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를 스스로 고발했던 한목협
지난 6월 17일부터 18일 까지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대표회장 옥한흠)가 주최하는 제4차 전국목회자수련회가 열렸다. 한목협은 한국교회 주요교단 내 갱신그룹들의 연대단체 성격을 띄고 있다. 한목협은 지난 1999년 옷 로비 사건으로 한국교회의 위상이 또 다시 추락하고 있을 때 한국교회의 부패상을 스스로 통렬하게 고발하는 글을 주요 일간지에 광고로 실은 적이 있었다.

그 때 '개 교회 중심의 외형적 성장에 치중하고, 왜곡된 기복신앙을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성숙을 확립'하지 못한 점, '돈과 권력 있는 자를 가난하고 약한 자보다 우대하였고, 교회의 자원을 사회정의 실현과 이웃을 섬기는 일에 바로 사용하지 못한' 점, 'IMF의 고통과 북한동포들의 굶주림, 세계 8억 인구의 기아 상태, 매년 1800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나눔과 섬김의 원리로 청빈의 삶을 힘써 살지 못한' 점 등을 회개하는 심정으로 스스로 고발하였다.

곽선희 목사를 주제강사로 초빙한 한목협
그런데 이러한 회개운동을 펼쳐가기 위하여 애쓰는 목회자 단체 수련회에서 곽선희 목사(소망교회)가 주제 강사로 '목회자 영성의 위기와 그 대안'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여 주목을 끌었다. 물론 곽 목사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고범서 박사의 주제강의도 있었다.

주최측의 의도는 교회 내의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공론의 장을 열어 가는데 있었다고 한다. 한국교회를 품어가면서 개혁의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는 한목협의 고뇌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어서 이해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한편 다양한 의견만 들려주고 판단은 각자에게 맡겨 버린다면 우려가 되는 상황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목협의 모든 활동이 어떻게 해서든지 1999년에 발표한 자기고발 정신과 일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볼 때 곽 목사의 강의내용을 들으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기독언론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그 내용을 비판적으로 성찰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비평의 목적이 감정적 비방이나 매도가 아니라 한국교회에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충정에 있음을 말해두고 싶다. 또한 본 비평은 곽선희 목사의 목회 전반에 대한 비평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료수집과 인터뷰 등의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작업은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곽 목사가 한목협 수련회에서 한 강의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한 강의에 집중함으로써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불균형이 있다면 후에 바로잡혀질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곽 목사는 현재 목회자들이 탈진상태에 있는 이유는 복음을 잃어버린 데 있다고 진단한다. 그 자체는 맞는 말이다. 문제는 곽 목사가 회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이다. 그래서 먼저 그가 강조하는 복음의 내용을 정리한 후 비판적으로 성찰해보고자 한다.

곽선희 목사가 강조한 복음
곽 목사는 고린도전서 2:1-5를 바울의 아덴에서의 선교실패(행 17:16-34)와 이어지는 고린도에서의 선교사역(행 18:1-11)과 관련지음으로써 이야기를 풀어간다.

"바울이 아덴에서 실패한 것은 순수한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철학적 방법을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알지 못하는 신'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겠노라고 하면서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것이 궤변인 이유는 '알지 못하는 신'이란 아덴 사람들이 혹시 수많은 신 중에 하나라도 빠뜨리면 노여움을 살 것을 두려워서 지어준 이름의 신인데 이렇게 무명용사 같은 존재가 참 하나님임을 알려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아덴에서 실패한 후 고린도에 이르러 탈진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복음도 못 전하고 먹고 살기는 하여야겠기에 장막 만드는 일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런 가운데 있다가 하나님의 격려의 음성을 듣고 겨우 순수한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정황에 적용을 한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영적으로 탈진하기 시작한 것은 설교에서 순수한 복음을 잊어버린 데 있다. 목회사회학적으로 보면 85%가 복음이 없다. 복음 대신 율법, 윤리, 철학,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자유주의자들의 문제점은 성경은 디지털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오래된 이야기임으로 신식이야기를 해야 하겠다고 하다가 교회를 망친 것이다. 즉 인권, 사회, 정치, 생태계 등의 이야기를 하다가 교회로서의 의미가 없어지고 복음이 빠져나간 것이다.

일본교회가 안 되는 이유도 우찌무라 간조 같은 사람들의 영향 아래서 "The Christ"를 전하지 않고 "a Christ"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빈민 속에 들어가는 삶, 병자들을 일생 돌보는 것, 인권을 강조하는 것은 마치 "한 그리스도를 본받아 내가 작은 그리스도가 되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리스도만이 "The Christ"이다.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낸 것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계시해주는 데 그 의미가 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무엇을 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누구인가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윤리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초대교회 기독교는 아니다.

카타콤 공동체가 훌륭했던 것은 그들이 예배당 짓고 세상에서 잘살려고 하지 않았고 조용히 더러운 세상에 물들지 않고 주님 앞으로 가려고 했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의 예수, 부활의 예수를 믿었던 것이다. 이렇게 목회를 할 때 교회는 자연히 부흥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곽 목사가 그렇게 강조하는 십자가의 복음이 갖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질문 시간에 한 목회자가 '장기 목회의 경우 늘 반복해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면 지겨워질 수 있다'는 고민을 털어놓자 곽 목사는 2년 전 노벨문학상을 탄 『예수의 제2복음』이라는 작품에 나온 이야기를 소개한다.

