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TV를 보면 귀에는 온통 월드컵이란 말과 몇 강 몇 강 하는 말 뿐이요, 눈에는 오직 붉은 색만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국민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이 나라 축구의 놀랄 만한 발전을 눈으로 목격하며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들 뿐 아니라, 언론들이 한결같이 한국 대표팀의 놀라운 성적과 히딩크의 탁월한 지도력과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듯한 축구에 대한 국민적 열정을 두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고, 정치하는 사람은 이 뜨거운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하여 새로운 경제 도약을 이루자고 다짐 격려하던 갖가지 모습들이 제 눈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심지어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 소설가까지 동원되어 이 나라 장래의 장밋빛 비전을 마구 쏟아놓았습니다.

저도 물론 우리나라 축구팀의 예상 외의 성적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데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온 국민이 마치 한 가족이 된 것처럼 서로 어깨동무하고 춤추며 환호하는 것에 가슴 뭉클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 어울림이 계속 이어져 우리 사회 내의 오랜 갈등과 반목들이 눈 녹듯이 사라져 서로 협력하고 사랑하는 공동체 정신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기대하기 어려운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일련의 최대한의 긍정적 평가들에 전부 동의할 수 없는 이유로서, 아주 큰 상징적 오류의 예를 하나 우선 지적하고 싶습니다. 곧, 시청 앞 광장으로부터 아파트 내의 넓은 공터에 이르기까지 소위 붉은 악마들을 포함한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응원 중에 뿌려댔던 온갖 쓰레기들을 경기 종료 후 그냥 떠나지 않고 열심히 주워 수거하는 ‘성숙한’ 시민정신에 우리나라 뿐 아니라 외국 언론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은 일입니다. 자기가 버린 쓰레기를 줍는 행위, 이런 행위가 우리의 미래를 밝게 하는 하나의 징표가 될 수 있단 말인가요. 제 생각은 ‘천만에’입니다.

쓰레기를 줍는 것은 그저 쓰레기의 위치 이동일 뿐입니다. 단지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겉으로 드러난 존재의 감춤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 발생한 지구상의 환경적 엔트로피의 증가는 결코 해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에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요. 이 쓰레기는 결국 땅에 묻히거나 태워져서 엄청난 환경 오염 물질을 생산하고 말텐데...

이것이 우리 일반 사람들의 왜곡된 시각 중의 하나입니다. 심지어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 합니다. 진정한 시민 정신-환경 운동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은 그 쓰레기들을 줍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가 발생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근검 절약 및 절제-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동의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건전한 축제-사실 월드컵이라는 이번 축제도 건전성과 순수성과는 동떨어진 추한 면이 많이 드러나더군요-에 동반된 것이라 하더라도 절제되지 않은 환희의 추구는 곧 쾌락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요즘 월드컵 증후군이라는 증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 축제의 적지 않은 부분이 쾌락과 쾌락의 부추김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쾌락 뒤에는 항상 허탈과 공허함이 뒤따르는 법이니까요. 또 부추김이란 다름 아니라 그 뒤에 언론과 정부의 황금 우상이 숨어 있음을 느낍니다.

세계화에 편승한 우리 정부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경제 대국의 모델인 미국은 제게, 이 지구상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잘 살지만 빈부의 격차와 실업률이 가장 큰 수준이고 마약과 섹스와 이혼이 가장 성행하면서 핫머니를 가장 많이 굴려 세계 경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투기의 나라, 이 지구 상에서 가장 많은 식량과 에너지를 소비하면서도 빈국에 대한 베풂과 환경 문제 해결에는 가장 소극적인 나라, 자기네 국가 내부적으로는 가장 민주적이지만 외부적으로는 가장 오만하게 물리적 힘을 자랑하는 나라, 그리고 자신들의 국익-세계 평화나 정의라기 보다는-에 위배되는 어떤 행위도 용서하지 않는 가장 폭력적인 나라 등 부정적인 모습으로 먼저 다가옵니다. 이런 나라에 대한 추구가 곧 황금 우상숭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집단적 쾌락은 집단적 울분 또는 우울증과 다분히 맥을 같이 한다고 봅니다. 즉, 기쁠 때는 쾌락이요, 기분 좋지 않을 때는 울분 또는 우울증입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16강에조차 진입하지 못했다면… 집단적 울분 또는 우울증은 폭력성을 띱니다. 겉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최소한 심리적으로 잠재하게 될 겁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이적을 베푸신 후에 잠행을 자주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수님의 이적은 당시 군중들의 집단적 환희를 낳았겠지만 이 때문에 군중들이 예수님께 쾌락적 수준의 더 큰 환희-영적이 아닌 육적 환희-에 대한 욕구를 분출함으로써 죄로부터의 영적 자유와 해방이 아닌 물리적 힘에 의한 정치적 해방을 원하는 결과로 왜곡될 것을 우려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결과적으로는 이 육적 환희와 관련한 우리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그렇게 되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적 구원 계획을 무시하고 인간 중심적 해방 사상을 드러내 보인 인본주의의 극치!

