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역사관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 헌신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역사가 위대하게 창조되고는 한다는 사실이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역사는 매우 신비하다. 무슨 힘에 의해서 어떻게 움직여 가는 것인지 그 깊이를 헤아리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많은 사상가들이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거대 담론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어느 한 이론으로 역사 전체를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역사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몫일 수밖에 없다. 우리로서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만큼이라도 알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역사관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 헌신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역사가 위대하게 창조되고는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소수의 사람들이 당대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변방의 사람들인 경우가 매우 많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평범한 소수에 의해 바뀌는 역사

교회 개혁의 역사에서도 이런 흐름을 뚜렷이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건은 사도행전에 잘 기록되어 있는 대로 초대교회의 등장이다. 구약교회라고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들은 신앙의 내용을 상실하고 세속에 물들어 있으면서도 형식적인 자기 의(義)에 빠져 예수님을 오히려 율법파괴자, 신성모독자 그리고 정치범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중에 예수님을 따랐던 소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실패를 딛고 일어섬으로서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어느 모로 보나 결코 탁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 볼 때 매우 평범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께 헌신하였을 때 교권을 쥐고 있는 지도자들로부터 많은 핍박과 반대를 받았지만 새로운 교회를 탄생시킴으로써 새 역사의 장을 열게 되었다. 교회사의 무대 중앙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최근 한국교회 안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이 다니던 교회의 잘못된 점을 시정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해오던 성도들의 다양한 연대와 능동적 운동이 그것이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교회 중심부에서는 거리가 먼 평범한 성도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교회가 잘못 나가는 점들을 좌시할 수만은 없어서 일어났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아래로부터의 교회 개혁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 이들의 움직임은 이른 봄에 막 솟아나기 시작하는 연한 순처럼 가냘프기만 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힘찬 생명력이 움트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중심부로부터 스스로 정화운동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 시점에서 이들의 운동은 한 줄기 밝은 희망의 빛을 던져주고 있는 셈이다. 이 운동들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 배경과 의미를 평가해 봄으로써 이 운동에 일조할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이들 운동의 중요한 공헌은 한국 교회의 주요 개혁 과제들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첫째, 이들은 담임목사직 세습에 대해 강력하게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충현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충사모), '광림교회평신도연합'(광평연) 그리고 '대원감리교회를 사랑하는 모임'(대사모)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해당 교회들은 이들과 침묵하고 있는 동조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정당화 논리들과 표면적으로 드러난 수적 우세를 앞세워 세습을 강행하였다. 놀라운 것은 각종 여론 조사 통계에 의하면 목회자들 중에 과반수 이상이 세습에 반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가 추락한 이유

한국 교회는 이들의 외침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공공연히 한국 교회에는 세습이 없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담임목사직에는 재정적 특권을 비롯해서 어떤 이권도 관련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담임목사직의 부자 계승이 합법적 절차를 거쳐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다.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들이 교회 재정과 인사와 관련해 그리고 대사회적으로 실질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그런데도 대형교회 담임목사직에는 이권은 없고 고난과 십자가만 있다고 우기는 사람들의 양심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른바 합법적 절차라는 것도 그 당시의 정황과 전후 관계를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형식적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곧 인지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합법적 절차가 이루어지려면 막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 목사의 영향력이 사라진 다음에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억압되어서는 안 되고 그들의 입장에 대한 충분한 토의가 교회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담임목사직 세습 문제는 사실 한국 교회의 깊은 질병이 빙산의 일각처럼 밖으로 살짝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대형 교회의 일부 목회자들이 아름다운 수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얼마나 세상적인 특권들과 자식에 대한 빗나간 애정에 물들어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모든 신학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담임목사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교회 머리가 되어 있고 개교회의 물량적 성장에 몰입되어 있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비참하게 상실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다. 한 마디로 교회가 하나의 기업으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는 종착역인 셈이다. 지금이라도 한국 교회는 깊이 통회하고 길을 돌이켜야 한다.

둘째, 이들은 교회 재정의 투명하고 건전한 운영을 요청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교회사랑장로모임'(교사모), 대사모 그리고 자양교회 5인의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이들 교회의 경우, 자신과 자녀를 위해 이기적으로 교회 재정을 유용하였거나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임의로 교회 재정을 집행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재정문제 또한 한국 교회의 심각한 개혁과제 중에 하나이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면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셨다(마 6:19∼24). 예수님께 영생의 길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부자 청년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마 19:16∼22). 그는 자신 있게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예수님의 결정적인 요청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재정 문제였다.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준 후에 쫓아오라는 부탁은 그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의사(韓醫師)는 일단 환자의 맥을 짚는다. 피의 흐름을 말해주는 박동을 감지하면 몸의 건강 상태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돈의 흐름을 짚어보면 개인이나 교회의 건강 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 목회자들은 변명을 하면 안 된다. 아무리 목사가 명설교를 하고 신비한 은사가 있고 매력적인 카리스마가 있다고 해도 돈을 잘 못쓰면 목사로서의 영적 생명과 권위는 상실하고 만다. 현직 대통령과 집권당의 권위가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이유도 결국 대통령의 아들들이 권력을 이용해 재정적 이득을 챙긴 것과 대통령이 그 사실을 방관한 것이 들통났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취득의 의미는 이제 완전히 퇴색되고 말았다.

