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예수와 먼 기독교회, 유배당하신 하느님

초여름 한 낮에 지루하게 비가 내린다. 이 비 그치면 이곳 저곳에서 죽순들은 고개 뻣뻣이 쳐들고 돋아날 것이다. 어스름한 밤이 오면 붉은 네온의 십자가는 이곳 저곳에서 죽순처럼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고개 쳐들고 솟아날 것이다.

아, 나는 세상을 향해 호령하듯 도도하고 근엄하게 서 있는 저 붉은 네온의 십자가를 보노라면, 너무나 예수와 먼 기독교, 너무나 성서와 먼 교회의 모습을 본다.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고개 쳐들고 있는 저 붉은 네온의 십자가를 보노라면, 오늘 우리의 교회는 너무나 희랍적이며, 너무나 플라톤적이며, 너무나 영지주의적이며, 이원론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피도 눈물도 없는 로봇과 같은 하느님,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고 신성만 믿는 현대판 영지주의자들, 이것이냐 / 저것이냐는 관점에서 세상과 신앙을 보려는 근본주의적 이원론자들.

교회는 하느님을 당신이 만드신 세계로부터 하늘 저 높은 곳으로 유배시켰다. "하느님, 당신은 이 세상 일에 관여하지 마시고, 그저 하늘에 가만히 계셔서 우리가 요구할 때마다 은총의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시면 됩니다. 그게 하느님이 하실 일의 전부입니다." 이제 하느님은 세상과 아무 상관이 없게 되었고, 세상도 교회와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다.

가난하고 고통 당하는 우리의 이웃들, 제1세계국가로부터 여전히 빼앗기며 힘겹게 살아가는 제3세계국가의 어린이들, 무한경쟁 속에서 신성을 상실해 가는 가엾은 인간들, 끊임없이 인간으로부터 착취당해 상처투성이인 자연의 고통에 대하여, 하느님을 교회 건물 안에 감금시켜 놓고 자신들만 독점하려는 오늘의 교회는 아무 말도 그 어떤 일도 하려 하지 않는다.

교회가 저지른 가장 큰 죄는 내 안에 계시고, 만물 안에 계신 하느님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켜 저 하늘 위로 유배시킨 것이며, 그것이 곧 교회의 타락의 시작이 되었다. 과연 교회를 다시 살릴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창조영성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우리 시대의 영성신학자인 매튜 폭스(Matthew Fox)는 유배당한 하느님을 본래 자리로 회복시키고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방도를, 그의 저서 『영성 - 자비의 힘』(A Spirituality Named Compassion)을 통해 찾아보고자 했다.

자비는 종교가 아니라 삶의 길, 영성이다

폭스는 교회와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길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신성을 회복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눅 6:36)라고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며, 자비야말로 하느님의 속성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질은 자비이며, 그 자비를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예수가 종교인도, 신앙운동가도 아닌 것처럼, 자비도 종교가 아니라 삶의 길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의 첫 번째 책인 사도행전도 곳곳에서 기독교는 "그 길"(도(道))로 불렸다(행 9:2; 18:25; 19:9; 19:23; 22:4; 24:14; 24:22). 초대교회도 스스로를 일컬어 하나의 종교라고 하지 않고 하나의 길이라고 불렀다. 기독교회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예수의 길'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종교는 교리와 제도, 체제유지적이어서 영성의 필수 요소인 자비가 들어있을 틈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하느님의 속성인 자비를 종교가 아니라 삶의 길, 즉 영성이라고 말한다.

