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0년 생명평화선언'이 나오기까지

인류는 항상 더 나은 세계를 꿈꾸지만, 우리 시대를 물들인 색조가 밝지만은 않다. 시대의 정신은 과학 기술에 대한 맹신과 욕망의 문화에 심취하여 일그러지고, 세계적으로는 경제적 신자유주의와 정치 군사적 패권주의가 지배권을 쥐고 지구의 온 생명체를 위협하고 있다.

한국의 상황 역시 예외는 아니다. 특히 현 이명박 정부의 제반 정책은 거짓과 모순으로 가득 차, 그 정책 집행의 결과로 생겨나는 억울한 일들이 이루 셀 수도 없으며, 이로 인해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암울하다. 더구나 한국 사회의 책임 있는 주체로 성장한 한국교회는 이 시대적 타락을 아파하며 치유하려고 분투하기는커녕, 자기 생존을 향한 발걸음에 바빠져 그 신앙의 본성인 하나님나라의 희망을 배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역사는 시간의 덧없는 흐름에 뜻 없이 굴복하지는 않는다. 2010년은 한국사의 뜻을 묻기에 충분한 때였다. 2010년은 경술국치 100주년, 한국전쟁 60주년, 4ㆍ19혁명 50주년, 전태일 열사 분신 40주년, 5ㆍ18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 6ㆍ15남북공동선언 10주년. 그야말로 '민족이 걸어온 역사의 주요 고비들로부터 지혜를 얻어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켜야 할 과제'를 가진 해였다. 2010년 4월 3일에 발표된 '생명과 평화를 여는 2010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2010년 생명평화선언)은 한국 사회와 교회의 현주소를 묻고 그 시대적 과제에 답하려는 소중한 움직임이었다.

▲ '생명과 평화를 여는 2010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의 취지를 설명하는 기자회견.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2010년 생명평화선언'은 분명 한국교회의 소중한 전통을 잇는 사건이었다. 1973년 5월 20일 소수의 신학자들에 의해 발표된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이 민중신학이라는 한국의 신학을 태동시켰고,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이 한국 사회의 근원적 문제인 분단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표방했다면, '2010년 생명평화선언'은 이 두 선언의 정신을 이어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과제를 짊어지겠다는 그리스도인의 다짐이었다.

'2010년 생명평화선언'은 처음부터 '선언'만을 위해 준비되지는 않았다. 시대의 징조와 시국의 현실은 깨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미 울리고 있었고, 이 공감대는 여러 방향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작은 하나가 2009년 5월 29일에 있었던 '한국민중신학회 전국대회'였다. 민중신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던 도중, '진보신학연대'(가칭)를 결성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이 제안은 그 이름이 주는 뚜렷한 느낌과는 달리, '신학적' 연대를 넘어서 진보적인 신앙인들의 새로운 결집의 필요성을 꾀하는 것이었지만, 아직 조직 구성을 위한 구체적 제안이 되진 못했다. 따라서 실제적인 후속 조처가 없이 연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해 12월 28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제홀)에서, 한국민중신학회, 죽재서남동기념사업회, 민중 교회 목회자들의 연합 송년회가 열렸을 때, 다시 이 주제가 거론되어 새해의 활동을 준비하기로 하고, 이 일을 진행할 추진위원 10인을 선정했다.

새해가 되자마자 모임은 재빠르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진보신학연대'라는 구상을 곧장 실현하기에는 고려해야 할 점이 많다는 공감도 빠르게 자리 잡았다. 2010년 1월 7일 추진위원들의 첫 번째 모임에서, '진보신학연대'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다는 점, 따라서 일단은 '선언문'을 작성하여 발표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되, 이 작업을 토대로 그 후 연합 활동의 가능성을 모색하자는 방향으로 생각이 모아졌다. 따라서 추진위원회를 '선언문 초안 작성위원회'로 전환하고, 선언문을 작성한 다음 토론회를 거쳐 4월 중으로 발표하자는 전체 일정이 확정됐다.