이런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은 제가 너무 비관적이며, 적어도 월드컵 기간 중의 집단적 환희에 대해서는 우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건전한 사고가 아니냐고 저를 비판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저는 긍정적으로만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든 자기네 전체의 공통 이익을 위해서나 또 전부에게 좋은 결과를 두고 뜻을 같이 하거나 기뻐하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다시 말해, 당연한 현상이란 겁니다.

외국 언론에서 서구의 몇몇 나라들처럼 훌리건과 같은 사람들에 의한 불상사가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한 마디 칭찬한 것을 가지고 우리 언론에서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가며 자랑할 일인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설사 긍정적이고 건전한 면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얼마나 오래 가겠냐는 의구심이 듭니다. 이는 우리의 물질 중심의 상업주의적, 쾌락적, 자기중심적 문화가 결코 그 건전성을 내버려두지 않으리라는 예상 때문입니다.

이런 부정적 생각의 근거로는 언제나 이 나라의 음주 운전이나 교통 사고율, 그리고 에너지 소비 및 과소비가 세계적 수준이고, 또 누구 하나 잘못을 저질러도 자기 잘못이라고 시인하며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고(특히 정치가들)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면 자신은 어떤가 라고 한번쯤 돌아보기보다 앞장 서서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으며(특히 일반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온갖 부정 탈법을 일삼으며 남을 밥 먹듯이 속이고 남의 사정을 돌보지 않는(특히 기업과 장사꾼들) 등의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풍토를 들 수 있습니다. 또 사회 곳곳에 만연하고 있는 이해관계에 의한 갈등도 만만치 않습니다.

몇 년 전에 어느 연구 논문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이해관계 충돌로 인한 소송 건수를 비교했는데, 일본의 경우 수천 건에 불과하였던 데 반해 우리나라는 무려 이십만 건 이상이었음을 밝히면서, 우리나라의 갈등 구조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목사님 설교에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로지 긍정적인 시각뿐인 사람들 말마따나 만약 월드컵을 계기로 새로 형성된 듯한 그 공동체 정신이 바탕이 되어 이러한 몇몇 면들이 조금씩 나아진다면 저의 부정적 시각도 차차 수정되어야 마땅할 테고 저 또한 이 일이야말로 눈물 나도록 기뻐해야 할 일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불행히도 쉽사리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는 세상적 일로는 일시적 눈가림은 할 수 있을지언정 궁극적 치유는 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의 모두가 상대적 가치론에 빠져 있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는 자가 다수이면 이전에 존재하던 절대적 가치관이 훼손되어도 그저 묵인하거나 무방하다고 보는… 심지어 불법이나 부정 행위라 할지라도 다수이면 괜찮은… 다수의 남보다 자신의 의나 선이 좀 낫다 싶으면 수준이 낮아도 만족하고 마는… 남들 다 하는데 내가 빠지면 혼자 뒤쳐질 것 같고 손해볼 것 같은… 이러한 등등의 가치의 상대화 및 절하는 모두 돈과 권력과 명예와 이들을 통한 육적 소비적 쾌락이 최고의 중심 가치로서 추구되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요즘 아이들은 옳든 그르든 자기가 세운 기준이나 욕망에서 벗어나거나 맞지 않으면 관용이나 용서는 커녕 가차없이 등을 돌리거나 폭언과 폭력을 일삼기까지 하더군요. 이것은 상대적 가치론이 이제는 몇 술 더 떠 완전히 자기중심적 가치론의 수준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현상들은 영적 가치를 철저하게 무시해 버리는 미국식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더해질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가 홍익인간이라고 배웠던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의 현재적 본질이 바로 이에 다름 아닙니다. 세계화 시대의 무한 경쟁 우위를 전제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교육 이념, 미국의 세계화 정책을 가장 핵심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지 싶습니다. 성경의 진리 말씀은 절대적 가치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세상적 기득 가치의 확대 내지 유지를 위해 이 절대적 가치를 상대화하면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왜곡하거나, 지키지 못함을 어떤 식으로든 자위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영국의 몇몇 교회는 축구 중계 때문에 기도회와 같은 교회 행사들을 미루었다는군요. 제가 다니는 교회의 신도들 몇몇도 우리나라 경기 시청 때문에 모 행사를 미루는 게 어떻겠냐고 목사님께 건의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었습니다.