예수에게 나타난 자비는 종교가 아닌 삶의 길이다. 그러기에 자비는 감상주의가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고 긍휼을 실천하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 여인처럼 가까이 다가가서, 상처를 싸매고, 자기의 짐승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는 행위가 자비이다. 예수의 자비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주는 행위이며, 이러한 자비 행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행위이다. 그러기에 예수의 자비는 교회나 집 안에만 가둘 것이 아니라 삶의 길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폭스에게 있어서 진정한 명상이란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자비의 삶이며, 기도란 "삶에 대한 철저한 응답"인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에서 뛰어내려 사라의 원무로 축제를 벌이자

폭스는 서양의 남성 위주의 기독교 신비주의 안에서 '야곱의 사다리'가 주류를 이룸으로써 예수의 자비의 가르침이 설 자리를 잃었다고 보고 있다. 상승은 신적이고 하강은 악마적인 것이라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하는 '야곱의 사다리' 영성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올라가는 것을 최고의 명상으로 여김으로써 땅, 곧 이웃에게로 나가는 자비를 실천할 길을 원천적으로 기독교회에서 배제시키고 말았다.

폭스는 이러한 상승을 신봉하는 '야곱의 사다리'는 성서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이데아를 볼 때까지 더 높은 곳으로 올라 가야 한다고 믿었던 헬레니즘에서 유래했다고 보았다. 완전은 하늘 위에 있고, 영성은 위를 지향하는 것이며, 신앙은 위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몸과 대지, 양육과 돌봄, 어머니와 땅성을 배제하는 가부장적 제왕적 직선적 신앙구조를 낳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기독교회의 신앙은 '사다리 오르기'가 되었다. '사다리 오르기'의 기초는 경쟁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자연히 '경쟁의 신'이며, 신앙의 목적은 하늘에 오르는 것이다. 저들은 세상이 어떻게 되든 말든 동료 신앙인들과 무한 경쟁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고, 하늘에 오르기 위해 필사적인 전투적 신앙을 갖게 된다.

'야곱의 사다리'에 있어서 예배는 우러름으로 예배이다. 우러름으로서의 예배는 지주(支柱) 공경을 강화시켜 영웅들과 성인들, 성과 으뜸을 숭배하고 우러러 보게 하였다. 사다리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정의를 규정해 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의의 하느님은 심판의 하느님으로 변질되었다. 하느님은 지극히 높은 곳(사다리의 정상)에 군림함으로써 낮고 천한 곳에 오신 예수는 자연히 기독교 신앙에서 소멸되었다.

폭스는 이제 기독교 안에서 위를 향한 영성의 종말, 상승의 종말, 우러름의 종말, 지주 공경의 종말, 심판자 하느님의 종말을 고하고 성서에 입각한 상징, 곧 예수의 영성에 어울리는 '사라의 원무(圓舞)'를 말한다. 사라의 나이 구십 살에 얻은 이삭의 이름은 "하느님이 웃었다, 하느님이 친절을 베푸셨다"를 의미함으로 '사라의 원무'로 대표되는 영성은 웃음과 기쁨의 영성이다. 이 '사라의 원무'는 임신이 그녀의 웃음의 원인이 되었기에 낳음, 창조, 다산(多産)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사라는 웃음과 창조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야곱의 사다리 오르기는 하느님과 이웃은 물론이고 삶과 우주를 위/아래로 보는 방식이지만, '사라의 춤' 속에서 보면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거나 밖에 있게 된다. '야곱의 사다리'는 소수의 생존자나 승자들에 국한되어 있지만, 동그라미는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가난한 사람, 제3세계 어린이들, 장애인, 노인, 정신지체자까지도 환영한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이들은 자신들의 높은 지위를 지키기 위해 사다리를 성역화함으로써 위계적이고 난폭해질 수밖에 없는 반면에, 원무는 땅 위에서 이루어지고 서로의 눈과 눈을 마주보고 하기에 본질적으로 민주적이며 비폭력적이며 평등하다.

야곱의 사다리 오르기는 개인주의가 생존에 필요한 근본정신이어서 험담과 질투가 난무하지만, '사라의 원무'에서는 서로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에 '상호의존'이며, 환희와 축제가 있다. 사다리는 직선적이어서 인위적이지만, 사라의 원은 둥근 것, 굽은 것, 동그라미를 의미하여 본질적으로 굽은 우주와 둥근 지구에 부합됨으로 우주와 조화를 이룬다.