"예수님이 나사렛 근방을 지나가다 저녁 노을에 실족해서 발을 다쳤다. 치료를 위해 산기슭에 한 집에 들어가게 되는데 마침 막달라 마리아라는 창녀의 집이었다. 마리아가 당황하면서 자신이 창녀임을 밝히자 예수님은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라고 되묻는다. 예수님은 치료를 받고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하여 거기서 하루 밤을 보낸다.

그리고 몇 일 후 다시 들르게 된다.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정작하고 싶은 질문인 "아직도 창녀냐?"라는 말 대신 "요새 손님이 많으냐?"라고 물으셨다. 그러자 마리아는 "예수님, 여자는 참으로 존경하는 남자를 만나면 다시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고 답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오! 그러냐?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에 접하면서 사람들은 울면서 중생도 하고 변화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까지 복음이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느냐를 강조하는 것, 즉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곽선희 목사가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회복하여야 한다고 강조한 복음이다. 곽 목사는 자신이 바로 복음을 늘 전하기 때문에 자신과 소망교회 성도들은 너무나 행복하고 교회는 무럭무럭 성장하고 장로가 90명이지만 교회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그는 강력히 시사하였다. 이 복음을 과연 어떻게 평가하여야 할 것인가?

윤리를 제외한 복음은 값싼 복음
여기서 바울의 아덴 사역과 고전 2:1-5에 대한 곽 목사의 해석이 합당한가를 다룰 여백은 없다. 다만 그가 설정한 복음과 윤리의 관계가 과연 정당한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곽 목사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설교를 전혀 안 하는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일체 간과한다고 보지도 않는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만 잘 이야기 해주면 윤리는 자연히 따라온다는 점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체조경기에서처럼 균형감각을 잃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사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을 있는 그대로 품어주시고 비난자들로부터 그를 지켜 주셨지만 이어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따끔한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요 8:1-11).

윤리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에 대한 해결책이 늘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만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다양하고 달콤하게 이야기 해주다가 잊어버릴 만하면 가끔 가다 한 번씩 양념처럼 혹은 액세서리처럼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 회퍼가 말한 값싼 복음이다. 이렇게 값싼 복음에는 엄청난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삶에 진정한 변화가 없으면서도 심리적으로 아주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잘못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쁨에 기초한 교회성장은 허구일 뿐이다.

진정한 대안은 윤리가 은혜의 복음의 결과임을 강조하면서도 그에 못지 않게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로마서와 에베소서가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 두 서신 모두 전반부에서는 은혜와 믿음의 복음을 강조하고 후반부에서는 복음이 요구하는 윤리와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을 늘 듣기만 해도 자연히 삶이 변화된다고 할 것 같으면 윤리적 삶을 요구하는 성경의 매우 많은 부분은 불필요한 사족이 되 버리고 말 것이다.

윤리적 삶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잃지 않는다면 목회자가 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결코 성도들을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목회자 자신을 탈진시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목회자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주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하고 영적 씨름 가운데 윤리적 성장을 맛보게 함으로써 값싸고 피상적인 기쁨이 아닌 삶의 깊은 바닥 속에서 체험되어지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곽선희 목사가 말하는 복음이 값싼 복음이 될 수밖에 없는 더 심각한 이유는 인권, 빈곤, 정치, 생태계의 문제 등 사회윤리적 과제를 복음과는 무관한 자유주의 혹은 인본주의적 관심의 대상이라고 몰아 부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자유주의 신학이 사회윤리를 강조할 때 지나치게 복음을 정치화시키고 이데올로기화시키는 경향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점을 인정하는 것이 복음은 사회윤리와 무관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셔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새로운 삶은 사회윤리의 차원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윤리적 관계는 여러 대상들간의 직접적인 관계만 아니라 사회제도를 통한 간접적인 관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한 기업의 이사가 직원들을 아무리 인격적으로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싶어도 자유시장경제라는 제도에 의해 구조조정의 압력을 받으면 눈물을 머금고 해고를 시켜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해고를 하도록 강제함으로써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면(마 7:12) 도대체 그 제도가 기독교적 관점에서 올바른 것인지를 깊이 성찰해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옳지 않다면 그 시정을 위하여 정치적 행동도 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이를 가르쳐야 한다. 교회 강단에서 못 배우면 어디서 배운단 말인가?

실제로 성경에는 정치/경제제도에 대한 수많은 교훈들이 담겨져 있다. 대표적인 예만 든다면 안식년법과 희년법이다. 구약의 사회정의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 안에서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온전해진 것이다(마 5:17; 딤후 3:16).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알고 감사한다고 하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돌아보지 않는 삶을 산다면 그러한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기쁨 그리고 그들의 굉장한 예배는 모두 허구요 하나님을 참으로 슬프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은가(사 1:1-17; 렘 22:16; 마 25:31-46)?

자유주의자가 "a Christ"를 전했다고 한다면 곽 목사 역시 성경에 나타난 "The Christ"에 충실하지 못하고 또 다른 반쪽 짜리 "a Christ"를 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버려야 할 압구정동의 복음
그렇다면 곽선희 목사처럼 총명하고 능력있는 설교가가 어쩌다 값싼 복음을 강조하게 되었는가? 그의 강의에 은연중 드러나 있다. 그는 자신이 압구정동의 전형적인 현대인임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복음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그만 그들의 전형적인 세계관과 삶까지 수용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복음은 어느새 참된 그리스도의 옷을 벗고 압구정동의 전형적인 현대인의 옷을 입음으로써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값싼 복음이 되고 만 셈이다. 그렇게 교회가 성장했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다. 차라리 진정한 복음을 전하다 그들의 버림을 받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바람직한 일이요 진정한 행복일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목회자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을 왜 우리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성령의 바람이 불처럼 바람처럼 한국교회 위에 임하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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