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 김승범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힘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넘어야 할 장벽이 너무나 높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힘을 어디서 구하느냐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 일하다 보면 안타까운 현실을 접하게 됩니다. 신앙의 내면성만을 강조하거나 기복적 성향이 있는 진영의 사람들은 정말 기도와 찬양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이른바 신앙의 통전성과 기독교적 세계관을 강조하면서 교회와 사회 개혁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진영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도와 찬양이 매우 약한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와 사회 개혁을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있다면, 개혁을 열망하는 이들이 신앙의 내면성만을 강조하고 기복 신앙에 젖어 있는 사람들보다 더 간절히 기도하고 뜨겁게 찬양하는 것이라고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기도와 찬양을 통해 기적적인 하나님의 힘을 얻어 거대한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악의 힘을 격파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우리 모두 이러한 확신을 간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소원 버리고 하나님 비전 좇는 바울(6∼10)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바울이 전하고 싶어했던 복음은 실천과 사회 참여를 외면하는 반쪽 복음이나 기복적인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실천을 동시에 강조하며(갈 5:6, 고전 13:2) 특히 가난한 이웃을 돕는 정의를 강조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온전한 복음이었습니다(갈 2:10, 고후 8∼9장). 그의 복음은 성·인종·학력·신분 등 모든 사회적 장벽을 허무는 복음이었습니다(갈 3:28). 그의 복음이 들어가면 가정과 사회 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혁될 수밖에 없는 복음이었습니다(엡 5:21∼6:9, 골 3:18∼4:1). 물론 그와 교회가 처한 정황의 한계 때문에 적극적인 사회·정치 운동을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때가 무르익으면 노예제도의 폐지에 이를 수밖에 없는 혁명적인 진리를 전파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복음을 우선 아시아에서 전하고 싶은 소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이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리저리 다른 지역들을 시도해봅니다. 부루기아와 갈라디아를 지나 무시아에 이르러 좀더 동쪽인 비두니아 지역으로 가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다시 예수님의 영이 허락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두니아를 포기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드로아로 내려갑니다. 이렇게 바울이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던 어느 날 밤, 하나님은 새로운 비전을 바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비전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 선 채로 간절하게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는 그의 모습은 힘들고 초라해 보였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 비전을 통해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마게도냐 지역으로 건너가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됩니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바로 마게도냐로 떠납니다.

여기에 바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소원을 버리고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개척의 경험이나 계획을 가져보았던 사람은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은 이른바 전망이 밝은 지역을 선택합니다. 고층 아파트가 새롭게 들어서는 지역이 제일 좋겠지요. 그러나 바울에게 중요했던 기준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작은 한 사람의 간절한 손짓에서 그는 선명한 하나님의 손을 본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것을 묻거나 계산하지 않고 그대로 돌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사람은 바로 이런 인물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품는 자기 소원은 대체적으로 그럴 듯합니다. 교회 개척과 성장을 비롯해 무언가 좋고 큰 일을 해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입니다. 나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욕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힘겨운 일에 헌신하거나 빈민촌이나 시골 등 어려운 지역에 가려는 사람들은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자기 소원을 비우고 하나님의 비전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울처럼 도움이 필요한 지극히 작은 한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놓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민감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박노해 시인의 '장엄한 소리'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밤중에 시골길을 걷는다/ 풀벌레 소리마저 끊기고/ 내 발소리 숨소리도 고요// 토옥 토옥 토옥/ 꽃씨 집이 터지는 소리// 매우 가냘프지만 분명한 소리// 하도 가냘퍼 짓눌려 버리기 쉽지만/ 너무나 분명해서 결코 잘못 들을 수 없는 소리// 세상의 작고 힘없는 사람들의/ 한숨 소리 울음 소리 분노의 소리'. 그 소리에서 하나님의 장엄한 소리를 꼭 들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비전 따라가다 곤경에 처한 바울과 실라(11∼24)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가는 길이 항상 고속도로처럼 널찍하고 편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혹은 시골 오솔길처럼 향기롭고 낭만적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지요. 바울도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도착한 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 루디아와 그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 후에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점을 잘 쳐서 자기 주인에게 큰돈을 벌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데도 성공합니다.

