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쳐도 고쳐도 계속 고장 나는 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미국에 처음 와서 샀던 차가 그런 차였다. 3년 정도 된 중고차였는데 그 차는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켰다. 마치 그 차는 내게 자동차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친절하게 알려주려는 심산이었나 보다. 고장 난 부품들을 고쳐 가면서 기계에 둔감한 나는 자동차 구조에 대해서 꽤 많이 배우게 되었다.

결국 그 차는 보스턴의 추운 겨울에 교통사고로 폐차시키기까지 가난한 유학생의 돈을 꽤 많이 축냈다. 그때 다짐했던 것 하나는 다시는 D사의 차는 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미제 자동차는 다시는 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다 보니 그러한 다짐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다시 미제 중고차를 2년 전에 사게 되었다. 하얀색의 그 SUV는 그 이전에 소유했던 일제 차보다는 약간의 엔진 소리가 크긴 했지만, 값도 싸고 아주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일제 중고차를 찾아봤으나 한정된 예산에서는 구할 수 없어서 미제 차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적어도 차를 살 때에는 아주 그럴듯한 선택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차는 이내 문제가 생겼다. 10만 마일 이상 된 일제 중고차를 구매하여 그 이후로 4년 동안 타면서 한 번도 문제가 없었는데, 이 차는 산 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이곳저곳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을 고치기 위하여 시간도 많이 들었고 돈도 많이 들어갔다. 하지만 고쳐도 고쳐도 계속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며칠 전에 엔진오일을 교환하기 위해 정비소를 방문했더니 1,000불이 넘는 돈을 또 들여서 반드시 고쳐야만 하는 곳을 알려주었다. 결국 차를 교체하기로 결정적으로 결심하게 만든 셈이다. 딜러에게 가져갔더니 터무니없는 트레이드인 가격을 제시하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차는 가지고 있을수록 더 손해를 보게 되는 구제 불능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로 차를 구매하고 나오는데 지난 2년 동안 그 차 때문에 속이 썩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다시 생생하게 결심했다. 다시는 미제 차를 사지 않겠다고. 예쁜 것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딸아이들에게 인생을 가르칠 생각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 '절대로 미제 차를 사지 마라'라고.

미제 차보다도 더 구제 불능인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도 계속해서 악을 행하고 죄악을 행하는 우리. 우리 인간보다도 더 절망적이고 이렇게 구제 불능인 존재가 어디 또 있을까? 구약성경 가운데 사사기서는 우리들의 구제 불능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지만 살 만하면 다시 우상을 숭배하고 죄악을 저지르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 그 모습이야말로 구제 불능이다. 구약성경 가운데 호세아서도 그런 구제 불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남편의 사랑을 배반하고 창기가 되어 버린다. 호세아는 그 아내를 위해 돈을 치르고 빼내 오지만, 다시 또 그 소굴로 들어가 음탕한 자식을 낳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구제 불능 중에서도 구제 불능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제 불능이라 하여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고쳐도 고쳐도 자꾸만 고장 나는 자동차보다 더 구제 불능인 우리를 고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주셔야 하는 것도 마다치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어떻게 하다가 이토록 구제 불능의 상태까지 오게 되었는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신앙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버린 모습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모습들, 들리는 소식마다 난맥상이다. 하지만 이런 구제 불능의 상태에서도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몇몇 그나마 생각이 있는 목회자나 평신도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옛날 엘리야 시대에 7,000명의 경건한 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또한 그러한 증거들을 주변에서 간혹 목격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런 신실한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은 구제 불능인 우리를 구제 불능의 자동차 처분하듯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심판하셔도 시원치 않을 것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정의할 때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정의한다. 어쩌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셨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도 오래 참아야 한다. 구제 불능이라 하여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더는 참을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구제 불능인 우리에 대하여 참으셨는가를 기억해야 한다. 더는 사랑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구제 불능인 우리를 사랑하셨는가를 상기해야 한다. 이제는 손 내밀 힘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구제 불능인 우리를 위해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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