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것은 이렇게 쓰레기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이 쓰레기의 주범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의 무한한 탐욕과 편리가 쓰레기를 만들어
냈고, 결국 사람의 쓰레기와 같은 마음이 쓰레기를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쓰레기와의 전쟁

학자들은 21세기를 정보화시대요, 생명공학의 발전을 통한 제2의 창조시대라고 말하지만, 21세기는 쓰레기와의 한판 전쟁시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인류가 쓰레기에 의해 질식되어 죽느냐, 아니면 쓰레기와 싸워 이기느냐 하는 절박한 시대에 살고 있다. 수질오염, 대기오염, 토양오염 등 모든 오염의 근원은 쓰레기이다. 산업폐수와 생활폐수에서 핵폐기물에 이르기까지 쓰레기가 오염의 주범이다.

인류는 그동안 꾸준한 산소량의 증가로 살아왔는데, 최근 백여 년 간에 인간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화석연료의 엄청난 연소로 인하여 이산화탄소가 오히려 25% 증가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20세기 말의 지구 평균 기온이 19세기 말보다 0.6도 이상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온실효과가 위험수위에 놓이게 되면서 인간의 경제활동은 산소부족으로 위축될 뿐만 아니라 더욱이 남.북극의 빙하가 녹게 되면서 해수면이 2080년에는 40센티 가량 높아져 해마다 수재민이 현재 1300만 명에서 9400만 명으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러한 원인은 모두 쓰레기가 주범이다.

또한 갯벌의 어폐류와 지렁이 등에서는 한 몸에서 암수 생식기가 함께 발견되었다. 남성의 정자 수가 감소하고 불임인구가 전체 30%을 육박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류의 번식이 중단될 위기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의 원인도 물론 쓰레기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쓰레기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이 쓰레기의 주범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의 무한한 탐욕과 편리가 쓰레기를 만들어 냈고, 결국 사람의 쓰레기와 같은 마음이 쓰레기를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요즘에는 쓰레기가 포화상태인 지구에는 더 이상 쓰레기를 매립할 수가 없어,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주선을 발사하여 쓰레기를 달나라에 매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 또한 얼마나 쓰레기 같은 심보인가. 지구에서 만들어낸 쓰레기를 달에 버림으로 이 우주공간을 오염시키겠다는 발상인데, 이것이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인류의 쓰레기 같은 욕망이다.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

오늘날 교회도 쓰레기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가 공해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질적 풍요와 편리가 곧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주장하는 교회의 설교와 무분별하게 난립하는 교단과 교회는 우리 시대의 종교 공해의 주범으로 지목 받고 있다.

또한 교회에서 배출하는 쓰레기는 어마어마하다. 큰 교회일수록 많은 량의 쓰레기를 양산해 낸다. 큰 교회는 행사도 많고, 일도 많아 쓰레기의 천국이다. 교회에 모이는 것은 곧 쓰레기를 만들기 위함이요, 교회의 행사와 전도는 곧 쓰레기를 위한 행사가 되었다. 큰 교회는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많이 먹어야 하고, 또 통제가 불가능해 쓰레기를 그냥 방치한다. 그리고 큰 교회일수록 자기를 비우고 나누는 삶을 가르치지 않고 차고 넘치는 신앙을 심어주어, 쓰레기 같은 신앙심을 갖게 해주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서로 더 많은 것을 차지하고 채우려는 쓰레기 같은 심보를 가지고 키워주는 설교를 하고 교회를 보면서 우리 시대에 구원을 볼 수 있을까? 아무리 은혜롭고 거룩하며 신령한 설교를 한다 할지라도 쓰레기를 배출하는 교회는 구원의 방주라 할 수 없다. 신앙인의 삶은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삶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이 쓰레기 동산으로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신앙인의 의무이다.

이런 의미에서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 적은 교인이 모여 적게 먹고 완전히 소화시켜 쓰레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 좋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작은 부족들을 보면, 그들은 자연에서 의식주를 얻고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냄으로 쓰레기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들의 심성 또한 부드럽고 인자하며 자연친화적인 마음을 가져 인간의 오염된 문명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직 자연만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문명이라 할 수 있다. 자연에서 얻은 것으로 살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의 몸 또한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삶. 이것이 신앙인의 삶이다. 자연에 가장 가까운 삶을 사는 것이 곧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삶을 사는 것이다.

생명의 그물망과 제3의 규범

사람과 자연은 한 몸이다. 창세기에서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느님은 땅(자연)을 벌하셨고, 카인의 죄로 하나님은 역시 땅(자연)에게 소출을 내지 못하는 벌을 내리셨다. 그것은 사람과 자연은 하나의 생명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이 병들면 사람도 병들고 자연이 죽으면 사람도 죽는 운명공동체인 것이다.

호세아 4장 1-3절 말씀에서도 사람과 자연은 생명의 그물로 짜여진 생태학적 통체인 것을 보여준다. 인간이 욕심을 부리고 부패하면 거기 관계를 갖고 있는 자연도 고발해지며, 또 자연이 황폐하면 사람의 생명도 시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2-3절). 이것이 곧 생태학적 재판이다.

한국 최초의 생태신학자인 죽재 서남동 목사는 이에 더 나아가 그리스도론을 생태학적으로 재고하자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인간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응급대책의 방편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요한복음의 말씀과 골로새서 1장 15-20절(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에서 보듯이 성육신은 인간타락에 대한 응급책이라기 보다는 계속창조의 완성인 면류관이다"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람만의 구원자가 아니라 만물의 왕관이시요, "만물 위에, 만물 안에,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만물의 그리스도이시다"(에베소서 4:6). 그리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마신 공기, 물, 발로 밟으신 흙, 산과 들, 강과 바다, 이 모든 것은 지금 우리가 마시고 보고 밟고 보는 자연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함께 하신 대자연을 우리 사람이 망쳐서는 안 된다.

죽재 선생은 오늘날 기독교인의 삶의 규범은 예수 잘 믿어 천국 가자는 것이 아니라 생태학적 윤리를 통한 제3의 규범을 정하여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생명에로의 신앙의 전환, 생태학적 윤리를 통한 기독교회의 재고를 요청한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생태학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활동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도, 목회도, 개인의 소비생활에 있어서나 사회의 정책결정에 있어서나, 경제학적 동기보다는 생태학적 근거가 지배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생태학적 윤리에 근거한 삶과 신앙활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쓰레기와 전쟁을 선포한 우리 시대의 구원의 삶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의인 노아에게 이 생태학적 위기에 처해 있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생명의 보존'이라고 하는 지상명령, 윤리적 규범을 명하셨다(19절).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모든 생물 곧 지금까지의 인간중심주의적인 가치관을 넘어서 '생명의 보존'에 나선다.

우리는 지금 "생명을 보존하라"고 하신 하나님을 명령을 듣고 있다. 노아처럼 우리도 모든 생명을 살리는 생태학적 삶이야말로 나를 살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의 삶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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