2. 선언문 작성과 발표 과정

선언문은 약 두 달여의 기간 동안 20여 명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참여하여 수많은 모임과 이메일 교신을 통해 총 3차례의 주요 수정을 거친 산고 끝에 탄생했다. 그 과정에서 종합적인 의견 수렴과 합리적인 토론, 그리고 헌신적인 참여라는 세 요소가 어우러지며 '2010년 생명평화선언'이 만들어졌다.

선언문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기까지 크게 보면 네 주제가 거론되었다. 첫째, 선언문의 기본 내용을 신학 선언으로 할 것인가, 신앙 선언으로 할 것인가? 둘째, 선언의 방향을 대외적인 시국 선언으로 할 것인가, 대내적인 고백 문서로 할 것인가? 셋째, 그 참가 범위를 에큐메니컬 진영만을 염두에 둘 것인가, 교회 개혁의 기치를 들고 있는 복음주의권과의 연대까지 고려할 것인가? 넷째, 그 형식과 분량에서 일회적인 선언으로서의 간결성을 살릴 것인가, 교회에서의 지속적인 교육 자료로 삼을 수 있도록 서술성을 강화할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은 선언문 작성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았고, 또 타당한 협의를 최대한 거쳐 완성시키자는 기본 취지가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2010년 생명평화선언'은 신학 선언보다는 신앙 선언으로, 시국 비판보다는 고백과 다짐으로, 폭넓은 연대를 가능케 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다듬어져 갔다. 그리고 선언은 선언답게 하고, 교육에 필요한 추가 자료는 미래의 과제로 넘겼다.

그 경과를 살펴보면, 1월 7일 회의에서 '선언문 초안 작성 위원회'에 참여할 20여 명의 신학자와 목회자가 거명되었다. 그리고 1월 14일에 열린 첫 회의에서 1차 초안 작성 방향과 방법에 대한 토론을 거친 후, 4명의 1차 초안 집필자가 선정되어 문서 작업에 들어갔다. 1차 초안은 1) 시대의 징조 2) 한국교회의 참회 3) 현 상황에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고백 4) 생명 질서의 비전 5) 생명을 살리는 대안 6) 에큐메니컬 행동과 연대를 위한 제안이란 내용으로 작성되었다. 그리고 20여 명의 작성위원들에게 이메일로 보내져 검토를 받고 재수정된 후, 2월 11일 1차 초안 검토 회의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렸다. 22명이 참석(6명은 이메일로 의견을 보내 옴)한 이 회의에서, 1차 초안의 기본 내용에 대해서 공감하면서도 보다 대중적인 선언문이 되도록 수정하자고 합의되었다.

2차 초안의 집필자로는 9명이 선정되었다. 2월 16일, 2차 초안 작성을 위한 회의에서 1차 초안의 수정 방식을 확정짓고, 그 이후 10일 동안의 수정 및 첨가 작업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전문을 추가하고 1) 시대의 징조 2)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참회 3)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4) 생명과 평화로 가는 길 5) 생명과 평화를 위한 연대라는 2차 초안의 형식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완성된 2차 초안을 검토하기 위해 3월 8일 기독교회관에서 20여 명이 참석하여 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회에서 2차 초안의 내용에 첨부되어야 할 사항들이 이야기되었고, 이어진 모임에서 2차 초안이 신앙고백적인 형식으로 재편집될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최종 문서를 만들기 위해, 2차 초안 작성 위원에 3명이 추가되었다.

▲ '생명과 평화를 여는 2010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최종안을 만들기 위한 토론회 모임. ⓒ뉴스앤조이 백정훈
토론회 직후 2차 초안 편집 작업이 진행되었고, 3월 15일 최종안 채택을 위한 모임이 있었다. 발표일이 부활주일 전날인 4월 3일로 정해지고, 최종 문서는 1) 2010년 부활주일을 맞아 (전문) 2) 시대의 징조와 참회 3) 우리의 신앙고백, 다짐과 촉구 4) 생명과 평화를 위한 연대라는 현재의 형식으로 확정되었다.

