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선거를 통해 공의로운 지방정치의 기초를 다져감으로써 풀뿌리 민주주의는 더
욱 강화되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지역사회 구석구석 실현되어가는 놀라운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요즘 케이블 TV 지역방송을 틀면 지방선거 후보자들의 연설, 좌담 그리고 토론 프로그램이 많이 방송되고 있다. 한편 길거리에서는 지지 후보자들의 이름이 적힌 띠를 두른 선거운동원들이 열심히 후보자들의 이름을 외치며 깍듯이 절하는 모습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러나 모 언론에서 발표한 통계를 보면 꼭 지방선거에 투표하겠다고 대답한 사람은 50%도 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국민의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적 태도에 눌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월드컵에 가려 완전히 찬밥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지방정치의 성숙은 민주주의 심화의 기반

이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과 시민사회의 성숙을 위해 매우 우려가 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지방자치는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사회 깊숙이 뿌리내리는 데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중앙에 너무 집중되어 있을 때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국민의 손으로 뽑는다고 해도 진정으로 국민의 의사가 국정전반에 반영되는 것은 매우 힘들어진다. 권력이 지방으로 분산되고 지방정치와 행정이 지역주민의 감시권내에 들어오게 될 때 국민의 의사가 국정에 좀더 쉽게 반영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주민이 자신의 의사를 지방정치와 행정에 반영하는 연습을 하면서 민주시민으로서의 소양을 발전시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국가 전체의 민주주의가 단단해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방정치를 흔히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국에 형식적인 절차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 사실 바로 얼마 전 이야기이다. 7-80년대의 피에 젖은 투쟁이 없었다면 그나마 성취될 수가 없었다. 이제 민주주의가 심화됨으로써 실질적 민주주의가 이 땅 위에 꽃을 피우려면 지방자치제도의 건강한 성장이 필수적으로 요청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정치적 냉소주의와 월드컵에 눌려 지방선거가 형식적으로 치러지거나 단순히 올해 12월에 있을 대선의 전초전으로만 간주된다면 민주주의 심화의 길은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인류 역사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민주주의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매우 힘든 길을 걸어왔다. 13-14세기 인물인 단테는 『군주론』에서 가장 좋은 형태의 정부는 단일한 통치자를 세우고 필요한 모든 것을 미리 줌으로써 탐욕을 부릴만한 어떤 이유도 없게 할 때 가능해진다고 주장하면서 군주정치제도를 지지하였다. 그러한 군주야말로 통치를 위한 최선의 상태에 있고 그가 의지들의 일치를 가능케 함으로 왕국과 온 인류를 최상의 상태로 올려놓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루터나 칼빈이 최소한 간접적으로 대중적인 주권개념 정립에 공헌함으로 민주적 정치이념 형성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현재 이해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18세기의 존 웨슬리만 해도 사람의 자유를 가장 잘 보장해주는 제도는 제한된 군주제도라고 믿었고, 그 다음이 귀족정치이고, 민주주의는 최악의 제도라고 보았다. 그래서 "미국 식민지에 보내는 조용한 글"에서 민주주의의 도덕적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현재 형태의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데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통하여 정착되기 시작한 민주주의이기에, 이번 지방선거를 통하여 좀더 단단하게 그 기반을 다져나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기독인이 추구해야 할 정치제도

물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있는 기독인의 입장에서 볼 때 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최상의 정치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수의 주장이 항상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반영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윈스턴 처칠은 1947년 11월 11일 하원에서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말을 남겼다: '민주주의야말로 최악의 통치형태라는 말들을 많이 해왔다. 단 지금까지 때때로 시도되었던 다른 형태들을 모두 제외하고서 말이다.' 민주주의는 '완전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지혜로운 것'도 아님을 시인한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시도했던 정치제도 중에서는 가장 탁월한 제도임을 또한 인정한 것이다.

이 점에서 라인홀드 니이버의 유명한 말은 마음에 깊이 새겨 볼 만하다: '인간에게는 정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가능하다. 한편 인간은 불의를 행하려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꼭 필요한 것이다'.

