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한겨레 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동서말씀연구회의 주원규 목사(37)의 연재 칼럼입니다. 천민자본주의와 유교적 가부장제의 괴이한 결합으로 인해 뿌리부터 그 기능이 마비된 한국교회의 현 상황을 볼 때, 2,000년 전 예수가 선포한 교회의 참모습, 그 원형을 살펴봐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구호로서의 새로움이 아닌 영적 혁명으로서의 새로움을 지향하는 교회의 방향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절대 진리의 탄생

기독교 교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핵심 가치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진리에 대한 부분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생애 전체에 걸쳐 진리의 선포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진리의 내용은 담백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세주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을 길과 진리, 생명이라고 말하기를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신약성서 대부분이 이러한 예수의 정체성을 나타낸 주제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않습니다. 진리 그 자체인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예수라는 사실에 대한 증명, 혹은 변증이 신약성서의 유일해 보이는 기록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초대 기독교 역사를 살펴봤을 때 이 진리는 인정받기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예수의 생애 당시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인 유대교인들은 그들의 구세주를 메시아, 그리스도로서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강림이 시온의 거룩함으로 이루어질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시온성 예루살렘의 임재는 거룩하고 완전한 왕국의 통치 개념으로 발전됩니다.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지상 왕국의 실현으로서의 통치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러한 통치 개념의 테두리 안에서 시온을 이루어 내실 약속의 하나님을 신앙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열망했습니다. 자신들만이 선민으로 택함받게 될 것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만이 신과의 약속을 준수했기 때문입니다. 신이 자신들에게 명령한 모든 제의와 율법을 일점일획도 빠짐없이 지키기 위해 몸부림쳐 왔기 때문입니다.

▲ 당시 종교 세력은 예수를 신성모독을 자행하는 파렴치한 이단자로 인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한 극한의 정죄와 심판의 끝자락에 십자가가 존재합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이러한 정황, 이스라엘의 대세를 장악하는 정서 속에서 진리임을 자처한 예수의 탄생이 그들의 눈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이해되었다고 보입니다. 선민의식의 세부적 깨우침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던 당시 민중들은 일단 예수를 환영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적과 여러 가지 마술에 가까운 신기한 능력을 베푸는 예수의 풍모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변방의 풍운아 예수를 메시아로 추대하며 종려나무 흔드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당시 유대교를 지배하고 보존한다고 믿고 있던 바리새인 공동체, 그들과 전략적 연대를 같이하는 세력화된 종교 세력은 달랐습니다. 예수가 변두리 출신이며, 정통의 방법으로 율법을 배운 바 없는 본대 없는 자손이라는 이유로 그를 배척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의 혁명적 자기 선언 중 하나인 길과 진리, 생명 선포로 인해 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을 자행하는 파렴치한 이단자로 인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단과 이방의 괴수로 정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극한의 정죄와 심판의 끝자락에 십자가가 존재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손에 피 묻히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위선으로 가득한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또한 실제로 신성모독의 파렴치범을 합법적으로 무너뜨릴 아무런 권한도 그들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을 물리적으로 지배하는 세상의 법과 권력에 기생하여 예수를 세상의 심판대로 밀어 넣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으로 상징되는 로마의 음부, 십자가 불구덩이 속으로 예수를 던져 넣었던 것입니다.

고통의 절정에 이뤄진 예수의 십자가 죽음

군중들 역시 예수가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의구심에 눈뜨는 순간, 성급한 절망의 포로가 되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끝끝내 그들의 의구심을 해소해 주지 않았습니다. 천상의 메시아로서 이 땅에 강림한 예수는 가난과 질병, 억압과 슬픔을 해방시켜 줄 '메시아'를 적극적으로 거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인류의 죄를 지고 간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그 어린양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군중들의 사육된 메시아 인식이 낳은 총체적 비극이었습니다.