'2010년 생명평화선언'의 최종 문서가 완성되자 이제 발표를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3월 22일에는 기독교회관에서 '선언문 발표를 위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선언 행사를 알리고, 선언 참가자들의 소통을 돕기 위해 온라인 카페도 개설되었다. 이 카페를 통해 해외에서도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기독교 신앙인들이 선언 소식을 듣고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지만, 모두 808명(62명의 해외 참가자, 4월 3일 이후 참가한 45명 포함)이 선언에 참여했다. 4월 3일 아침 두 개의 신문에 선언문의 내용과 참가자 명단이 전면 광고로 실렸고, 오후 2시에는 기독교회관에서 선포 예배가 열렸다. 그리고 선언문은 영문으로 번역되어 해외 교회에 알려졌다.

3. 선언문 발표 이후의 활동

선언문이 발표되고 나니, '어떻게 생명과 평화를 열어갈 수 있는가?' 하는 보다 중요한 과제가 남게 되었다. 선언문 작성과 발표 과정에서 모아진 소중한 흐름을 이어 갈 실제적인 문제가 떠오른 것이다. 따라서 '2010년 생명평화선언'의 정신을 이어 갈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선포 예배를 마친 후 긴급 토론회를 가졌다. 여기서 많은 제안이 나왔고, 그 제안을 구체화시켜 실행할 주체로 실행위원회(7인)를 구성했다. 4월 29일 첫 번째 실행위원회는 첫 모임을 갖고, 선언에 참가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선언위원회를 구성하고, 그것을 세 분과위원회(신학, 교회, 사회)로 세분하여 '선언'의 정신을 이어 갈 수 있는 활동을 모색했다.

선언 발표 이후 시급한 문제는 이 선언 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전체 선언위원들의 지혜를 모으는 것이었다. 따라서 5월 23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선언위원 1차 대회'를 열었다. 40여 명이 모인 이 대회에서는 권진관 성공회대 교수가 '2010년 선언의 의의와 과제 : 교회 어디까지 변화해야 하나?'란 발제를, 양재성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이 '생명과 평화를 여는 2010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확산을 위한 제언'을 발제했고 진지한 토론이 있었다. 토론의 핵심은 기독교 진보 진영의 연합 운동에 대한 공감대가 무르익었지만, 그 주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1차 선언위원 대회를 거치면서 분명해진 것은 '2010년 생명평화선언' 운동이 '선언'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4월 3일 선포 예배 이후에 가진 토론회와 1차 선언위원 대회가 있기 전까지는, 선언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다시 말해 A4 8장으로 만들어진 선언문의 내용을 세분화해서 각계각층에서 선언을 이어 발표하고, 또 1차 선언에 미처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이 2, 3차 선언에 참여할 수 있도록 알리는 일에 주로 관심했다. 그러나 선언위원 1차 대회를 마치고 나서부터는, 선언 확대라는 기존의 관심이 선언 정신의 실질적인 계승 작업으로 변화되어 갔다.

선언위원 1차 대회 이후의 활동은 선언위원회를 강화해서 부문별로 일을 벌여 나갈 수 있는 구상을 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교단별, 부문별로 선언위원을 보다 정밀하게 구성하고 개인 메일을 통해 참여 의사를 묻고 결속력을 키우는 과정을 거쳤다. 이로써 총 115명의 선언위원(신학자 24명, 지역 교회 목회자와 기독교 활동가 63명, 자문위원 28명)이 확정되었고, 6월 24일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50여 명의 선언위원이 모여, '생명·평화의 기독교 운동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선언위원 2차 대회'를 열었다.