인간에게 정의를 행할 능력이 전혀 없다면 민주주의는 어떤 점에서 불가능한 제도이다. 다수가 정의를 근사(近似)하게라도 반영하며 사회전체의 질서를 유지할 것이라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이 인간이 그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았다. 타락한 인간이라도 창조 때에 받은 양심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이해에 기초해서 생각할 때 민주주의는 가능한 제도이다.

한편 타락한 인간의 양심은 전체적으로 더럽혀졌기 때문에 불의를 향한 유혹에 넘어질 수 있는 위험성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지나친 권력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 이를 제도화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꼭 필요한 제도인 것이다.

냉소주의는 민주주의의 가장 무서운 적

그런데 6.13 지방선거 국면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듯이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가장 무서운 장벽 중에 하나는 국민들의 정서 속에 팽배해 있는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이다.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깊은 불신 그리고 냉소주의에는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한국정치는 그동안 패거리 정치, 지역주의 정치, 권력형 비리 등으로 국민들의 마음에 너무나 많은 실망과 상처를 안겨다 주었다. 정치라면 진절머리가 날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냉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선 국민이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에 빠지면 제일 기뻐할 사람들은 바로 부패한 정치인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을 감시할 세력이 없어진 가운데 더욱 위세를 발휘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정치가 부패할수록 오히려 정치에 관심을 더욱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공동체적인 삶의 너무나 많은 것들이 정치에 의해서 결정되고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웃을 생각해야 할 사명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을 그저 정치인들의 손에 그냥 떠 맡겨 버릴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혼돈의 밤에 잠겨있는 세상에 한 줄기 빛을 비추어야 할 사명이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마 5:14-17).

또한 정치가 이렇게 더럽혀진 책임을 정치인들에게만 돌릴 수 있는가 하는 점도 깊이 반성해봐야 할 대목이다. 유권자의 수준에 걸맞은 정치적 지도자들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올해 훌륭한 정치개혁을 일구어 내려면 지방선거에서부터 유권자들의 정치의식 수준이 현격히 향상되어야 하고 투표에 적극적인 참여를 해야 한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섬으로 지방선거를 통해 공의로운 풀뿌리 민주주의가 잘 정착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나의 한 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구의원 후보자가 거리연설을 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이번 지방선거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유권자가 신중하고 공정하게 투표권을 행사함으로써, 연고주의나 각종 부정선거방법에 의존하는 부패한 후보자들을 퇴출시키고 상대적으로 더 바람직한 정치인들을 당선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왕이면 그리스도인 후보자가 당선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장에서는 후보자가 기독교인지의 여부보다는 지방정치와 행정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정치적인 소양에 있어서 누가 더 상대적 우위를 가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과연 자신의 지역에서 출마한 후보자가 어떤 인물인지를 최선을 다해 확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케이블 TV의 지역방송,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www.nec.go.kr/info.html)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바른선거유권자운동(www.voters.or.kr)과 공의정치포럼 서명운동사이트(www.wisevote.net)에 들어가면 투표를 위한 판단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이상의 정보들이 후보자들을 깊이 있게 아는데 턱없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나마 라도 확인해보려는 성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역시 판단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람직한 정치지도자의 소양에 대한 자신의 기준을 세워나가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앞서 언급한 공의정치포럼 서명운동사이트의 자료실(2002)에 올려져 있는 「입후보자 채점표」가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 해방을 이끌었던 지도자 모세를 살펴보면 바람직한 정치지도자의 소양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히 11:23-27).