그런데 좋은 일은 여기서 멈추고 맙니다. 아니 그 좋은 일이 계기가 되어 바울과 실라는 엄청난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문제는 역시 돈이었습니다. 귀신이 나간 여인은 더 이상 점을 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인은 졸지에 큰 수입원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점을 보러 가고 싶은 사람들도 용한 점쟁이를 잃어 버렸으니 심리적으로도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주인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가지고는 상관에게 가서 교묘하게 고소합니다. 우선 그가 로마인이 아니고 유대인이라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은근히 인종주의적 정서를 자극합니다. 그리고 사회 질서를 깨뜨리는 자임을 강조함으로써 안정을 희구하는 대중적 정서에 호소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로마인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풍속을 전하는 도덕적으로 위험한 존재라고 고발합니다. 대중적 지지를 얻어내기에 충분한 객관적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듣고 있던 군중들도 일제히 일어나 한 목소리로 바울과 실라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할 치안관들도 군중들의 힘에 눌려 정당한 법적 절차도 생략한 채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를 치게 한 후 감옥에 처넣은 것입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돈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과 타락한 교회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부패한 사람들의 수입원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초대형교회 담임목사직 세습을 반대하면 왜 좌경 불순분자로,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될 적그리스도로 공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점치는 종의 주인은 바울과 실라를 고소하는데 자기 수입이 줄어든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처럼 세습을 찬성하는 사람들도 세습이 이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세습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대형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파괴하는 사람들이라고 공격합니다. 이렇게 해서 순진한 대중을 속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숨길 수 없는 사실은 그들은 엄청난 유·무형의 기득권이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가로막히는 것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악한 세상에서 약한 자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가다 보면 강력한 공격을 받아 엄청난 곤경에 빠질 수도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벽에 부딪힌다고 너무 당황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에게서 곤경을 벗어나는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기도와 찬양으로 기적 체험하는 바울과 실라(25∼34)

바울과 실라가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감옥 문이 활짝 열리고 죄수들을 묶어 놓았던 쇠사슬이 다 풀려 버렸습니다. 죄수들이 모두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고 했던 한 간수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함으로써 빌립보 사역은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위기가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악한 세상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대단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약한 자의 가냘픈 소리에서 하나님의 장엄한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의식 있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그럼에도 하나님의 기적을 열망하고 체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까?

기도와 찬양입니다. 그렇게 실컷 두들겨 맞고 감옥에 처박힌 밤! 얼마나 낙심천만이었겠습니까? 앞뒤가 캄캄해지지 않았을까요? 몸이 너무 아파서 아무리 잠을 청하려고 해도 잠을 이룰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 밤에 바울과 실라는 입술을 열어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슨 기도를 드렸을까요? 우선 캄캄한 밤 시야에서 멀어져만 가는 듯하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까요? "하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저희의 길은 막혀 있습니다. 당신께서 살려주시지 않으면 저희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당신만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이 자리에서 저희를 건져내 주소서!"

한국 교회와 사회 개혁을 열망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압제를 참다 참다 못해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위대한 해방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가 울며불며 매달리는 것을 병적으로 즐기시는 분이어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부서지고 깨어진 모습으로 간절히 부르짖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의 참 모습인 겸허함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웠던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시절 <성서조선>의 주간이었던 김교신 선생님을 제가 마음깊이 존경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헬라어로 신약 성경을 읽고 해석할 정도로 대단한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얀 눈이 수북히 쌓인 새벽에도 산기슭에 올라 부패한 교회와 나라를 잃은 민족을 생각하면서 하염없이 기도하고는 성령의 파도에 흔들려 다른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인하여 힘을 얻어 걸어오던 길, 그 외로운 길을 다시 걸어가던 분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참 인간으로서 이렇게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 것입니다. 우리도 그 기도의 길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과 실라는 이어서 찬양하였습니다. 무엇을 찬양하였을까요? 그들은 깊은 곤경 중에 기도하면서 고난의 주님을 다시 만났을 것 같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셨던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을까요?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그토록 외로운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어찌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자신들의 몸에 채워 가는 삶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그들은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골 1:24, 행 5:41). 이렇게 깊은 찬양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적으로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아마 현재 기독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것이라면 아마도 유명 찬양 사역자 혹은 기독인 아티스트가 등장하는 CCM 콘서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노래들이 과연 얼마나 빌립보 감옥에서 감동적으로 울려 퍼졌던 찬양을 닮았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현재의 CCM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이 넘치는 외로운 사명의 길을 가면서 뜨겁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찬양하는 법 배워야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열망하는 많은 분들이 힘의 부족을 느끼며 지쳐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난감함 속에 부딪혀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에게 예리한 비판력이나 신학적 지성이 그렇게 부족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운동 프로그램이 모자라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상황의 돌파구는 기도와 찬양의 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찬양이 더 이상 왜곡된 기복 신앙을 따르는 이들의 전유물이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목숨걸고 교회와 사회 개혁을 위해 하나님께 울부짖어야 합니다. 그리고 외로운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 뜨거운 가슴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몇 번 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응답해주실 때까지 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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