야곱의 사다리는 나/하느님, 너/나, 우리/하느님 사이의 거리를 전제함으로써 하느님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고 하는 유신론의 모티프와 일치하지만, 사라의 원은 하느님은 우리와 동떨어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곳에 전적으로 현존해 계시며, 하느님이 만물 안에 있고, 만물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만유내재신론'에 가깝다. 이는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다는 예수의 가르침에 의존해 있다.

사라의 원 안에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으며,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다"고 하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의 세계관은 사라의 원과 일맥상통한다.

성서는 예수께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사라의 원 안에 서 계심을 말해 주고 있다. 실제로 제자들로부터 그들 자신에게 알맞은 지위를 정해달라고 요청받았을 때, 예수는 사다리 오르기 관념을 완강히 거부하셨다(눅 14:7-11). 특히 예수의 최후의 만찬은 사라의 원과 같은 친밀감이 있었고,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고, 한 여인이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붓고 자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는 것은 원 안에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야곱의 사다리 오르기에서 사라의 원무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다리를 박차고 뛰어내리지 않는다면 교회는 자신과 세상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폭스는 교회가 '야곱의 사다리'라는 경쟁과 강박증과 이원론의 늪에서 벗어나 대지의 흙을 밟고 섬김과 나눔, 환희와 축제가 있으며 자비가 있는 사라의 춤을 추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십자가를 사다리로 인식하여 제국을 건설하는 무기로 사용했던 서양의 기독교 역사를 반성하고, 예수가 부활하신 후에 남아있는 원초적 자궁인 텅빈 무덤을 묵상하면서 안에서 밖으로 나감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는 진정한 부활에 참여하라고 말한다. 텅빈 무덤은 원초적 자궁이요, 여성의 몸을 상징하며 재생,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비가 너희와 교회와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에서 내려와 사라의 원무에 참여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일이다. 폭스는 말하기를 "자비는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추구해야 한다고 명령받은 신적 속성이다"라고 했다.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여라"는 예수의 말씀은 우리가 자비로운 사람이 됨으로써 영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비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속성이자 창조 에너지이다. 예수는 친히 자비를 요청해 오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셨고(마 9:27; 마 15:22; 막 9:22; 눅 18:38), 복음서 기자들은 이러한 예수의 자비와 그 분 안에 나타난 신적인 속성을 동일시했다. 예수는 신적이기 때문에 고통과 기쁨을 함께한 것이 아니라,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눈 자비가 있기 때문에 신적인 것이다. 예수는 바로 자비의 화신이며, 자비가 육신을 입어 역사적으로 된 분이기에 주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도 자비의 자녀,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에 참여하고 자비의 삶을 실천할 때에 비로소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한 것이며,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늘 너무 높은 곳에 있었던 기독교회는 야곱의 사다리에서 추락하고 있다. 어쩌면 추락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행복한 몰락'이다. 예수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교회가 추락했을 때 부드러운 대지가 따스하게 맞이할 것이며, 사라의 원, 원초적 자궁에서 다시 새 생명이 돋아날 것이다.

자비의 영성은 가장자리이다. 나무가 가장자리로 뿌리를 뻗듯이 기독교회도 가장자리로 손을 뻗어 가장자리를 교회의 중심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력과 성령이 나타나고 부활이 일어나며, 사다리에서 원으로, 기어오름에서 춤추기로, 통제에서 축제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물론이요, 역자 김순현 목사는 언제나 가장자리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중심이 되기를 포기하고 한반도의 맨 가장자리인 남해에서 목회하는 그는 교회의 가장자리에서 서서 이웃을 만나고, 사람의 가장자리에 서서 자연과 호흡하며 참된 자비의 영성을 회복하고 자비의 삶을 살아간다. 그에게서 나는 자비의 힘을 얻는다. 『영성 - 자비의 힘』(다산글방 / 매튜 폭스 저 / 김순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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