발제는 김영철 박사(새민족교회 목사)가 맡았고, 논평은 이정배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정진우 목사(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상임의장), 최상석 신부(성공회환경연대 사무국장)가 맡았다. 하루 종일 진행된 이 대회의 오후 순서는 분과별로 모여서 생명평화신학, 생명평화교회, 생명평화선교를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였다. 이 대회 이후 각 분과별로 3명씩 선출하여 실행위원을 확충하고, 총 16명의 실행위원이 '2010년 생명평화선언'의 정신을 구현할 방향을 검토해 갔다.

교회의 행사와 대학의 방학으로 긴 여름 휴지기를 거치는 동안, 실행위원회는 여러 차례 모여서 진로를 모색했다. 그러나 실제적인 행사를 다각적으로 벌여 나가기에는 아직 힘과 준비가 모자랐다. 4월 3일 '2010년 생명평화선언' 발표 이후 6개월 동안은 대외적으로 두드러진 활동이 많지 않았지만, 그 목표가 점점 분명해지는 방향으로 흘러갔던 것만은 틀림없다. 10월 25일, 종교개혁 주일을 앞두고 개최한 '생명평화 심포지엄 : 한국교회와 종교개혁'은 이 운동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오랜 모색이 확연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행사였다.

심포지엄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졌다. 먼저 '2010년 생명평화선언문' 1차 초안의 전체적인 기초를 제시했던 김용복 박사(아시아태평양대학원대학교 원장)가 '새 시대에 새 신학 : 생명평화의 신앙고백을 위한 신학적 전개'란 주제로 기조 강연을 했다. 이어서 생명평화신학, 생명평화교회, 생명평화선교에 대한 발제와 논평, 토론이 이어졌다.

권진관 교수(성공회대학교)의 ''오직 신앙만으로'의 내용은 생명평화'라는 발제에 김준우 박사(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가 논평했고, 이원돈 목사(부천 새롬교회)의 '교회의 새로운 생태계로서 생명평화교회'라는 발제에 김경호 목사(들꽃향린교회)가 논평했고, 윤인중 목사(인천평화교회)의 '기독교 생명평화운동의 선교론 수립을 위하여'라는 발제에 이은선 교수(세종대학교)의 논평이 있었다. 마지막에 가진 전체 토론은 매우 진지하고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다. 이 토론에서 '2010년 생명평화선언' 운동이 어디까지 왔으며,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가 분명해졌다.

▲ 지난해 12월 14일에 열린 <2010년 생명평화선언> 활동 평가 및 친목의 밤 행사. ⓒ뉴스앤조이 이용준
심포지엄의 전체 토론에서 정해진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2010년 생명평화선언' 운동을 해 오던 팀이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보다는, 에큐메니컬 진영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갱신과 사회 선교적 과제를 감당할 수 있는 그룹들을 포괄적으로 네트워킹해 나가는 일에 주력하자는 점. 둘째, '생명평화'의 기독교적 의제를 발굴하고 이 의제가 한국교회에서 활발하게 토론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활동을 하자는 점. 셋째, 활동을 효과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사무국을 만들자는 것이다.

심포지엄 후 '2010년 생명평화선언' 운동은 정책위원회를 신설하여 압축적인 논의 구조를 만든 다음 사무국을 꾸리고, 새롭게 전환하고 있는 이 운동을 이어 가기 위해 '생명평화마당'이란 새 이름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12월 28일 기독교 사회 선교 운동을 해 온 제 단체들, 신학 모임들과 함께 연합 송년회를 갖고 2010년을 정리하며 새해 계획을 발표한다.

4. '2010년 생명평화선언' 활동의 계승과 과제

2010년 4월 3일에 발표된 '2010년 생명평화선언'과 그 후속 활동은 한국 개신교 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상황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에큐메니컬 진영이 대내외적인 절실한 요청에 응답하여 자발적인 연합 운동을 시도했다는 점에 있다. 70~80년대의 민주화와 인권 운동에서 개신교 진보 진영이 했던 사회적·교회적 역할은 그 후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되던 시기에 점차 시들어 갔다.