철저히 사육되고 비틀려진 메시아 인식에 있어서는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제자는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넘기는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비극입니다. 말할 수 없는 실패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바라보던 당시의 차갑거나 우매한 편견의 말로였습니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왜곡된 전통과 선민의식의 파괴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관습과 편견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하나의 혁명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에 있어서 하나의 절대 진리로 자리 잡는 데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진리가 진리로서 인식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진리가 기독교란 종교의 골격을 형성하고 교회의 존재 이유로 성장할 수 있을 때까지 초기 기독교인들이 겪어야 했던 박해와 수난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적지 않은 사도들이 각 지역에서 순교했습니다. 수많은 교인들 또한 순교에 가까운 탄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피가 이 땅에 뿌려진 후에야 비로소 절대 진리가 세상에 단단히 뿌리박고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외면할 수 없는 고통의 절정,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절대 진리의 첨단에 자리 잡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절대 진리는 주류인가?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문제를 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한 가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절대 진리는 주류(mainstream)일까요? 주류라는 개념을 이해할 때 우리는 너무나 단순하게 보편성, 또는 다수의 세력화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류'는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수월하게 통용되는 개념을 의미합니다. 또한 주류는 사회가 갖고 있는 일반적 주제, 소통 가능한 주제로서도 기능합니다. 주류의 개념을 거스르는 것을 두고 소수 가치 혹은 비주류라고 말합니다. 비주류의 감성이 때로는 낭만적 기능을 수행할 때도 있지만, 결국 귀착되는 건 소수로서 최소한의 인정과 용인만이 최우선 효능으로 마무리될 때가 빈번합니다.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의견, 사회의 방향을 규정하는 큰 흐름을 결정할 때면 너무나 당연하게 주류의 가치, 주류의 기준에 의존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것이 안정적 결과를 담보하고 실패 위험을 최소화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류의 관점에서 오늘의 한국교회를 살펴보겠습니다. 교회는 절대 진리의 수호와 보존을 최우선 운동 강령으로 앞세우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 운동의 절대다수를 차지합니다. 절대 진리의 붕괴가 곧바로 교회의 정체성 붕괴와 직결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 위에 교회를 세우고자 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개혁적 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개신교의 종교적 가치는 절대 진리로 대표되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묘한 착오가 절대 진리 수호의 과정에서 뱀처럼 교활한 머리를 들이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존재 이유의 최선봉으로 앞세우는 이 절대 진리는 보편성과 통용 가능함으로 인지되는 이른바 주류의 가치와 동일시되는 경향에 함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치명적인 함정입니다. 감히 말하자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바로 이 함정에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자력으로는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의 심연 속으로 말입니다. 절대 진리는 언제나 '하나', 또는 '유일성'으로 상징되는 배타주의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하더라도 지켜 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가 곧바로 주류의 개념과 동일시되는 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새 이 절대 진리를 주류의 가치로 생각하고 주류의 반열 위에 세우려는 경향이 노골적으로 본격화되는 현상이 오늘의 교회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주류의 개념은 과연 무엇입니까? 범위를 좀 더 좁혀 교회라는 체제 안에서의 주류를 살펴보겠습니다. 종교 체제로서의 교회에 있어서 절대 진리는 우선적으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든다고 인정되는 도그마의 토대 위에서 움직이게 됩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종교의 도그마는 그 종교가 갖고 있는 본질을 보다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프레임이거나 도구일 뿐입니다.

보다 급진적으로 말해 도그마는 종교의 필요조건은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를 보다 세련되게 하고 종교의 기준을 성립하는 데 썩 효율적인 프레임으로서의 충분조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 현실은 도그마에 대해 전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종교의 도그마가 절대 진리에 우선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흐름은 심지어 도그마가 절대 진리로 탈바꿈되는 현상으로까지 진전됩니다. 이 도그마가 권력 지향적인 주류를 동경하는 방향으로 서슴없이 비약하는 것입니다.

천민자본주의의 포로를 자처한 교회

한국 사회의 주류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권력 집중화를 욕망하고 추진합니다. 소수와 비주류는 단지 주류가 보유한 압도적 힘을 한층 그럴싸하게 포장해 주는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근대화된 한국 사회에 광풍처럼 몰아닥친 주류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천민자본주의의 득세와 그 당위성의 포악스런 긍정,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지속 가능한 맹목적 찬양뿐입니다.

