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봉은사 땅 밟기 사태에 대한 크리스천의 반응은 대체로 침묵하거나, 민망해하는 것이었다. 민망히 여기시는 몇몇 분들은 그 사건을 소수 몰지각한 크리스천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해명하셨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필자는 앞글에서도 밝혔지만 이 문제가 단순히 땅 밟기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1,700년 동안 서구 사회를 지배해 왔던 크리스텐둠의 제국주의적 영성 때문이라고 본다. 자끄 엘륄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기독교로 세상을 정복하려는 '기독교화(Christianize)의 충동',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기독교화의 충동은 봉은사 땅 밟기뿐만 아니라, 세계 복음화나 민족 복음화 운동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성시화 운동, 총동원 전도, 공격적 선교, 무례한 노방 전도 등과도 무관하지 않다. 더 나아가 기독교 정치, 기독교 경제, 기독교 문화 등을 건설하려는 시도와도 무관하지 않다. 최근 개신교 일각에서는 기독교 은행을 세우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세상의 모든 영역을 기독교화하려는 정복주의 세계관의 표출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화의 충동은 성서 계시나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제국주의적 영성의 표현일 뿐이다.

1. 제3의 길을 찾아서

그렇다면 제국주의적 영성의 대안은 무엇인가? 혹자는 종교 다원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말한다. 제국주의적 영성의 뿌리는 성서의 유일신 사상에 있다고 한다. 야훼 하나님만이 참신이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라는 유일신 신앙 때문에 타 종교를 배척하고, 탄압하고, 정복하려는 태도가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글에서도 밝혔듯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종교 다원주의란 무엇인가? 거칠게 말해서 종교 다원주의란, 야훼 하나님은 여러 신들 중 하나며(a god), 예수는 여러 스승들 중 한 분(a teacher)이며, 기독교 진리는 여러 진리들 중 하나(a truth)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이러한 종교 다원주의는 분명 종교 간 갈등과 대립을 완화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크리스텐둠이 붕괴된 20세기 중반 이후,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온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 제국주의에 대한 강력한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제국주의의 뿌리는 성서의 계시가 아니다. 제국주의의 뿌리는 콘스탄틴주의(Constantianism)이다. 기독교와 제국을 결합한 콘스탄틴주의의 결과로 크리스텐둠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것이 정복적 제국주의 영성의 뿌리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영성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종교 다원주의는 올바른 답이 아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그 옛날 로마 정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판테온 신전에 모셔 주겠다며 회유했던 전략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성서를 살펴봐도 구약의 가르침은 야훼 하나님만이 참신이라는 유일신관으로 수렴되며, 신약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주시라는 그리스도 신앙으로 회귀한다. 제국주의도 아니요, 종교 다원주의도 답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주의도 아니요, 종교 다원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은 무엇일까?

2. 후기 기독교 사회에서의 아나뱁티즘

얼마 전 영국의 아나뱁티스트 스튜어트 머레이(Stuwart Murray)가 <벌거벗은 아나뱁티스트>(Naked Anabaptist)라는 책을 써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흥미로운 책에서 최근 세계적으로 아나뱁티스트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다. 왜 지금, 지난 500년 동안이나 이단으로 정죄되고, 멸시받고, 박해받던, 그리고 보이지 않게 은둔해 왔던 아나뱁티스트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는 것일까? 기독교가 전체적으로 위축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말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한 가지 이유는 바로 크리스텐둠의 붕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그마치 지난 1,700년 동안이나 서구 사회를 지배해 왔던 크리스텐둠이 붕괴되고 후기 기독교 사회라는 낯선 사회가 도래했다. 이는 실로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낯선 환경 속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기존의 정복주의적 태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종교 다원주의가 대안인가?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대안이 뭘까?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고, 그중 한 가지가 바로 아나뱁티스트의 전통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아나뱁티스트는 제국주의도 아니요, 종교 다원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지난 500년 동안 실험해 온 기독교의 한 전통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3의 길은 정확히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길이요, 초대 교회의 길이다.

