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이 목자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올라간 뒤에, 목자들이 서로 말하기를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바, 일어난 그 일을 봅시다"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급히 달려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냈다. 그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이 아기에 관하여 자기들이 들은 말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눅2: 15-17)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에 가보면 화환이 즐비한 집이 있습니다. 화환에 달린 리본에는 무슨 회장 이사 국회의원 등등 사회적으로 돈과 권력을 지닌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게 마련입니다. 사실 그 화환은 당사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그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즐비하게 늘어선 화환의 이름을 유심히 살펴봐 주는 게 그 의식에 초대된 사람들의 예의(?)이기도 합니다.
- 거참 대단한 집안이군.

화환에 적힌 이름들의 면모를 살피며 그 집안을 칭찬해주고, 덩달아 그 곳에 초대된 자신도 역시 그 부류와 어울리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는 자족감에 젖어드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심리 구조입니다. 자신이 놀고 있는 물이 이 정도로 좋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선전함으로써 나라는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고픈 것이겠지요.

그러다 보니 사회적으로 세력 있는 사람과 친분이 있다는 것은 그대로 또 하나의 권력이 되고 맙니다. 돌발적인 위기 상황이 전개되었을 때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맞물려, 사회적으로 특별한 혜택을 차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력자와의 친분' 이라는 사적인 관계는 사회적 권력으로 부풀려집니다.

기쁨을 나누는 잔치나 슬픔을 함께 하는 자리에 많은 사람이 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인간의 도리로 일을 함께 나눈다는 것 그 자체는 흠 없는 일이겠지만, 인간사에서는 항상 순수함만으로 머무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의 사회적 수준이 어떤가를 저울질하며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인간의 심리적 행태는 결국 '함께 나눔'이라는 미덕을 '축재의 수단'으로 변질시켜 버립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려는 미덕을 빙자해, 자신의 경제적 수익을 도모하고 훗날 유용하게 써먹기 위한 친분 형성을 기도하는 인간의 약싹 빠름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 자신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찾아오는 것은 그다지 썩 마음 내키는 일이 아닙니다. 오더라도 친한 척 떠벌이며 머물지 말고 빨리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은근한 심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신 후 그를 방문한 사람들은 목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흔한 직업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흔하다는 말이 지닌 의미는 별달리 주목할 만한 점이 없는 직업들 중 하나라는 얘깁니다. 게 중에는 자기의 양을 지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남의 집살이 하며 양치기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찾아간 천사 가브리엘은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요? 적어도 세상의 구주가 나신 것을 축하하러 가도록 선택된 사람이라면 격에 맞는 신분과 지식과 세련됨을 갖춘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다 못해 그 동네의 회당장이나 랍비라도 깨웠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그 지역 들판에서 밤새 양을 지키던 목자들에게 찾아가 예수의 탄생을 알리고 축하 손님으로 그들을 초대합니다. 물론 그 당시 밤중에 깨어있는 사람들이 목자들말고는 달리 없을 듯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마리아나 요셉의 사회적 신분이 목자들 수준에 해당한다고 봐서 그리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을 통하여 이 땅에 태어났지만, 그는 이 세상의 구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혈통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마태복음에 기술되었듯이 동방박사들이 머나먼 길을 여행하여 만나러 올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귀하고 중요한 자리일수록 그만큼 사회적 위세가 높은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초대장이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병원 특실에는 돈 많은 사람이 들게 마련이고, 공항 귀빈실은 권력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게 마련이고, 정치권력자의 생일 잔치에는 그만한 세력자들이 모이게 마련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예수의 탄생은 정말 별 볼일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탄생을 축하하러온 사람들이 그저 그런 직업의 사람들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세련된 언행이나 현학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권력자도 아니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벌어들인 한창 뜨는 사업가도 아니었습니다. 들판에서 양 치던 모습 그대로 찾아온 그야말로 요즘 식으로 하자면 보따리 싸들고 상경한 시골노인네 수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초대된 사람들의 면모로 봐서는 예수의 탄생이 별 볼일 없는 사건이며, 예수라는 인물 역시 그러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세상에서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에서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이것이 중요한 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명성이 하나님의 잔치에 초대 받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교회에서는 돈과 지식과 권력 있는 사람들이 장로로 높임을 받고 목사들의 거래 대상이 되고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젠 교회에서도 헌금 많이 내는 사람이 대접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세상 권력의 핵심에 가까운 자리에 있는 인물들이 자기 교회 교인임을 은근히 자랑하는 목사들도 많습니다. 주의 종(?)께 음으로 양으로 촌지도 챙겨드리고, 갖가지 문화적 소비를 누릴 기회를 제공하는 집사들이 신앙도 좋아 보이는 세태가 형성되었습니다. 큰 교회 목사 정도 되면 무슨 승용차 몰고 다녀야 쪽팔리지 않는다는 수준도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화려하고 값비싼 치장으로 장식한 멋진 교회가 즐비합니다. 일류 호텔 못지 않은 수준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야 한다고 외치는 목사도 있습니다. 자기들 사는 집보다 못한 교회를 보고도 가슴 깊이 회개하지 않는 자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는 선언도 합니다. 순진한 성도들은 아멘하며 이제껏 자기 집에만 신경 쓰고 예배당을 돌아보지 않은 자신을 자책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나신 곳은 구유였습니다. 화려한 호텔도 아니고 안락한 침대도 아니었습니다. 좋은 시설의 예배당은 하나님께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곳에 드나드는 인간들의 허영심과 소비욕구를 채워 줄 뿐입니다.

예수를 찾아온 사람들은 목자들이었습니다. 유명인사나 권력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국회의원이니 재벌회장이니 교수니  판, 검사니 하는 간판은 하나님께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화려한 경력의 인물들이 찾아오는 것을 반기는 것은 세상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빚은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의 잔치에는 누구 초대되었습니까? 진정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이웃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도 거기에 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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