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두 얼굴

시종일관 절대자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다시 말해 내세 천국의 전위에 서기를 원하는 소위 근본주의적 이념에 연루된 교회의 모습을 보면,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을 발견하게 됩니다. 앞서 말한 해체와 저항의 예수 정신과는 또 다른 굉장히 어색하고 민망한 가치를 열광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 그리고 '그곳'은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요 그분의 가르침이란 주장과 설교에 핏대를 올리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돌이켜 보면 그들, 그곳의 교회 주인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공간으로서의 교회, 세속 도시에서 성역화를 갈망하는 또 다른 땅의 욕망으로서의 교회가 그들의 주인입니다. 그와 함께 공동체의 욕망은 그들이 세워 놓고 옹립한 질서로서의 계급, 그 첨단을 차지하고 나선 존재에게 모순으로 점철된 깨달음을 구걸합니다.

그들은 타계주의적 열광을 강조, 강화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절대의 초월성을 보이는 공간의 성역화에 함몰시키는 '굿판'에 불과합니다. 그 굿판을 세밀히 보면, 성역화가 가진 세속 도시의 거부에 대한 이중적 잣대, 그 기로에서 지상의 어떤 가치보다도 더욱 뻔뻔스럽게 세속의 욕망에 충실하고자 하는 가치의 모순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탈바꿈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않습니다.

성역화와 공동체로서의 성도들의 확산이 마치 전도의 성공이요, 하나님 뜻의 성취요, 이 땅의 승리라고 그들은 신앙합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도 성공하고 사후 세계에서 보장된 천국에서도 남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계급적 위치를 확보하고자 합니다. 이 미쳐버린 야만의 가치관, 그 진창의 중심에서 그들이 마음껏 소비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십자가요, 보혈의 주술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vs. 우리가 못 박은 예수

이처럼 땅의 메시아를 욕망하는 이들의 눈과 귀로 드높이 들린 저 십자가 위에 예수는 오늘도 못 박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해야 하는 대상은 분명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교회는 그 신앙의 대상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는지 아니면 우리가 못 박아 놓은 예수를 신앙하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식별조차 어려운 지경으로까지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욕망의 우상이 세워 놓은 예수 십자가의 야만이 문명과 이성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이곳과 저곳에서도 예수의 이름을 빙자한 욕망의 성취, 형해만 남은 선동(propaganda, 프로파간다)의 줄기찬 반복, 재생산만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하나의 야만의 교회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성과 문명의 황홀 속에 파묻혀 버린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성의 야만은 교회라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교회 제도를 거부하는 태도의 모든 근거를 이성의 자리에 놓으려 하는 일체의 경향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초월적 신성함을 발견하게 될 자리를 찾지 못하는 또 다른 모호성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바로 초월의 모호성입니다. 초월의 내재적 가치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교회를 통해 구현된다는 사실에는 의문을 갖고 그것을 아예 짓밟아 내고자 하는 욕망 역시 야만의 교회로 나아가는 또 다른 폭력성의 진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두 가지 야만의 논리로부터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방향성을 교회라는 개념의 탈공간화, 공동체의 발전적 해체를 생각하는 시점에서부터 교회의 야만성 탈피를 모색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광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는 구약성서 출애굽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애굽의 박해는 비단 공간적, 시대적 영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하지만, 더 나아가 애굽의 상징은 인간 내면에 숙명처럼 자리 잡은 욕망의 차원으로까지 소급합니다. 이 욕망이 땅의 메시아를 낳았으며, 주술의 십자가를 잉태했습니다.

애굽으로부터의 탈출, 엑소더스는 광야로 몰입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단 하나의 목표는 가나안 입성입니다. 이 가나안의 성취는 정신과 영혼의 성취로 비약됩니다. 우리의 정신이 애굽으로부터 해방과 탈공간화, 탈공동체화를 추구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 영혼의 골방 안에서 우리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땅의 욕망에 길들어 버린 야만의 성역이 도저히 범접할 수 있는 방주를 직조해 내는 성령의 활동과 조우하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 방주를 직조하는 성령과 조우하는 사건

교회는 바로 이러한 영혼의 출애굽을 이루어낸 우리 각자의 주체성 회복의 사실을 더욱 견고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한 건 한 개인의 주체성의 주인은 그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몰되고 해체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개인은 욕망의 길을 잃게 됩니다. 세속 도시에서 미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의 길을 자발적으로 잃어버리는 상실은 영원한 길의 회복으로 전환됩니다. 영혼의 자궁이 곧 그리스도 생명의 거대한 우주적 터전임을 영의 세밀한 감각으로 인지하게 됩니다.

보이는 공간, 건물이 영혼의 세밀함을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세련되게 구축되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종교적 프로그램이 이 영혼의 해방을 가져다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이 원시적이면서도 우주적인 감각이 바로 초월적 감각입니다. 이 감각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끊임없이 숙명과도 같은 욕망의 차원을 철저히 해체하기 시작합니다. 이 욕망의 차원에서 발아되는 야만의 속성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이 거룩하고도 철저한 단절, 끊임없는 결별로부터 교회는 시작됩니다. 이러한 단절과 해체의 도상 위에 선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로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오직 초월성의 신비만이 담보되며 빛의 그늘에 모이기를 원하는 존재들의 모임, 그들이 모인 공간이 발전되고 확장된 의미로서의 교회인 것입니다.

주술로서의 야만과 결별한 교회는 성역화를 철저히 거부합니다. 이 땅 어디에서도 머리 둘 곳을 찾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야만을 거부한 교회는 단호하게 길 위에 서 있음을 선포합니다. 광야인 길 위에 서서 끊임없이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에 대해 질문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교회만이 오늘날 야만의 주술에 세뇌된 교회를 새롭게 하는 거의 유일한 개혁의 실마리가 되진 않을지 조심스럽게 진단해 봅니다.

주원규 / 목사, <열외인종 잔혹사>·<망루> 저자

<열외인종 잔혹사>로 2009년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자 동서말씀연구회의 주원규 목사(37)의 연재 칼럼. 한국교회의 현 상황은 천민자본주의와 유교적 가부장제의 괴이한 결합 때문에 뿌리부터 그 기능이 마비됐다. 2,000년 전 예수가 선포한 교회의 참모습, 그 원형을 살펴봐야 할 이유다. '구호'로서의 새로움이 아닌 영적 혁명으로서의 새로움을 지향하는 교회의 방향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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