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교회가 아나뱁티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위기 때문이다. 자끄 엘륄(Jacques Ellul)이 말했듯이 16세기의 로마 가톨릭처럼 현대사회에서 프로테스탄트는 더 이상 사회적 실재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사회는 후기 개신교 사회(Post-Protestantism Society)라고 할 수 있다.

1. 후기 개신교 사회(Post-Protestantism Society)의 징후

어찌 보면 후기 개신교 사회는 후기 기독교 사회(Post-Christendom Society)의 개신교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둘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루터와 칼뱅과 같은 500년 전 종교개혁자들이 닦은 터 위에 세워진 프로테스탄티즘이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은 프로테스탄티즘 내부의 문제이기도 하다.

1) Sola Gratia!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총'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요, 선물이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재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전략적으로 가톨릭교회의 공덕 교리에 반대하기 위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은총 교리는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값싼 은총'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거칠게 말해서 프로테스탄티즘이 위기를 맞은 이유 중 하나는 신앙과 행위, 종교와 윤리, 칭의와 성화 사이의 균형을 잡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일찍이 루터와 독일 교회의 고민이었으며 칼뱅이 해결하고자 치열하게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칼뱅을 따라 청교도들도 삶의 열매에 대해서 많은 강조를 하기는 했지만 청교도들의 윤리는 종종 금욕주의와 율법주의로 기울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개신교회는 그들이 개혁하고자 했던 로마 가톨릭교회를 능가할 만한 삶의 열매를 별로 보여 주지 못했다. 유럽을 피로 물들였던 30년 전쟁이나 종교재판, 마녀사냥, 노예무역, 제국주의적 선교 등은 프로테스탄트나 가톨릭교회 공히 저질렀던 기독교 죄악의 역사들이다. 특히 1, 2차 세계대전 당시 그리고 히틀러 정권과 아우슈비츠라는 가공할 만한 악에 직면해서 개신교회는 세상을 감동시킬 만한 삶의 열매를 보여 준 것이 별로 없다.

이러한 문제들을 인식했던 본회퍼는 저급한 개신교 구원론을 '값싼 은총'이라고 질타했으며 잊혀졌던 제자도에 대한 강조를 새롭게 했던 것이다. 본회퍼의 일갈 이후 개신교회는 제자도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제자도에 대한 강조는 개신교회 내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제자도에 대한 강조는 종종 방향을 잘못 잡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몇몇 선교 단체에서는 제자도를 오지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쯤으로만 이해하거나 혹은 사랑과 돌봄을 빌미로 순종을 강요하는 목양 이론(shepherding theory)으로 무장한 권위주의적 공동체주의로 타락하기도 하며, 상당히 많은 지역 교회는 제자도를 제자 훈련 과정을 이수하는 것, 성경 공부를 하는 것, 교회 봉사에 열심을 내는 것, 혹은 개인적 경건 생활에 헌신하는 것 등으로 오해한다.

2) Sola Fide!

종교개혁자들은 또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것 역시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른다는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회복한 것이었다. 전략적으로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성직자주의 및 성례전주의에 대한 반대로 선언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도대체 구원을 얻는 '믿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답변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통주의자들은 올바른 교리에 대한 지식을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 교리는 최소한 1,500년이나 지속된 정통주의 안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믿음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루터의 회심 체험을 잇는 경험주의적 답변에 따르면 믿음이란 뭔가 신적인 존재와의 조우, 말로 형언할 수 없으며 저항할 수 없는 강렬한 심리적 체험, 신비한 조명, 회개와 애통의 눈물 등으로 묘사된다. 그런가 하면 아르미니우스적 입장에서 믿음은 제단 초청(altar calling)에 대한 응답이나 예수님 영접 등 믿음의 결단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이 결국 삶의 열매를 만들어 냈느냐는 물음을 던졌을 때 긍정적인 답변을 얻기란 쉽지 않다. 오늘도 여전히 숱하게 많은 경건 서적이 쏟아져 나오고 숱하게 많은 회심 체험과 신앙 간증들이 넘쳐 나고 여전히 많은 회심자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신자다움' '교회다움' '기독교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믿음에 대한 프로테스탄티즘의 한계 중 하나는 그것을 '개인의 신앙'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메섹에서 바울이 그랬듯이 주님과의 만남과 신앙의 결단에서 개인의 실존적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옥한흠 목사도 잘 지적했듯이 프로테스탄티즘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는 '교회론'이며 이것은 신앙이 가지는 공동체적 차원을 설명하는 데 치명적 약점이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나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신앙관의 정치, 경제, 사회적 차원에 대한 설명은 더더욱 약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신앙관은 '나 홀로 신자'를 만들어 낼 소지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3) Sola Scriptura!