아나뱁티스트 역사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을 기독교의 승리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후 313년의 기독교 공인은 승리라기보다는 교회 타락의 시초다. 바로 이 시점을 전후로 교회는 초대 교회의 순수성을 잃어버렸고, 제자도의 기준은 후퇴했으며, 신자의 삶은 형식과 제의로 대체되었다. 그 대신 교회는 제국으로부터 부와 권력을 얻어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역사관이다. 바로 이러한 그들의 역사관 때문에 그들은 크리스텐둠을 거부했던 것이다. 16세기 종교 개혁 당시 크리스텐둠 체제를 거의 유일하게 거부한 이들은 아나뱁티스트뿐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대단한 선각자들이었다.

3. 아나뱁티스트의 정치적 탈제국주의

아나뱁티스트의 삶과 신학은 여러 가지 면에서 반제국주의적 특성을 띠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몇 가지만 살펴보자.

1) 재침례(anabaptism)

아나뱁티스트는 재침례(rebaptism 혹은 anabaptism)라는 말에서 왔다. 그들이 재침례를 베푼 이유는 신앙을 고백할 수 없는 유아에게 유아 세례(infant baptism)를 베푸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해서 성인들에게 다시 침례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두 번 침례를 베푼다는 의미의 아나뱁티스트라는 칭호는 외부인이 붙여 준 별명이다. 물론 아나뱁티스트 자신은 그 용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침례를 두 번 베푸는 자들이 아니라 단 한 번 참침례를 베푸는 자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유아 세례를 거부하고 성인에게 재침례(anabaptism)를 실시하는 순간 그들은 국가-교회(State-Church)를 향해서 정면 도전을 선언한 셈이 되었다. 왜냐?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기 이전에 유아 세례는 교회의 입교식인 동시에 호적 등록 절차였다. 따라서 이들이 유아 세례를 거부하는 순간 그들은 호적 등록을 하지 않은 무국적자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 호적 등록을 통해서 조세나 징병을 할 수 있었던 국가로서는 유아 세례가 행정상 중요한 절차였다. 하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은 국가가 정 호적 등록을 하고 싶으면 유아 세례가 아닌 다른 행정 절차를 통해서 하라고 주장했다. 즉 그들은 신앙의 표시와 국가 행정의 분리를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들의 주장은 정확히 크리스텐둠(Christendom)의 급소를 찔렀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의 핵심은 기독교(Christianity)와 국가(kingdom)의 완전한 분리였기 때문이다. 교회와 국가가 분리된다면 더 이상 크리스텐둠은 작동할 수 없다. 국가는 국가고, 교회는 교회다. 오늘날 국교 분리는 상식이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그리고 아나뱁티스트의 국가와 교회의 분리, 곧 크리스텐둠의 거부는 곧바로 기독교 제국주의의 거부를 뜻하는 것이었다.

2) 신앙의 자유(freedom of faith)

유아 세례 문제는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주제다. 그들은 왜 유아 세례를 거부했을까? 그 이유는 그들의 신앙관에 있다. 그들은 신앙이란 복음을 전도 대상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듣고, 이해하고, 동의하고, 자발적으로 결단해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유아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동의할 수 있고, 자발적으로 결단할 수 있는 연령의 입교자에게 침례를 베푸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신앙의 자유(freedom of faith)'다. 신앙이란 자발적이라야 한다. 강제적인 것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과 자유는 손등과 손바닥 같은 것이다. 자유가 없다면 신앙이 아니다. 이들의 신앙관이 이러하니 그들은 모든 종류의 강제적 개종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더 나아가 그들에게 신앙의 자유란 '불신앙의 자유(freedom of unfaith)'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신앙은 자발적으로 결단할 수도 있고, 또 거부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신앙이란 반드시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실로 충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자유는 크리스텐둠이나 기독교 제국주의와 결코 양립할 수 없으며, 용납될 수도 없는 위험 요인이다. 크리스텐툼 체제 하에서 신앙과 불신앙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혁명적 사상이었다.

