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우리 나라가 이탈리아와 월드컵 16강전을 하는 날, 집으로 오는데 길이 너무 막혔다. 이 멋진 경기를 못 보고 차 안에서 라디오만 들을 생각을 하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끝에 경부고속도로로 접어들어 '만남의 광장'으로 갔다. 거기에는 멀티스크린 대형 텔레비전이 있었고, 벌써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모여 있었다.

이렇게 우연하게 사람들과 어울려 경기를 보게 되었는데, 집에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 대고 환호를 하니까, 나도 모르게 같이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우리가 안타깝게도 1:0으로 지고 있다가 후반 막판에 가서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리고 연장전 막판에 가서 역전골까지 터뜨리자 다들 펄쩍 펄쩍 뛰며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나도 그들과 하나가 되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구호를 외치고 어린아이처럼 기뻐 뛰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서울 시내가 온통 기쁨의 물결로 출렁이는 듯했다. 신호대기를 하는 동안에는 사람들은 차창을 내리고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아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을 외쳤다. 나도 그들과 하나가 되어 아무 생각 없이 기쁨에 나를 맡기고 혼자 웃기도 하고 손을 흔들기도 하였다.

흔히 사람들은, 우리나라 선수들이 유럽 선수들에 비해서 체력과 골 결정력이 떨어진다는 평을 하곤 했다. 김치 먹고 뛰는 우리 선수들이 어떻게 고기 먹고 뛰는 유럽 선수들을 따라가겠느냐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모두 착각이었다. 그들은 유럽 선수들보다 월등한 체력을 보여 주었고 기술도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한국 선수들은 안돼’ 하는 식의 숙명론을 깨뜨리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 우리에게도 이런 힘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시원하게 보여 준 것이 참 좋았다.

또 그들을 응원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전에 보지 못한 자신들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기뻐하고 환호하는 그 신명난 모습, 이전보다 더 열린 사람들이 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 된 듯한 느낌,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잡고 싶고 얼싸안고 싶을 정도로 정겨운 느낌, 그런 것은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16강이니 8강이니 하는 것보다도 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이런 아름다운 것들을 새롭게 확인하고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 자긍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이전보다 더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자긍심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은 자꾸만 자기를 비하하고 학대하는 데 익숙하다.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 선수들이 그렇게 잘해서 당당하게 지금 이 글을 쓰는 현재 8강에 진출했다. 특히 FIFA 랭킹 세계 5위인 포르투갈을 이기고 6위인 이탈리아마저 꺾었는데도 아직도 우리 가운데는 그것이 홈팀의 어드벤티지이거나 심판의 불공정한 판정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40위인 한국이 감히 그런 팀들을 이긴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저 미국과 폴란드를 제물로 삼아서 조 2위로라도 16강에 진출하자고 했는데 조 1위일 뿐 아니라 막강한 이탈리아까지 꺾었으니 놀랄 만하기는 하다. 하지만 패배한 포르투갈과 이탈리아의 언론만 제외하고는 세계 언론들이 다들 심판의 판정이 공정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어느 기자가 포르투칼 팀에게 한국팀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개막 바로 직전에 한국에 도착한 감독조차 한국에 대해 데이타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그들은 오만하고 준비가 부족해서 진 것이다. 이탈리아는 예선도 겨우 통과하고 조 2위로 올라왔을 뿐 아니라 남들이 ‘더티 싸커’라고 비난할 정도로 깔끔하지 못한 경기를 보였다. 더욱이 한 골을 먼저 넣고 나서 그것을 지키기에 급급하다가 정신력과 투지로 똘똘 뭉친 한국에게 패한 것이다.

평가전에서 한국 선수들이 선전했을 때 어느 해설자가 ‘우리가 너무 겸손한 거 아니에요? 8강도 욕심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정말 우리는 당당한 실력으로 8강까지 왔다. 이제 4강, 아니 우승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고 세계가 먼저 이야기한다. 지금의 이런 결과가 어떻게 우연이거나 행운이거나 심판의 불공정한 판정 때문이겠는가.

한국 선수들에게서 이런 가능성을 보고 그들을 믿고 훈련한 히딩크에게서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한국 선수는 안 된다고 생각할 때, 그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저력이 있다고 믿고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한국 선수들에게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끌어내었다. 그들 안에 있는 힘과 능력을 드러나게 하였다. 그런 점에서 그는 명장이다.

예수를 따르던 갈릴리 사람들 가운데는, 지배자들의 횡포와 경제적 궁핍,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의 억압으로 풀이 죽고 기가 죽고 또 병든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어떤 희망적인 것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롯한 종교지배체제는 그런 사람들을 죄인으로 매도하고 멸시하여 그들이 더욱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긍정하고 격려하면서 그들 속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끌어내려고 하였다.