그런 동안 세계는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소비 문명의 범람으로 인해 무수한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이에 편승하여 더욱 타락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기독교 진보 진영 역시 그 진보의 미덕인 예언자적 비판과 미래적 가치의 창조를 힘 있게 전개하지 못했다. '과연 생명과 평화라는 시대적 가치를 널리 키워 가는 일을 준비하고 있는가?', '개신교 진보 진영의 효율적인 연대와 미래를 위한 투자가 이뤄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은 외부를 향한 비판이 아니라, '2010년 생명평화선언' 운동에 참여해 온 사람들의 내부적 성찰이었다. 이 성찰이 공감대를 불러일으켜 자발적인 연합 운동을 모색하게 한 동력이 되었다.

분명 2010년 1년 동안의 활동은 이 연합 운동의 미래적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실험이었다. 지역 교회 목회자와 기독교 사회 선교 활동가, 그리고 신학자들이 함께 모여서 생명평화신학, 생명평화교회, 생명평화선교라는 공통의 방향을 세우기 위해서 머리를 맞댔다. 신학교의 목사 후보생들도 이에 호응하여, 11월 25일에는 감신대, 한신대, 성공회대가 연합하여 '2010년 생명평화선언' 운동을 주제로 학술제를 열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회·교회 운동은 그 운동을 뒷받침할 조직체를 필요로 한다. '2010년 생명평화선언'의 정신을 이어받은 '생명평화마당' 역시 종국에는 그럴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 운동은 '실험'이요, 그렇기 때문에 조직으로 곧장 도약해야만 하는 조급함이 있을 필요는 없으며, 그렇다고 그 실험을 성공시킬 공감대가 미력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실험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실행하는 것이요, 그 생명체가 살아 있는 한 실험은 계속될 것이고, 실험의 결과는 그 생명체의 힘으로 쌓이기 마련이다.

2011년을 맞아 '생명평화마당'은 크게 세 가지 활동을 벌이려고 계획하고 있다.

첫째, 그 이름과 동일한 '생명평화마당'을 상설하기로 했다. 매월 둘째 주 화요일 저녁 7~9시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서대문)에서 기독교 생명평화운동의 주요 의제를 놓고 토론한다는 계획이다. 첫 모임인 2월 8일에는 '생명평화마당을 출범하며 : 생명평화신앙을 통한 기독교의 정체성 재확립'이라는 주제로 열린다. (발제: 김경재 목사, 논평: 김준우 박사, 조석민 박사) 3월 8일의 주제는 '장로 이명박 정권에 대한 기독교의 교회적, 성서적, 신학적 평가'다. (발제: 조헌정 목사, 김근주 교수, 강원돈 교수)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온라인 방송도 준비하고 있다.

둘째, '생명평화신학'을 확립하기 위해서 한국적 신학으로 불릴 수 있는 민중신학과 토착화신학 그룹의 신학자들이 공동 연구진을 구성하고 있다. 일단 2013년 10월 3일~12일로 예정되어 있는 WCC 10차 총회(부산)에 맞춰 2011년과 2012년 2년 동안 준비, 2013년 해외의 신학자들과 함께 학술 대회를 열 계획이다. '생명평화마당'이 건실하게 자리 잡아 갈수록, 이 신학 모임은 그 이후에도 기독교 생명평화운동의 신학적 공급 기지로서의 역할을 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한국의 교회가 '생명평화교회'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생명평화교회'가 될 것을 표방하는 건강한 교회가 연대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안에 대해서도 검토하고자 한다. 개 교회 사이의 경쟁과 범 교단적 교권 투쟁으로 얼룩진 한국교회가 갱신할 수 있기를 열망하는 수많은 깨어 있는 신앙인들이 이 흐름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과 평화의 주 하나님, 이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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