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남의 장기를 이식 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수술의 성공은 거부 반응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역시 심혈관 질환으로 심장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다. 가슴 부위의 동맥 한 가닥과 다리의 정맥을 떼어내서 막힌 관상동맥을 우회(Over pass)하는 대수술이었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내 혈관을 이식했기 때문에 거부반응은 크지 않았다. 그래서 10년 가까이 큰 어려움 없이 이렇게 살고 있다.

기독교가 이 땅에 전래된 지도 100년이 훨씬 넘었다. 우리는 입만 열면 1천만 기독교인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우리를 이방인 취급을 하고 있다.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누구를 수원숙우(誰怨孰尤)할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우리 탓이다.

그 동안 벌였던 기독교의 토착화 문제는, 신학자들의 탁상논쟁으로 그쳤는지 목회 현장에서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오늘도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어김없이 그 유명하다는(?) 서양 신학자나 목회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씀의 문을 연다. 목회자의 양산이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는데도 우리의 신앙 이야기를 외국 사람의 말이나 글로 빗대어 들을 수밖에 없는 오늘의 현실이 안타깝다.
  
한 동안 '오순절 성령운동'이니, '토론토 축복'이니 하며 새로운 목회기법을 배우려는 행렬이 해외로 줄을 잇더니, 요즘은 셀(Cell) 공동체 목회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다시 국제공항을 메우고 있다고 한다.

셀 목회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를 논하는 일은 솔직히 내 분수를 넘어선다. 단지 마음 속에 가시지 않는 의문 한 가지를 제기하고 싶을 따름이다. '공동체 정신을 꼭 외국에 가서 배워 와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물론 셀 목회가 추구하는 공동체는 단순한 생활공동체가 아니다. 영적인 공동체다. 그러나 생활공동체의 정신을 근간으로 하지 않은 영적 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런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밑동 없는 공동체일 게다.

서양사회는 철저히 개인주의 사상에서 출발하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칼트의 말은 바로 서양 개인주의 사상의 출발점이다. 이번 월드컵 축구대회 때 전 세계가 우려했던 것이 훌리건(hooligan)이었다. 혼자 좋아서 축구를 즐기고, 자기 흥분을 자제하지 못하고 난동을 부리는 무리들이다. 훌리건은 바로 이런 개인주의의 산물이다.

이에 대비되는 것이 우리의 '붉은 악마'다. 아무리 흥분하고, 비록 경기에 져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제할 줄 안다.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기에 패하고 고개를 떨군 선수들을 향해 "괜찮아"를 연호하는 모습을 보고 세계가 놀랐지 않았는가?

우리 조상들은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공동체 정신을 갖고 살았다. 두레와 품앗이 문화다. 뿐만이 아니다. 다소 낯선 단어이긴 하나 우리에겐 '석덤'이란 미풍이 있다. 마을에 좀 사는 집안에서는 밥을 지을 때 식구가 먹을 양보다 세 사람 먹을 쌀을 덤으로 얹어 내었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다. 이렇게 해서 남는 밥은 어렵게 사는 이웃이나 나그네, 장사치들의 몫이었다.

100여 년 한국교회 전통 가운데도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 정신이 없지 않다. 날 연보(獻日)를 아는가?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를 위해 바치는 시간 연보를 말한다. 하루를 바쳐 전도하고, 시간을 쪼개서 교회와 목회자를 위해 봉사하였던 한국교회만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름이다. 바로 셀 공동체가 추구하는 정신이다.

뿐만이 아니다. 비록 외국의 것이기는 하나 이 땅에 뿌리내린 신앙 공동체도 있다. 구역, 또는 속회다. 요한 웨슬리의 밴드(Band)와 속회(Class)가 이 땅에 토착화한 것이다. 이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단순히 '주일낮예배를 세우기 위한 수단'이라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 시대 상황이 맞지 않는 점이 있으면 바꾸고 보완하면 된다. 내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의 미풍을 속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외국의 성공한 목회 사례를 벤치 마킹(Bench Marking)하는 일에 한국교회는 언제나 발 빨랐다. 6, 70년대 새마을운동 성공사례를 따라 배우던 습관이 아직 남아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한국교회는 문화적 바탕이나 민족 정서는 아랑곳 하지 않고 성공목회 사례만을 찾아 지구촌 어느 구석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의 민족과 문화 속에 깃든 공동체정신을 찾는 일을 우선하여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접수(접가지)를 찾았더라도 같은 종(種)의 접본(대목)을 찾지 못하면 그 접붙임은 실패하고 마는 이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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