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비극은 모두가 중심이 되려는데 있다. 내가 중심이 되기 위해서 너는 사라져야 하고, 내가 중심이기에 너는 단지 중심인 나를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중심주의는 모든 인간관계의 단절을 초래하고, 파멸을 가져온다.

한 예로 자연생태계의 근본적인 위기는 인간중심주의에 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기에 자연은 곧 인간의 편리와 안락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마음껏 자연을 파헤치고 착취하여 자기들에게 이로운 자연의 진액을 쥐어짜냄으로써 자기들은 살찌우지만, 자연생명은 병들고 죽게 만들었다.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의 죽음을 가져왔지만, 결국 인간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중심에 서고 싶은 본능이 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에 자기가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모임이나 단체도 그러하며, 더욱이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는 자기들이 중심이 되어 다른 회사를 통합하여 최후의 중심에 서고자 한다.

국가도 역시 자기 국가가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그것은 최근 미국 대통령 부시가 '악의 축' 발언을 하면서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세계 질서를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려고 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개인이든 단체든 국가든 자기가 중심이 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다른 이들과 경쟁하여 여러 면에서 그들 보다 내가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 경쟁에서 최후 승리자만이 중심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로가 중심이 되려고 하는 현대 사회를 경쟁 사회라고 부른다. 경쟁사회에서 나와 너의 관계는 주종의 관계, 우열의 관계를 전제로 하기에 사랑과 섬김,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있을 뿐, 경쟁의 대열에서 탈락한 자는 인생의 낙오자로 취급을 받고 곧 좌절하고 만다.

현대 사회에서 최고의 생존 방식으로 삼는 이 경쟁은 기독교 신앙과 십자가가 들어갈 틈이 없다.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는 십자가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경쟁에서 살아남아 중심에 서려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거추장스러운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경쟁은 반(反)기독교적이요, 반(反)성서적이라 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무한 경쟁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무한'이란 말은 '유한'의 반대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보면, 곧 하나님과도 경쟁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바벨탑을 높이 쌓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이 중심이 되겠다는 것이 현대인간의 오만이요, 죄의 극치이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되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되겠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하나님이 되겠노라 내세운 경쟁을 어찌 악령의 짓이라 말하지 않으리요.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마저도 경쟁의 노예가 되어 있으며, '중심'의 악령에 깊이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신앙이 곧 경쟁인 것처럼 가르쳐 성도들에게 경쟁심을 부추기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곧 축복이라는 성장논리가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 가득하다. 교회에서 요구하는 신앙지침에 따라 치열한 신앙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몇몇만 구원의 방주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이탈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는 식의 신앙논리가 더욱 기독교의 주류신앙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성직자와 장로들은 자기들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교회는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중심은 오직 하나님일 뿐, 어느 누구도 교회의 중심일 수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모든 것의 중심이라 자부하며 교회중심주의, 교회절대주의에 빠져있다. 그래서 교회 밖의 다른 존재와 다른 공동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기들만의 견고한 아성을 높이 쌓아 놓았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교회 울타리를 넘으려 하지 않고, 교회 울타리를 넘는 것은 곧 타락한 무리들의 세상 속으로 가는 것은 인식한다. 교회중심주의에 갇힌 한국교회는 이제 더 이상 교회 밖에 있는 가장자리를 보지 못하고, 가장자리에 사는 가난하고 헐벗은 우리의 이웃에게 가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타락은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 되겠다는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교회의 비극은 가장자리가 되지 못하는데 있다.

예수의 영성은 중심의 영성이 아니라 가장자리의 영성이다. 예수는 대제사장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여겼던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의를 드러내지 않으셨다. 주님은 오히려 중심인 성전을 등지고 세상에 나아가심으로써 성전중심주의를 타파하셨다. 주님은 한번도 중심이 되어보지 못하고 일생을 가장자리에서 맴돌며 사는 가난하고 병들고 죄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더불어 사셨으며, 그들에게 하늘의 능력을 보이셨고, 마침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자기의 살과 피를 값없이 내어주신 예수는 세상에 섬김을 받으러(중심에 서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가장자리에 서기 위해) 오셨다. 주님은 상하·우열의 수직적인 관계, 곧 경쟁의 관계로 우리를 만나신 것이 아니라, 나와 너의 동등하고 평등한 친구의 관계, 사랑의 관계로 우리를 만나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셨다.

기독교 영성은 중심에 있지 않고 가장자리에 있다. 나무가 가장자리로 뿌리를 뻗어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듯이, 기독교회도 가장자리로 손을 뻗어 가장자리를 교회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교회가 세상의 가장자리로 나아갈 때, 아니 가장자리가 될 때 비로소 십자가가 회복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중심에 있지 않고 세상의 가장자리에 있다. 하나님의 의는 세상의 중심에 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자리에서 그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이루어진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신 영성은 바로 가장자리의 영성이기 때문이다.

채희동 목사 / 벧엘교회, [꽃망울 터지니 하늘이 열리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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