아나뱁티스트의 '신앙·불신앙의 자유'는 후대의 계몽주의자들에 의해서 '양심 및 사상의 자유'로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근대 자유주의 사상은 자본주의 등장 이후 '소비의 자유' 혹은 '소비자 선택의 절대 주권'이라는 천박한 이해로 퇴락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의 신장과 민주주의의 도래에 큰 기여를 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아나뱁티스트의 자유사상은 시대를 앞선 선구적 사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 지배의 단념

제국주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지배다. 만유를 단일 의지의 지배하에 두는 것, 그리하여 전체가 한 인격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제국주의이다. 그러나 아나뱁티스트는 철저하게 '자유'를 주장했다. 믿을 자유와 믿지 않을 자유, 모두를 주장했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일은 가능할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 하물며 누가 누구를 자신의 수하에 두고 복종하게 한단 말인가?

때문에 공동체는 자유를 가진 형제자매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지도자, 선생, 아버지가 없는 형제자매 공동체(마 23:8~11), 이것이 그들의 자유사상의 산물이다. 이들은 명목상으로만 만인 제사장직을 인정했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실제적으로 만인 제사장설을 교회 안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아나뱁티스트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이층 구조를 분명하게 거부한다. 그들은 종종 스스로를 가리켜, '자신을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자들'이라고 불렀다. 교회 내의 모든 신도는 동등하다. 단지 직분만 존재한다. 설교하는 직분, 치리하는 직분, 봉사하는 직분 등 은사에 따른 직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직분은 고정적이거나 항구적이지 않다. 필요에 따라 공동체의 합의에 따라 변화되며 공유된다.

따라서 그들은 일사불란한 상명하복식의 의사 결정 구조를 거부한다. 모든 의사 결정은 공동체 전체의 의사를 물어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목소리도 소외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고 또 때로는 강박적이고 비효율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존 요더의 말대로 효율성보다는 신실함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의 의견을 들을 때까지 듣고 또 듣는다. 그런 다음 결정한다. 이러한 그들의 실천은 철저한 반제국주의적 공동체를 만들어 냈다.

4) 비폭력(nonviolence)

니케아 공의회가 끝나고 아리우스는 신학 논쟁에서 패배한 후 국가 공권력에 의해서 추방을 당했다. 그 때부터 국가 공권력은 교리 및 신학 논쟁 때마다 걸핏하면 끼어들어 무지막지한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이러한 국가 공권력을 전면 부정했다. 그들은 공권력으로 대표되는 모든 종류의 폭력을 거부했다. 몇몇 예외들이 있기는 했지만,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아나뱁티스트의 전통은 대체로 모든 형태의 폭력을 거부하는 역사적 평화주의(historical pacifism) 노선을 택했다.

국가의 폭력, 곧 공권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마저 별로 문제 삼지 않았다. 그래서 루터는 독일 귀족들의 힘을 의지했으며, 칼뱅은 제네바 시의회의 힘을, 츠빙글리는 취리히 시의회의 힘을 입고 자신들의 뜻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살상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예컨대, 루터는 독일 귀족들에게 뮌처와 혁명 농민들을 칼로 찔러 죽이도록 독려했으며,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죽였고, 츠빙글리는 위대한 아나뱁티스트 신학자 마이클 새틀러를 비롯한 수많은 아나뱁티스트들과 이단자들을 처형했다.

하지만 아나뱁티스트는 칼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거두어 가셨으니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하리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굳게 붙들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칼이 없는 자들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그들은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도 칼을 들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인에게 북한 사람은 '빨갱이'로 여겨지는데, 16세기 유럽인들에게는 터키인들이 '빨갱이' 같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철천지원수, 터키인들이 침략했을 때에도 그들은 칼을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로 치면 국가 보안법에 걸려 처형당했던 것이다.

그들은 왜 칼을 들지 않았을까? 이유는 비폭력에 대한 그들의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비폭력에 대한 신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에 대한 철저한 인정 때문이었다. 만유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산상 설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이 국가의 명령보다 더 높다. 그래서 그들은 폭력을 거부했다. 이러한 아나뱁티스트의 폭력의 거부는 정치적 제국주의를 해체해 버리는 결정적 조치였다.