나면서부터 눈이 멀어서 평생 배우지도 못하고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던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죄인 취급을 하였다. 예수의 제자들마저도 그가 그렇게 된 것이 그 자신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인지 예수께 물었을 정도다. 그러나 예수는 그가 그렇게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그에게서 나타나기 위함이라고 함으로써, 그를 한없이 긍정해 주었다(요 9:3).

그는 이제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들이 일어나는 현장이요 장본인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불행에서 그저 무슨 죄를 찾기에 급급했지만, 예수는 그의 불행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일을 보았다. 그 사람 속에서 피어날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다.

예수의 눈은 정확했다. 예수의 이러한 긍정과 사랑 속에서 그는 눈을 떴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우리는 비굴하거나 주눅든 죄인이나 걸인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늘 길가에서 구걸하던 그의 모습만 보아 온 사람들은 그가 눈을 뜨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 사람이 맞다 아니다 하고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그 때 그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하고 자기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에게 예수를 죄인이라고 인정하라고 협박하였지만,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고 당당하게 말하였다. 존재도 없는 자로 여겨지던 그가 이제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참 모습이다.

사람들에게는 그가 길가에서 구걸을 하며 평생을 살아도 마땅한 죄인으로 보였지만, 예수의 눈에는 그렇게 당당하고 아름다운 그의 참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어디 이런 이야기가 이것뿐이겠는가. 열두 해 동안 혈루증 앓는 여인이 고침을 받은 이야기, 간질병 걸린 아이가 아버지의 믿음으로 고침받는 이야기,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고 그 딸을 고쳐 준 이야기 등등 수도 없이 많다. 예수의 기적은 이런 방식으로 일어난다. 그들 자신들의 의지와 확신과 믿음을 문제 삼고, 그들 자신들 속에 있는 능력을 한 없이 긍정해 주고, 그들 자신들이 기죽거나 주눅들지 않고 자기들 속에 있는 아름답고 힘있는 것들을 드러내도록 돕는다.

예수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왔으며, 이 일을 하되 십자가를 지기까지 철저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인 것으로 낙인 찍는 것을 겸손이나 신앙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우리가 자신들을 긍정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셨다. 섣불리 우리 육체를 부정하고 죄악 덩어리 취급을 해선 안 된다. 육체를 죄된 것으로 보고 영혼을 영원한 것으로 보는 사고는 그리스의 이원론적 사고일 뿐이다. 예수는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지 않은 온전한 이 몸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구원받게 하려고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셨다. 그렇게 해서 얻은 소중한 몸을 죄된 육체로 비하하는 것은 자학이지 겸손도 신앙도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저 초월적인 세계에서 사람들을 감시하면서 내려다보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예수는 자신의 존재 속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확신했다. 빌립이 예수께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였을 때, 예수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였다(요 14:8-9).

유대 사람들은 이것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천한 인간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했을 때, 그들은 예수를 돌로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예수는, “너희의 율법에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였다’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신이라고 하셨다”고 대답한다(요 10:34). 이 얼마나 파격적인 말인가. 예수는 시편 82:6을 인용해가면서 그들의 논리를 반박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격하시키는 분이 아니라, 높이고 긍정해 주는 분임을 밝히고 있다.