물론 오늘의 한국 지방정치 풍토에서 모세처럼 훌륭한 지도자를 찾아내는 일을 대단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이러한 기준을 갖고 있을 때 상대적으로 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권력보다 정의를 앞세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24). 정치인이 자신의 이상을 펼쳐가기 위해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에 노예가 되는 것과는 다르다. 오늘날 한국 정치가 이렇게까지 부패한 이유는 간단하다. 권력이 수단이 된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70년대 유신헌법의 출현, 군부의 독재, 5공 말기의 3당 합당,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공조 등은 권력의 노예가 되어 있는 한국 정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실들이다. 권력에 노예가 되어서 정의와 신의 그리고 공동선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정치인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모세를 보라. 모세는 비록 히브리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일약 바로의 공주의 양아들이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행 7:22). 그러나 모세는 결단의 순간이 다가올 때 그는 미련 없이 그 기득권을 훌훌 털어 버린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지역감정을 비롯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어이 권력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사람들, 즉 권력에 노예가 되어있는 사람들을 예리한 판단력으로 가려내고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공동선과 정의를 위해서 권력을 상대화할 줄 아는 사람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다.

둘째로, 공동체의 고난에 몸으로 참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25, 26). 모세가 기득권을 포기한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노예살이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데 자기 혼자 궁중에서 호의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발을 움직여 백성들의 고난의 현장으로 달려가 두 눈으로 목격하고 그들의 땀 냄새를 맡고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같이 우는 것이 훨씬 행복하였다. 우리 사회는 이처럼 백성의 아픔을 몸으로 끌어안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삶을 던질 줄 아는 정치지도자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원래 힘없는 사람들은 잘 안보이기 마련이다. IMF위기의 아픔도 어느덧 아물고 경제성장이 제 궤도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 그리고 월드컵의 열기 가운데 힘없는 서민들은 철저히 외면 당하고 있다. 생각 없는 지역재개발 정책으로 달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삶의 보금자리와 일의 터전을 잃고 뿌리 뽑힌 나무처럼 말라비틀어져 가고 있다. 무의탁 독거노인들, 결식아동들, 힘없는 일용직 노동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은 여전히 우리들 곁에 있지만, 그들을 향한 관심은 참으로 미미한 실정이다.

참된 정치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아픔을 끌어 앉고 눈물을 닦아주며 그들의 권익을 보호해 줌으로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단 4:27). 그러므로 선거철에만 점퍼를 입고 새벽시장을 누비고 장애인을 찾아 백성들의 마음을 사려는 위선자들을 가려내고, 진실로 백성들의 고난의 현장에 삶을 던져 건져내려는 사람에게 우리의 한 표를 던져야 한다.

셋째로, 용기 있게 소신을 펼쳐 가는 사람이어야 한다(27). 지성인이었던 모세는 화려한 궁중생활이나 소극적 은둔생활을 정당화하지 않고 하나님의 소명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천하를 호령하는 애굽의 임금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그에게 도전하여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은 이렇게 용감한 사람을 요청하고 있다. 물론 지난 70년대와 80년대처럼 총칼을 들이대고 위협하는 세력은 없다. 그러나 더욱 교묘한 악의 세력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다. 정직하고 바르게 정치하다가는 설자리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민주화 운동에 깊이 참여했던 인물들조차 거대한 정치의 더러운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가 제일 먼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다음이 전략이요 지혜이다. 용기가 없으면 인간은 워낙 머리가 좋기 때문에 현실과 타협하는 것을 너무나 쉽게 그럴듯하게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기득권을 갖고 있는 세력을 향해 우뚝 서서 용감히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을 세워야 한다.

맺음말

6.13 전국 동시 지방선거를 맞으면서 기독교인은 지방정치에 대한 건전하고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민주주의 심화의 기반을 굳건히 다지기 위해서다. 궁극적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는 하나님이 돌리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 가신다. 하나님은 80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해 정성껏 모세를 준비시키신 후에 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한 표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던져야 한다. 그래서 부패한 정치인들을 몰아내고 권력보다 공의를 앞세우는 사람, 지역주민들의 고통에 몸으로 참여하는 사람, 그리고 용기 있게 소신을 펼쳐갈 수 있는 사람들이 지방정치를 주도해갈 수 있도록 하는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야 할 것이다.

이렇게 공명선거를 통해 공의로운 지방정치의 기초를 다져감으로서 풀뿌리 민주주의는 더욱 강화되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지역사회 구석구석 실현되어가는 놀라운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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