4. 아나뱁티스트의 인식적 탈제국주의

아나뱁티스트의 정치적 탈제국주의와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그들의 인식적 탈제국주의이다.

1) 인식적 제국주의

우리는 앞글에서 헬라 철학의 개념과 방법을 도입한 기독교 사상이 점차 인식적 제국주의에 물들게 되었음을 살펴보았다. 헬라 철학에서 진리란 자명한 것, 객관적인 것, 보편적인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진리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관계없이 스스로 진리라는 뜻이다. 이 진리는 영원하며, 모두에게 보편적이다. 기독교 진리는 보편적(catholic)이다. 따라서 기독교 진리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 의해서도 믿어지는(quod ubique, quod semper, quod ab omnibus credum est)' 진리다. 이러한 보편적(catholic) 진리는 중세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의 인식적 기초였다.

이러한 진리는 명제로 표현된다. 이렇게 명제화된 기독교 진리는 신조로, 혹은 신학적 공식으로 정식화되었으며, 이를 영원불변한 정통(orthodox)으로 고정시켰다. 명제적 진리관은 인격적 결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컨대, 수학 시간에 피타고라스의 공식을 배우는 학생은 그것을 믿을지를 결단할 필요가 없다. 피타고라스의 공식이 수학적으로 오류 없이 증명되면 믿고 말고 할 것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배우고, 터득하는 것, 곧 인식이 진리에 대한 유일한 태도다. 따라서 명제적 진리관은 신앙이 아니라 인식을 요구한다. 믿음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인정과 인격적 신뢰가 아니다. 정통 교의가 합리적으로 추론되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믿음이 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란 점차 정확 무오한 기독교 교리를 잘 배우고 습득하는 것이 된다.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는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 신앙(faith)이 교조적 신념(belief)으로 변질한 과정을 추적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근대 이후 기독교의 위기의 원인인 것이다.

헬라적 진리관에서 어느 것이 진리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비진리, 곧 거짓이다. 예컨대 시험 문제를 푸는 학생은 4지 선다형 답안에서 정답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의 과제는 오답을 제거하고 정답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관이 인식적 제국주의를 만들어 낸다. 만일 정통 교리(orthodox dogma)가 기독교 진리라면 나머지는 전부 이교도(pagan) 아니면 이단(heresy)이다.

그리고 이교도와 이단은 제거되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자동적이고, 기계적이다. 바로 이것이 인식적 제국주의이다. 이러한 인식적 제국주의가 정치적 제국주의와 결합하면 끔찍한 비극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지난 1,700년 동안 저질러졌던 기독교 죄악의 가장 큰 원인이다.

2) 신앙의 의미

아나뱁티스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인식이 아니다. 인식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넘어선다. 신앙은 반드시 '예수 따름(following Jesus)'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 같은 사실은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과 아나뱁티스트들 간의 중요한 논쟁에서 드러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신앙관에는 두 가지 두드러진 요소가 발견된다. 하나는 바른 지식이다. 성서에 대한 지식과 올바른 교리에 대한 앎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체험이다. 이는 루터의 회심 체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내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이 봤을 때 이러한 신앙관에는 '예수 따름'의 요소가 빠져 있었다. 다른 말로 '제자도'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프로테스탄티즘에도 제자도의 요소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은 제자도를 믿음에서 도식적으로 분리해 냈다. 믿음과 제자도를 선후의 문제로, 혹은 즉각성과 점진성의 문제로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필수와 선택의 문제로 바뀌고 말았다. 믿음은 필수고, 제자도는 선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나뱁티스트 역사학자 해럴드 벤더(Harold Bender)는 그의 아나뱁티스트 비전(Anabaptist Vision)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아나뱁티스트는 삶 전체의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로 단지 지적, 교리적 신앙이나 주관적인 '경험'을 통해서 회심, 거룩함, 사랑을 만들어 내는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아나뱁티스트에게 있어서 믿음과 제자도, 그리고 회개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통합적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기로 했다. 여기서 예수를 믿는다는 뜻은 예수를 구원자인 동시에, 주(kyrios)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하며, 이것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겠다는 결단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 그는 세상의 통치를 끊어야 한다. 그는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공동체, 곧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다 믿음이다.