한국 교회의 권위가 바닥을 친 것도 교회의 재정 운영과 직결된다. 목회자들이 불투명하게 교회 헌금을 사용하고 개인적 유익을 위해 교회 재정을 유용한다면 교회의 무너짐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재정 문제에 뚜렷한 열매를 맺게 된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를 보라! 그들이 부활의 예수님을 확실히 만나고 은혜와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니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의 필요가 생길 때마다 서로 나누니 공동체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행 2:44∼45 / 4:32∼35).

새로운 교회공동체 모색…"권위주의 싫어"

셋째, 이들 개혁 그룹들은 목회자의 윤리성 회복을 촉구해 왔다. '시흥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시사모)은 담임목사의 불륜에 대해, '참좋은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참사모)은 담임목사의 교회청년 성추행에 대해, 포항 ㅂ 교회 교인 일부는 담임목사의 설교 표절에 대해 각각 문제를 제기했다. 목회자 개인의 도덕성 부재 즉 성적 타락과 거짓을 짚은 것이다. 이는 참으로 불행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회자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모범을 보여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딤전 4:12).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심각한 문제는 윤리를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종교 개혁자들의 중요한 신학적 명제를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해서 자신의 윤리적 타락을 적당히 넘어가려는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마치 복음을 버리고 도덕종교나 철학을 수용한 것 마냥 매도하기 일쑤다. 최근 곽선희 목사도 이런 맥락에서 한목협 수양회에서 복음의 회복을 강조해 파장을 일으켰던 것이다.

자기 의(義)에 기초한 도덕주의는 마땅히 부정되어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 도덕적 완성을 성취할 수 없거니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義)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신앙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길은 바로 윤리적 삶이라는 열매에 있다는 진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전 13:1∼3 / 갈 5:6 / 약 2:17∼26). 아무리 열정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러대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가는 삶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영적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마 7:12∼27).

인격적인 존재가 다른 인격을 만나면 반드시 삶의 변화가 오게 되어 있다. 이력서를 통해 어떤 사람의 정보를 갖게 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인격적 교제를 한다고 하면서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자신의 믿음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런데 윤리에 대한 강조 없이 믿음만 강조한다면 그러한 믿음은 자신과 교회를 모래 위에 지은 집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목회자들이 성적 타락과 설교 표절을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은 도덕의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믿음의 이름으로 강력히 도전되어 마땅하다. 목회자들은 더 이상 비겁하게 이신칭의라는 방패 뒤에 숨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하는 모습과 어떤 징계라도 달게 받겠다는 각오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들 개혁 그룹들의 두 번째 공헌은 그룹별로 새로운 교회공동체 형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도 교회 비리에 대한 외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부패와 비리에 관련된 사람들의 인적 청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실패했을 때는 뿔뿔이 흩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운동들의 특징은 적극적인 대안에 대한 몸부림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광평연 중심으로 시작된 '열방의 빛된 교회', 시사모에 의해서 추동되고 있는 시흥교회의 자체 개혁 모색, 참사모에서 시작된 '예인교회' 등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들은 목회자들의 권위주의적 카리스마와 전횡에 너무나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교회 의사 결정 구조의 민주화와 재정 운영의 투명성과 건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심지어 예인교회의 경우, 담임목사인 정성규 목사가 먼저 목사는 교회운영위원회에 참여해서 의견은 제시할 수 있지만 의결권은 갖지 않도록 하자고 강력히 주장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이상적인 형태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이 몸담았던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독단적 권위에 기인한 여러 부조리에 상처를 입었던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고 한국 교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운동 통해 정화

이들의 모습을 생각하노라면 '아둘람 굴 공동체'가 생각난다(삼상 22:1∼2). 사울의 자기 중심적이고 전횡적 통치하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시달리며 방황하다가 다윗의 소문을 듣고 희망을 찾아 몰려든 사람들의 공동체다. 이들처럼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모색하고 있는 성도들이 참된 지도자 예수님을 모시고 그동안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내고 새로운 행복을 찾아갈 수 있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한편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도 생각난다(왕상 19:18).

이들이 이렇게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삶의 뿌리를 내렸던 정든 신앙 공동체에서 소외당하고 비난당하다가 결국에는 떠나야만 하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훨씬 불안정하고 작은 공동체, 더 많은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공동체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세속적인 안정보다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이들에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들을 바라보면서 한국 교회의 희망을 찾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 자신도 스스로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7천명의 대열에 있다는 기쁨 속에서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기 위한 치열한 영적 싸움에 정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를 떠나기 전에 이들의 외침이 받아들여질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깊이 남는다. 계속 교회 지도자들이 바른 소리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운동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정화하실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용기 있고 지혜로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박득훈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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