종교개혁자들의 세 번째 캐치프레이즈는 '오직 성서로'이다. 이는 중세 가톨릭교회가 순수한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라 오만 가지 잡다한 교회의 전승, 교황의 칙서, 예배 전통 등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폐해를 바로잡으려는 목적으로 선포된 선언이다. 그리하여 성도에게 성서 본연의 가르침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 획기적인 개혁 선언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개신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아직도 강단의 설교가 너무나 비성서적이라는 데에 있다. 여전히 교회는 주님의 말씀보다는 조상들의 유전과 썩어 빠진 전통, 이교적 상상력, 각종 신화와 미신, 개인이 고안해 낸 생각, 세속의 정신 등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과연 프로테스탄티즘은 한 번이라도 주님의 가르침의 근본에 도달한 적이 있었는지를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한 가지 예로, 프로테스탄티즘이 주님의 '산상설교'를 제대로 가르친 적이 있었는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개신교회는 초대교회와는 반대로 거의 언제나 주님의 산상설교를 비실제적이고 비현실적인 가르침으로 치부하고 그것이 강단에서 액면 그대로 선포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울러서 개신교회는 십자가를 지고 가신 주님의 모범, 비폭력, 무저항, 가족주의의 거부, 급진적 구제와 재산의 공유 등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가르친 적이 많지 않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성서주의를 주장하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보다는 구약의 가르침과 실천으로 도피해서 자의적인 윤리학을 만들어 내곤 했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 성서주의를 고수하면서도 성서의 본뜻, 곧 계시의 중심이신 주님의 성육신, 삶, 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자구와 문자에 초점을 맞추면서 벌어진 일들이다. 그래서 개신교회는 고등비평학자들이나 인본주의적 무신론자들의 공격에 맞서서 기계적 축자영감을 주장하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다. 즉 일부 보수 개신교 신자들은 '오직 성서'를 성서의 글자를 수호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고등비평도 프로테스탄티즘의 성서주의가 낳은 사생아다. 그러고 보면 프로테스탄티즘의 성서주의는 고등비평과 축자영감이라는 아들을 낳은 셈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정작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순종의 일에는 그만큼 등한히 하고 말았다.

바로 이상의 징후들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위기를 알려 주는 표지들이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프로테스탄티즘이 겪고 있는 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개신교 신자들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찬찬히 살펴 또 한 번의 개혁에 불을 댕기지 않을 수 없다.

2. 한국교회의 메가 처치 현상의 말기적 증상

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위기, 그중에서도 삶의 부재 및 제자도의 실종은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다. 지난 100여 년간 한국의 개신교회는 세계 교회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빠른 성장을 경험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교회에 주신 큰 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큰 시험 거리이기도 하다. 자고로 교회의 위기는 늘 교회의 성공과 함께 뒤따라왔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자신의 위기가 자신의 성공 때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한국 교회는 지금이 위기 상황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다 같이 공감하면서도 여전히 성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한국교회가 양적인 성장에만 너무 매진한 나머지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등한히 함으로써 생겨난 메가 처치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커 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메가 처치 현상은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한국에 와서 특히 심해졌다. 그래서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 10대 교회 중 무려 5~6개가 한국에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메가 처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때는 대략 198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에도 3,000명 이상 모이는 메가 처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메가 처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든 교회가 메가 처치로 성장할 수 있으며 또 메가 처치로 성장해야만 건강한 교회라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분명 과거와는 사뭇 다른 생각이었다. 그 때문인지 1980년대 이후 한국에는 가히 광풍이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메가 처치 현상이 몰아닥치고 있다.

메가 처치 현상에 물든 한국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양적 성장을 위해 올인(all-in)하기 시작했다. 소위 '부흥'을 위한 노력이다. 그러면서 서울 강남의 몇몇 메가 처치와 사역자는 모든 한국교회의 표준이요, 모든 목회자들의 모델이 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현재 한국에는 약 5% 내외의 메가 처치가 있지만 나머지 95%의 교회도 모두 메가 처치를 지향하고 있는 잠재적 메가 처치가 되고 말았다. 이와 함께 온갖 형태의 교회 성장 도구와 이론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말았다. 부흥, 전도, 세계 선교, 영혼 구원, 비전, 하나님나라 확장 등…교회 내에서 활용되고 있는 다양한 용어들은 결국 교회 성장을 위한 세일즈 용어에 불과하다.

