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신비한 별이 나타났을 때, 동방의 박사들은 그 별이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알려 주는 별임을 깨닫고 예물을 가지고 그 새로 태어난 왕에게 예를 갖추기 위하여 유대 땅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들은 별을 따라 오다가, 유대 땅으로 와서는 예루살렘 헤롯의 궁전으로 찾아갔다. 이들이 베들레헴으로 찾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찾아간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먼저 그 신비한 별이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라는 생각 때문이었고, 그렇다면 당연히 왕의 궁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결론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베들레헴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탄생하셨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뉠 곳이 없어서, 강보에 싸서 짐승들의 구유(여물통)에 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만일 예수님께서 왕궁에서 태어나셨다면, 수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베들레헴이란 조그마한 마을에서 가난한 집의 가정에서 태어나셨기에 아무도 그의 탄생을 주목해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짐승들의 여물통 속에 강보에 싸인 채 뉘었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많은 의미를 전달해 준다.

사람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것을 찾는다. 그래서 교회당도 멋지고 화려하게 짓는 것이 유행이다. 교회당만 멋있게 지어 놓으면 사람들은 그곳으로 몰려들지만, 볼품이 없는 교회를 향해서는 사람들이 찾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화려한 왕궁에서가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는 것은 화려한 것만을 추구하고 쫓아가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릴 만하다. 물론 멋지고 화려한 것은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정말 중요한 것을 망각해 버린 채, 겉모습의 화려함에만 치중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더 나아가 내 모습이 화려하지 못하고 남들보다 뛰어나지 못하다고 해서 주눅 들고 열등감에 빠질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화려한 곳을 찾아 그곳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과 같은 초라한 곳, 그리고 짐승들의 여물통에 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헤롯 대왕의 궁전처럼 화려하고, 헤롯 왕처럼 대단한 권력을 소유하고, 헤롯 왕 주변의 신하들처럼 뛰어나야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다. 아무 볼품없고, 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찾아오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왕들과 권력자들과 당대의 실력자들을 찾아다니신 것이 아니라, 당시에 멸시받고 천대받던 세리와 창기와 문둥병자들에게로 다가가셨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은 돈이 많은 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고 탁월한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찾으시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찾으시며, 눈물 흘리고 아파하는 사람들과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탄생할 것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사이즈로 따지고 번화한 것으로 따지자면, 베들레헴은 별 볼 일 없는 곳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바로 그곳에서 태어나시기 때문에, '결코 작지 않다'고 선언되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결코 작은 자들이 아니다. 온 우주의 주이시며 만유의 주이신 예수님을 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는 자들은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결코 작지 않다. 선언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가장 누추한 모습으로, 볼품없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탄생하기 700년 전의 예언인 이사야서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1~2)."

예수님의 탄생을 그리고 있는 성화를 보면,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다.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의 모습에, 아버지 요셉은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고, 목자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양들도 소들도 함께 축하하는 모습은 어쩌면 가장 평온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유의 그림에서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옛님께서 볼품없고 누추한 모습으로 왔다는 사실이다. 성냥팔이 소녀를 그린 그림은 소녀의 아름다움을 그려 내면서도 동시에 그 소녀가 얼마나 처량한 신세였는가를 그려 내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탄생의 모습은 아름다움을 그려 내면서도 동시에 누추한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내야 옳을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누추한 모습으로 볼품없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볼티모어 벧엘교회의 진용태 목사님의 이민 생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시카고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고 하는데, 동양인이라고 놀려 대고 영어를 잘 못한다고 놀려 대는 바람에 사춘기 시절에 친구들과 싸우고 온갖 말썽을 다 피웠다고 한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그러면 훌륭한 사람 못 된다" 해도, "학교에서 제적해 버리겠다"는 협박에도 전혀 뉘우침이 없이 속에서는 "I don’t care"만을 외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뉘우친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어머니를 보자고 해서, 약속한 날에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머니는 시카고의 추운 겨울 날 자기를 위하여 뾰족구두를 신고 버스에서 내려 학교로 총총총 걸어오는 그 모습을 보았고, 학교에 와서는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는 어머니를 보았다고 한다. 그런 장면 속에서, 그는 어머니가 나 때문에 이렇게 낮아지시고 잘못했다 비는 그 모습 때문에 다시는 말썽 피우지 않고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어쩌면 예수님은 바로 그런 우리의 모습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다. 잘못을 우리가 했고,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예수님은 마치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이 세상에 누추한 모습으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피 흘려 주셨다. 성탄의 계절에 우리가 보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은 빤짝거리는 화려함 속의 예수님이 아니라, 나 때문에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나약한 아기로 오신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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