경제 위기의 본질이 한국 사회의 암적 가치라 볼 수 있는 천민자본주의의 견제 없는 광폭 질주의 결과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의 근본적 부조리, '구조악'에 대한 비판이나 반성은 없습니다. 오직 현상적인 위기 극복 처방으로 작금의 시스템이 진열해 놓은 천민자본주의보다 더 극한 중독성을 갖는 소위 한국식 자본주의의 쓰나미 속으로 모든 가치를 밀어 넣습니다. 이러한 획일성이 주류의 권위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슬픈 현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괴물을 닮은 주류의 가치 토대를 피할 수 없는 대세라며 적극적으로 수혈 받고자 날뛰는 기관이 종교요, 교회라는 사실은 너무나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새 교회는 한국 사회의 주류인 천민자본주의의 바벨론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경제 위기의 도래는 교회의 도그마를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구조악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어이없을 정도로 뻔뻔스럽게 천민자본주의를 기독교의 절대 진리와 등가시하여 복음을 현세의 축복 도구로 전락시킵니다. 그 반대의 구호조차 허망하기 그지없습니다. 그것은 기복 신앙에 대한 반발의 포즈로 보이지만, 실상 이 참담한 현실에 대한 아무런 대안도 없이 중얼거리기만 하는 무력한 내세주의의 강조입니다.

이 폐허 직전의 정서 속에서 우리가 끌어안고 열광하는 종교적 가치는 뒤바뀌어 버린 절대 진리와 도그마 사이의 일그러진 관계뿐입니다. 주류의 권력의지에 함몰된 도그마의 시녀로서 절대 진리가 유물화된 것이 오늘의 한국교회가 보여 주는 행태의 핵심입니다. 교회의 십자가는 어느새 현실의 축복이거나 내세의 구원 보장을 위한 일종의 보증서 역할로 전락한 지 오래입니다. 이렇듯 권력의지의 노예일 수밖에 없는 주류 가치에 뼛속 깊이 물들어 버린 십자가는 용한 점쟁이가 휘갈겨 쓴 부적 한 장의 가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가 과연 그 십자가를 붙잡고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 십자가를 우러르며 과연 무엇을 기도하고 있습니까. 기도하고 있기는 한 겁니까.

주류의 욕망을 해체한 거룩하고도 두려운 십자가 사건

절대 진리는 주류와 비주류의 구분과 경계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절대 진리는 말 그대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갖는 의미로부터 절대 진리는 태동합니다. 물론 제도의 세워짐과 견고한 교리의 구축, 정교한 신학적 논리 성립은 문명의 진보에 발맞추어 기독교인이 애써 추구해야 할 소중한 사명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기독교인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절대 진리는 주류와 비주류의 틀, 그 너머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와 함께 또 한 가지. 이 절대 진리 앞에 선 존재는 철저히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자각입니다.

▲ 십자가 죽음이 만약 주류였다면, 예수는 결코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권력 집중화를 탐욕스럽게 추구하는 주류가 결코 아닙니다. (사진 제공 김경선)
이는 이기적인 개인주의의 강화가 아닙니다. 타계주의적인 신비 영성이나 수도원 은둔 가치로의 복귀도 아닙니다. 절대 진리의 메시지는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주어지는 주체성의 회복에 집중됩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으로 인해 한 존재의 존엄이 일깨워졌다는 사실의 발견, 한 존재가 비로소 참생명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진리, 바로 그것이 즉물적인 세속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기독교만의 특별한 영적 비밀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경이로운 예수 사건 앞에서 투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로소 눈뜨게 된 참된 투쟁은 권력욕과 현상 유지의 포로가 되어 버린 주류의 가치에 대한 일체의 동경을 거부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질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사건은 역설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철저한 비주류의 첨단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사회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에 못 박히는 존재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늘날 사형 받아 마땅한 극악무도한 인간 쓰레기들이 짊어지게 될 패배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과연 주류였을까요. 예수가 태어난 변두리 갈릴리가 주류였을까요?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주류였을까요.

십자가 죽음이 만약 주류였다면, 예수는 결코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권력 집중화를 탐욕스럽게 추구하는 주류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주류의 욕망을 철저히 해체하고 나온 거룩하고도 두려운 사건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 해체의 현장 위에 서 있어야만 합니다. 적어도 예수의 제자이기를 원하는 기독교인이라면 그래야만 합니다. 해체의 현상 위에 서 있어야 하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이 질문을 던짐으로 인해 세상 안에 있지만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외면받았던 예수의 삶이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어떤 왜곡됨도 없이 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오늘 나의 사건이 되는 순간은 존재에게 분명 고난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성스럽습니다. 고난이 성서를 낳았으며, 고난이 인간의 참되고 진실한 존엄을 세웠으며, 바로 이 고난이 절대 진리를 우리 안에 품도록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주원규 / <열외인종 잔혹사>·<망루> 저자, 동서말씀연구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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