이러한 메가 처치 현상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한국교회를 명목상의 신자로 가득 차게 만든 것이다. 제자도는 찾아볼 수 없으며 세상과 교회는 아무런 차이도 없어지고 말았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보다 더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종교 단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이를 개선할 능력조차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메가 처치 현상에 사로잡힌 한국교회는 제자도에 대해서 강조할 수 없는 구조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드물게 제자도를 강조하는 교회도 알고 보면 결국 진짜 목표는 양적 성장인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제자도를 강조하는 순간 양적 성장을 포기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한국교회는 여전히 부흥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건강함은 찾아볼 수 없으며 교회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최악으로 추락하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몇몇 네티즌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개독'이라는 용어는 이제 한국 개신교회를 지칭하는 보통명사화되고 있으며 암암리에 활동하던 안티 기독교 운동도 점차 조직화되고 있다. 이와 함께 많은 개신교인은 가톨릭교회와 불교로, 혹은 무종교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아울러 교회에 '안 나가'는 '가나안' 교인들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래저래 개신교 인구는 빠르게 감소되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2000년 초반부터 메가 처치 패러다임은 큰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전체 개신교인의 수가 줄어들면서 교회 간의 성장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게 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교회에 대한 인식은 더욱 나빠지고, 그러면 그럴수록 교회 숫자는 더욱 줄어들고, 그러면 그럴수록 교회는 더욱 성장을 위해 올인하고 있다. 한마디로 악순환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할 것은 1980년 이후 소위 건강한 메가 처치로 역할 모델을 자처해 왔던 교회들이 속속 문제를 드러낸 것이다. 강남의 모 교회는 전국과 전 세계에 체인점을 만들어 제국을 꿈꾸고 있고 제자 훈련으로 존경을 받던 다른 모 교회도 최근 천문학적 액수의 헌금을 들여서 새로운 교회당을 건축함으로 빈축을 사고 있다. 이처럼 리더급인 메가 처치들이 올바른 본을 보이지 못함으로써 리더십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메가 처치 패러다임 전체가 위기에 처하게 되는 양상이다. 리더십의 부재는 결국 방향성의 상실로 나아간다. 때문에 조만간 한국교회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물음을 던지게 될 시점이 올 것 같다.

3. 아나뱁티스트의 제자도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아나뱁티스트 신앙은 우리에게 귀중한 증언을 해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핵심 중 하나는 '제자도'에 대한 강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나뱁티스트의 제자도는 통상 개신교회 일각에서 논의되고 있는 제자도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일관되며 포괄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사실이다.

아나뱁티스트의 제자도가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제자도를 믿음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회퍼가 정확히 간파했듯이 제자도는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학의 문제요, 나아가 복음의 이해 곧 믿음의 문제다. 바르트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교의학은 윤리학이고 윤리학은 교의학이라고 했다. 믿음과 삶은 하나요, 칭의와 성화도 하나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아나뱁티스트는 믿음을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용서하신 것을 믿고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구속자(redeemer/savior)이면서 모범(model)이고 스승(teacher)이며, 궁극적으로 주님(Lord)으로 믿는 것을 말한다. 특히 그들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제자도는 바로 이 그리스도 신앙에서 직접 연유한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제자도는 근본적이다.

이런 이유로 아나뱁티스트의 제자도는 칭의와 성화, 믿음과 행위, 은총과 노력 간의 오래된 모순을 극복한다. 이는 그들이 제자도를 칭의와 구별되는 성화 과정에 국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신교 구원론에서 믿음과 행위 간의 모순이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대체로 제자도를 칭의 뒤에 따라 나오는 성화의 과정에 가두어 두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논리적으로 제자도는 칭의나 중생 뒤에 위치한다. 칭의, 성화의 논리적 선후 관계는 점차 시간적 선후 관계로 바뀌고 이는 다시 필수와 선택의 문제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칭의는 필수지만 성화, 곧 제자도는 선택으로 생각하고 만다. 칭의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지만 성화는 부족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구원관이다.