예수는 고난을 앞두고 성령에 대해서 가르치셨는데, 성령은 바로 이 예수의 일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하도록 도와주고 가르쳐 주는 분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해 주시는 분이다. 그러니까 성령의 임재 가운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제는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의 삶에서 나타나신 것처럼, 이제는 성령받은 신자들의 삶에서 부활의 예수가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는 신자들의 역할이 스승보다 못한 제자처럼 스승의 흉내나 내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처럼, 예수가 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요 14:12). 이렇게까지 신자들을 긍정해 주면서 예수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선언을 한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요 14:20).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예수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사실이나,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맨 마지막에 나오는, ‘그리스도께서 신자들 안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충 이해하고 넘어간다. 그러나 바로 이 구절에 전체의 핵심이 있다. 예수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 두고, 앞으로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할 때 일어날 일 가운데 가장 감동적이고 놀랍고 은혜로운 사실을 알려 주신 것이다. 그것은 신자들이 자신들의 삶 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존을 경험하는 것이다. 보혜사 성령은 바로 이 사건을 일으키는 분이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몸을, 성령을 모시고 있는, “성령의 성전”이라고 하였다(고전 6:19).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긍정하고 우리 속에서 아름답고 힘있는 것들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자만도 교만도 아니다. 우리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느끼고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는 것은 주님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불경건하게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에서 증거하는 바 예수의 약속이며,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서구신학 전통을 따라서, 자기 자신들을 원죄의 유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죄 많은 존재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자신들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악의 육체 덩어리라고 한없이 낮추기 때문에, 이 천한 육체에 예수께서 임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혹 이해한다면, 우리의 육체를 부정하고 예수가 임한다는 식으로 한다. 우리는 껍데기이고 예수는 알맹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의 이원론이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죄악 가운데 빠지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높이지 않고 자기를 겸허하게 낮추지 않아서가 아니다. 자기가 이렇게 중요한 존재인 줄을 몰라서이다. 자기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아무렇게나 굴리니까 죄악에 쉽게 빠지는 것이고 쉽게 절망하고 죄책감과 우울함에 빠져서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런 자긍심과 가능성을 우리가 충분히 알고 교회에서는 그런 것으로 사람들을 무장시켜 자신이 한없이 소중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내 속에서 우러나는 기쁨과 내 속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게 도와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내 속에 현존하심을 삶속에서 느끼며 살도록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이니 부모된 심정에서 생각해 보면 주님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식들이 우리 앞에서 당당하고 자신을 긍정하면서 ‘할 수 있어요’, ‘부모님 저를 세상에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행복해요’, ‘자신감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게 좋지 않은가. 반대로 ‘죄송해요’, ‘죄를 지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부모님만 의지할게요’, ‘저는 혼자서는 못해요, 언제까지나 부모님이 도와주셔야 해요’, 이렇게 말하는 자식이 좋은가? 분명히 전자를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그런 분이라는 생각은 왜 못하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고 늘 두려워하고 자책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우리 잘못을 일점일획도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두었다가, 나중에 죽으면 그 장부를 보고 심판을 하여 우리를 지옥이나 천당으로 보내는 염라대왕 같은 존재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염라대왕은 인간이 상상으로 그려낸 존재일 뿐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더욱이, 우리가 지옥가는 게 무서워서 신앙생활을 하고, 벌받는 게 두려워서 착하게 살려고 하고, 자선을 베풀고, 교회에 나온다면, 우리의 신앙은 아주 미숙한 단계가 아니겠는가.

우리 하나님이 산타클로스 수준인가. 무슨 장부를 가지고 일년 동안 착한 아이인지 못된 아이인지 기록해 두었다가 연말에 가서 착한 아이는 선물 많이 주고 못된 아이는 선물을 안 주는 그런 산타클로스인가. 나도 산타클로스를 해봤는데 그렇게 야박하게는 못했다. 아이들이 혹 잘못한 게 있어도 크리스마스 때만은 선물을 주고 싶어서 그딴 장부 다 집어치우고 작은 선물을 사서 숨겨두거나 그랬다.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보다 덜 너그러우시겠는가. 하나님이 산타클로스 수준이시겠는가. 더구나 산타크로는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꾸며낸 이야기 아닌가. 왜 좋은 하나님을 우리가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규정해놓고 그리고 그 족쇄에 매여서 하나님 두려워하고 죄책감에 매여 살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또 다시 범죄에 빠져들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자기를 탓하고 하나님께 애원하는 이런 악순환에 빠지는가. 과연 이런 게 신앙인가. 과연 이런 게 믿음인가.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예수의 방식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예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한없이 긍정하고 우리 삶 속에서 성령의 현존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지옥갈 두려움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벌받지 않으려고 선행을 쌓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감격하고 그 기쁨에서 일하는 것이다. 예수와 우리의 관계는 태양과 달의 관계가 아니다. 예수는 우리가 예수의 일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는 이렇게 우리를 긍정해 주셨는데 어찌하여 우리가 그런 귀한 우리 자신을 비하하는가. 그것이야말로 예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며 죄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 월드컵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좋은 징표를 보여 주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될 수 있고, 남들을 향해서 마음을 열 수 있고, 의로운 일을 위해서 정열을 바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 주었다. 멋있고 선한 것들이 우리 속에 있음을 보여 주었다. 본래 이런 것을 드러내는 것이 예수가 한 일이고, 오늘날 교회가 계속해서 해야 할 일이다. 저렇게 감격하고 열광하고 기뻐하는 물결을 보면서, 우리는 교회의 역할을 돌아보아야 하겠다. 저들 가운데 저렇게 드러내고 싶은 것들이 가득한데, 그들 가운데는 드러내기만 하면 이렇게 아름답고 멋있고 신명나는 것들이 많은데, 우리 교회는 그런 것들이 꽃피고 드러나도록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가?

김재성 / 민들레성서마을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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