콤을 찾지 않고서 과연 이처럼 뻔뻔스럽게 계속되는 성공과 승리주의의 궤변 속에서, 이 엄청난 내적 박해를 어떻게, 무슨 수로 외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카타콤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내 마음 안에 카타콤은 존재하는지 말입니다.

성공과 승리주의로 윤색된 복음에는 결코 카타콤이 보이지 않습니다. 훼손된 복음 속에선 오직 위로 치솟는 바벨탑만 보일 뿐입니다. 더는 올라갈 곳도 없이 끝없이 상승하기만을 원하는 욕망, 오늘의 교회는 어쩌면 이 욕망을 영적 성숙이라고 표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욕망의 추구를 교회와 기독교 교리의 승리라고 자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결국 기독교 역사상 최악의 비극을 초래할 것입니다. 어느 순간, 우리가 이 훼손된 복음을 등에 업고 승리라는 것을 맛보았을 때, 어느새 우리 손엔 로마제국의 칼이 쥐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새 우리는 가장 악랄한 박해자가 되어 카타콤으로 내려간 우리 마음의 또 다른 부르짖음을 철저히 박멸하는 데 앞장설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배와 기도를 하기 위한 우리의 신음을 우리 자신이 짓밟고 그 위에 우상과 욕망으로서의 십자가, 예수, 가시 면류관, 에 바다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자문해 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아직 붕괴되지 않은, 박멸되지 않은 카타콤이 남아 있습니까? 만약 남아 있다면 지금이라도 내려가야 합니다. 내려앉아야만 합니다. 그곳에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곳에서 찬양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더 이상 희망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도 격렬한 내면의 신음에 고통 받고 있는 내 이웃, 강도 만난 자를 살려 낼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상의 바벨탑을 그대로 버려두고서라도 말입니다.

주원규 / <열외인종 잔혹사>·<망루> 저자, 동서말씀연구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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