하지만 아나뱁티스트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제자도는 신앙이 참됨을 증명하는 표지다. 그리고 침례·세례는 참신앙을 가진 자들에게만 베푸는 의식이다. 따라서 아나뱁티스트는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삶의 변화로 참신앙을 표현한 자들에게 비로소 침례를 베푼다. 고로 제자도는 물 침례보다 앞서 요구된다.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이나 발타자르 휘브마이어(Balthasar Hubmaier) 등은 물 침례 앞에 '영의 침례'를 강조했는데, 여기서 영의 침례란 말씀을 듣고 믿을 뿐만 아니라 순종하여 삶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 모두를 가리킨다. 이러한 영의 침례를 먼저 받은 자라야 비로소 물 침례를 받을 수 있다. 물 침례는 영으로 침례 받은 사실을 외적으로 공인하는 의식이다. 앨런 크라이더가 <회심의 변질>(대장간 근간)에서 밝혔듯이 이러한 아나뱁티스트의 침례관은 초대교회의 전통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관점과 실천이 믿음과 행위의 모순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아나뱁티스트의 그리스도 주권 사상과 제자도가 단순히 개인 경건의 영역을 넘어서 정치, 경제의 영역까지 포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요더(John Yoder)의 <예수의 정치학>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주권은 개인 경건이나 교회의 영역을 넘어서 정치, 경제적 영역에서도 양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칼뱅과 바르트가 '하나님 주권 사상'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던 그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신앙은 황제 숭배를 거부했던 초대교회의 전통을 계승한다. 이러한 관점은 세속화된 현대사회에서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새롭고 참신한 빛을 비춰 준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주인(Lord)이시기도 하다. 교회(ekklesia)는 종교 단체이면서 정치적 존재이기도 하다.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이면서 정치, 경제적 의제(agenda)이기도 하다. 이것이 요더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책임>(KAP)에서 그리스도인에게 불가불 정치적 책임이 있음을 강변한 이유다. 이러한 아나뱁티스트의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산상설교에 대한 지극한 존경, 제자도에 대한 확고한 헌신은 개혁 교회에서 말하는 공공 신학(public theology)에 비견할 만한 기독교 신앙의 공적 증언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러한 공적 증언의 기초 역시 산상설교와 주님의 본이다. 물론 국가는 영적 언어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 번역이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때문에 아나뱁티스트의 제자도는 교회를 교회답게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교회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놀라운 포괄성을 갖는다.

아나뱁티스트가 강조하는 제자도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그것이 공동체라는 컨텍스트에서 실천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나뱁티스트는 공동체를 교회 제도나 조직이기 앞서 형제들의 코이노니아로 본다. 때문에 제자도가 개인 경건이나 특정 훈련 프로그램, 세계 선교에로 헌신, 주교나 담임목사, 리더나 목자, 제도적 교회, 혹은 선교 단체에 대한 충성 등으로 변질되지 않는다. 아나뱁티스트의 제자도는 공동체의 컨텍스트 내에서 사랑과 섬김, 화해, 용서, 구제, 원수 사랑 등 구체적인 삶의 열매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오늘날 위기에 빠진 프로테스탄티즘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근본적이고 일관적이며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아나뱁티스트의 제자도는 명목상의 신자 문제를 해결한다. 이들은 자신의 입술로 신앙을 고백하고 삶의 변화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한 자들에게만 침례를 베푸는 '신자의 침례(believer's baptism)' 전통을 만들어 냈다. 신자의 침례 전통은 교회가 신자들로만 구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신자의 교회(believer's church)' 전통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신자의 교회 전통은 앨런 크라이더(Alan Kreider)가 몇몇 책에서 자주 강조했던 것처럼 초대교회 300년의 전통과 일치한다. 교회는 참신자들, 곧 영으로 침례 받아 물 침례로 확증받으며 피 침례, 곧 고난을 기꺼이 받는 자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교회에 명목상의 신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또한 교회는 곧 공동체이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끊임없이 서로를 독려하고 권면한다. 이것은 명목상의 신자 문제를 해결하는 또 한 가지 방식이다.

결국 아나뱁티스트의 제자도는 신자를 신자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한국교회는 바로 이러한 신자다움과 교회다움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일부 명목상의 신자들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회변혁에 대한 최상의 전략은 교회요, 교회 갱신의 최상의 전략 역시 교회다. 신자가 신자 되고, 교회가 교회 될 때 지금 우리가 앓고 있는 질병은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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