저는 누군가 이런 기도를 할 때 곤혹스러움을 느낍니다. 특히 헌금 기도 때 말입니다. ‘신령한 맘으로 예물을 바치는 손길마다 백 배 천 배 물질적 은혜를 베푸소서’. 물론 우리가 이 기도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속뜻을 들여다 보아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은연 중에 이러한 물질적 기복이 중심이 되는 기도를 하고 있음을 부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액면 그대로 기도한 데다 또 그렇게 받아들이면-백 배 천 배 받으면 한정된 자원을 생각해 볼 때 남의 것을 빼앗아 올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간단한 산술로도 유도되지요-그건 심각한 영적 결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극빈자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있는 물질이 결코 적은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만 들어도 참담하던 옛날 보릿고개 시절을 이제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마 꺼내기만 하여도 요즘 젊은이나 어린애들로부터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망각은 ‘절대적’입니다. 이 때에 비하면 우리는 이미 얼마나 크고 많은 물질적 축복을 받았습니까? 그럼에도 이러한 기도로만 채워진다면 이것은 절대적 빈곤에 처한 사람들의 절망과 고통을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출애굽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상대적 빈곤을 잠시도 참지 못하는 우리네 육적 욕망과 갈급함을 영적으로 다스리지 못한 결과로 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또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나라를 세계적 경제 대국으로 성장시켜 주소서’라는 기도에도 움찔하였습니다. 저는 경제 대국이 우리의 자랑이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말입니다. 영이 우선되지 않은 물질은 영의 발전을 방해하는 가장 치명적인 요소이며,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포섭 및 동맹 대상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사탄은 주님께 이미 주님의 것인 천하 만국이라는 물질을 주겠노라고 호언장담하며 유혹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제가 원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소서’라고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성숙한 기도로 전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시바삐 우리 기독교인들은 개개인의 새로운 영적 거듭남—남을 전도하기 전에 새로운 영적 각성으로 자기 자신부터 다시 전도함—을 통해 다수의 영적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하철에서 목소리 높여 전도하는 전도자들의 용기와 노고에 고개는 숙여지지만 목청만으로의 전도로는 이제 힘을 얻기 힘들다고 봅니다. 비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기득권의 희생을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의 교리를 말 몇 마디로 어찌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우리는 심지어 예수님의 이적을 목격하고서도 자신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회개하지 않았던 많은 유대인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가치의 새로운 회복과 사랑의 권능을 얻어 그 사랑을 이웃에 따뜻한 말과 손길과 물질을 통해 베풂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는 일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가 아닐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리고 무엇보다 또 바라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근검 절약, 절제하는 생활을 해야 하며 자본주의의 왜곡된 교환가치에 의해 형편없이 망가지고 평가절하된 각종 피조물들의 가치와 영적 가치들을 창세기 상태대로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최소한의 필요 이상의 소비는 미래 세대들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이기적이고 야만적이기까지 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과소비는 지구 상의 자원의 고갈과 환경 오염을 가중시켜 그 결과로 끝내 파괴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황폐한 땅 밖에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로 구조화되고 내재화된 우리의 끝없는 욕망으로 인해 창조 세계의 피조물들이 피폐해지고 고통받고 신음하도록 조장, 방조하는 것은 참 생명과 부활의 십자가를 넘어뜨리고 훼손시키는 우상 숭배 내지는 적그리스도적 세상 풍조에 협력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며, 이를 방치하는 것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하는 개인의 이기적 신앙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가난해지지 않고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기 어렵다는 성 데레사의 한 마디 말이 저의 폐부를 찌릅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