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한겨레 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동서말씀연구회의 주원규 목사(37)의 연재 칼럼입니다. 천민자본주의와 유교적 가부장제의 괴이한 결합으로 인해 뿌리부터 그 기능이 마비된 한국교회의 현 상황을 볼 때, 2,000년 전 예수가 선포한 교회의 참모습, 그 원형을 살펴봐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구호로서의 새로움이 아닌 영적 혁명으로서의 새로움을 지향하는 교회의 방향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승리에만 굶주린 전능성의 말로

전능의 관념은 비단 기득권을 차지한 종교 지도자들의 행태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신을 향한 비틀린 전능의 관념은 당시 예수를 추종하던 제자들과 무리의 행태를 통해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형벌에 대한 예언을 선포하던 예수의 멱살을 붙잡고 결코 그따위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윽박질렀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사탄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 길, 십자가의 길은 베드로에겐 너무나 어이없는 선택이었음이 확실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형벌이라니. 그들이 믿고 있던 메시아는 전능한 야훼의 현현입니다. 풍운아 예수, 5,000명을 먹이고 마시게 하고 중풍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말끔히 치료해 낸 예수는 전능자의 위엄을 그대로 빼어 닮은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육화임을 그들은 모르지 않았으며, 믿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하나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방의 잡신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유일신 야훼의 육화(肉化)가 전능하지 않다는 그 말, 그리스도의 입으로부터 직접 발설된 이른바 수난 예고였습니다.

제자들과 백성의 관념 속에 사로잡힌 전능성은 오랜 인과율의 태동으로부터 비롯된 이 땅의 정의 실현이었습니다.

정의 실현으로서 전능성은 기본적으로 승리를 전제로 해야만 합니다. 죽음으로부터 승리, 고통으로부터 승리, 부조리로부터의 승리, 억압과 탄압, 부패와 썩음으로부터의 승리 말입니다. 그 승리의 근거에는 언제나 전능성이 자리했습니다. 전능하신 야훼 하나님이 종교 지도자들의 가증스러운 기득권을 해체시킬 것이며, 로마의 혹독한 압박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해방을 선포할 것입니다. 변방의 백성들은 그것을 희망했습니다. 욕망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전능의 그늘 아래서 자신들이 누리게 될 참되고 복된 권력의 향유를 기대하고 마음껏 꿈꿔 왔던 것입니다. 그러한 권력에의 의지는 두 제자 어머니의 솔직한 고백에서 절정에 다다랐습니다. 주의 나라에 자신의 아들 둘 모두 한 명은 우편, 다른 한 명은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간청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야훼의 전능성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에서 비롯된 야만의 관념입니다. 그것은 결국 전능을 통해 현실의 세상이든 타계가 되었든, 어찌되었든 도래할 것으로 기대하는 왕국에서 한자리 제대로 차지하며 영생 복락을 누리기 위한 도구로서 신의 전능성을 인식했던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이 결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는 십자가의 치욕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끝끝내 십자가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때 예수를 바라보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자신들의 관념 속에 자리 잡은 전능의 면류관을 스스로 내던져 버린 예수를 그들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 중 어느 한 명은 예수를 몇 푼의 돈에 팔아넘겼습니다. 또 한 명의 제자는 자신의 절대적인 우상이며, 스승을 저주하며 부정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사라져 갔습니다. 적어도 예수가 십자가를 추구했던 그 순간만큼은 그랬습니다.

끝내 야훼의 현현, 예수는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전능성의 반대 극점에 놓여 있는 무력과 형벌의 도상으로 올라갔습니다. 두 팔과 두 다리에 대못이 박혔으며, 가장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 내며 인간적 무력함 속에서 탄식하며 그렇게 죽어 갔습니다.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피와 폭력에 세뇌된 인간 관념 속에 자리 잡은 전능성의 해체를 통한 부활을 예고하는 생명의 표지였습니다. 이 왜곡된 전능성의 해체가 곧 부활입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전능하지 않은 십자가, 참된 전능성의 실현

다시 처음 명제로 돌아가서 예수의 십자가 도상의 모습만 놓고 볼 때,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됩니다. 먼저 해체되어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관념 속에 똬리를 틀고 앉은 전능함의 해체가 그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의 전능성의 본질은 우리의 기대를 배반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전능하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서 전능하지 않은 존재들을 전능함의 차원으로 이끌어 올린 정신의 현현을 본질로써 제시하셨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지 않습니다. 전능할 수 없습니다. 전능자의 창조적 직관 속에선 새로운 전능성의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욕망하고 갈구하는 육신적, 정신적 고통의 해방과 승리, 권력 쟁취로서 활용되게 될 전능성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초월적 지평의 열림으로서의 전능성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 전능함의 극단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언제나 피와 폭력, 그로 인한 승리의 관념에 중독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바로 이 피와 폭력에 세뇌된 인간 관념 속에 자리 잡은 전능성의 해체를 통한 부활을 예고하는 생명의 표지였습니다. 아닙니다. 이 왜곡된 전능성의 해체가 곧 부활입니다. 폭력과 인과율의 원리가 부서지고 엘리트주의의 강화, 종교 행위를 통한 전능성의 회복에의 집착이 무력화되고 타계주의의 망상과 이 땅의 메시아를 향한 정치적 왕국의 추구 역시 무의미의 진창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바로 그 자리에 부활의 참희망이 태동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우리 관념이 잉태해 낸 전능성의 깃발을 붙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의 교회는 두려울 만큼 커다란 혼돈의 세상 속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혼돈으로부터의 성별이란 막중한 과제를 인식해야만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혹시 피와 보응, 보상 심리에 물들어 버린 타계주의로써 십자가를 숭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땅에서든, 저 하늘에서든 지금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 '우리', '우리 교회에 속한 멤버들'을 더 좋은 곳, 더 아늑한 곳으로 인도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전능성의 막강함이 가져다주는 위로와 전능성의 그늘 아래 기생하여 종교적 권력을 신의 이름으로 행사할 수 있는 욕망의 이데올로기, 오르페스(뱀의 희랍어 - 저자 주)의 혀가 꿈틀거리는 타락의 에덴으로 인도해 줄 것을 신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는 이 땅의 메시아가 나타나서 이 땅의 부패와 부조리를 쓸어 내어 정의 사회 구현, 이상적 전체주의 국가를 이루어 내는 전능성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의 십자가는 이 두 가지 관점으로의 집착을 모두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지상 명령이었던 앞으로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의 길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내 정신과 영혼의 등에 지워진 십자가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말입니다.

주원규 / <열외인종 잔혹사>·<망루> 저자, 동서말씀연구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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