오해하지 말 것은 아나뱁티스트가 제자도를 강조했다고 해서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그들은 믿음과 행위를 나누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하지만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삶의 변화는 믿음의 '열매'였다. 이 같은 사실은 그들과 프로테스탄티즘과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잘 보여 준다. 다만 믿음을 다른 이들보다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원했다는 점이 그들의 믿음관의 독특성이다.

3) 명제에서 언약으로

최근 포스트모던 신학자들 중에는 기존의 서구 신학이 '명제' 신학이었다고 보고 이를 '이야기' 신학(narrative theology)으로 바꾸려는 이들이 있다. 이러한 시도는 무척 흥미로운 시도며, 한편으로는 환영할 만한 시도이다. 하지만 이미 500년 전 이와 비슷한 시도가 아나뱁티스트들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그들은 일찍부터 교리나 명제에 대해서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들이 봤을 때 기독교 진리는 '명제'가 아니다. 아마도 기독교 진리는 '관계' 속에서 가장 잘 나타날 것이다. 만일 기독교 진리가 명제로 표현된다면 정통 신조를 학습하거나, 소요리문답을 잘 외우면 된다. 또 일부 루터주의나 경건주의자들처럼 만일 기독교 진리가 모종의 '신적 체험'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체험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나뱁티스트에게 있어서 기독교 진리는 '언약적 관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언약적 관계를 아나뱁티스트는 '예수 따름(following Jesus)'이라고 표현했다. 신앙이 '예수 따름'을 포함한다는 뜻은 기독교 진리란 단순히 명제나, 혹은 체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언약적 관계라는 뜻이다. 진리를 명제에서 언약적 관계로 전환한 것은 가히 신학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할 만한 혁명적 발상이다.

헬라적 관념으로 봤을 때 '예수는 (유일한) 주(kyrios)시다'는 하나의 명제이다. 아나뱁티스트가 봤을 때 '예수는 (유일한) 주시다'는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는 예수의 초청이요, 언약 관계로의 부르심이다. 명제는 자명한 진리인고로 사람의 반응을 요구하지 않는다. 진리는 스스로 진리다. 하지만 언약은 다르다. 언약은 사람의 인격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예수는 주시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뜻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초청에 결단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헬라적 관점에서는 명제의 진위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기독론에서는 homoousios와 homoiousios 중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이냐가 중요해진다. 그리고 만일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필연적으로 거짓이 된다. 어느 한쪽이 참으로 결정되면 패배자는 승자에게 굴복해야 한다. 즉 이기느냐, 지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진리관은 대결적이다. 신학자들의 일은 서로 경합하는 이론들이 치열하게 논쟁하게 만들어서 승자와 패자가 결정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진리관은 자연히 정복적이다.

하지만 아나뱁티스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관계를 맺느냐이다. 예수를 따를 것이냐, 말 것이냐? 이것은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자발적인 선택이고 결단이다. 강요되지 않으며, 위협이나 협박도 없다. 참신앙을 가지기를 원하는 자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언약적 관계 속에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신앙이다.

5. 아나뱁티스트의 비강제적 전도 방법

이러한 탈제국주의적 태도는 그들의 전도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제국에서의 전도는 강요, 강제, 협박, 고문, 폭력 등으로 이교도나 이단자를 개종시키는 것이다. 교묘한 말로 설득하거나, 위협하거나,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현혹하거나, 유혹하는 것들 역시 타인의 자유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강제적인 수단들이다. 하지만 아나뱁티스트는 신앙을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개인의 실존적인 결단으로 보기 때문에 이에 영향을 미치는 어떠한 인위적인 방법이나 수단도 거부한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전도나 선교를 잘 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16세기 때 가장 왕성한 복음 전도자와 선교사는 거의 대부분 아나뱁티스트였다.

아나뱁티스트가 비강제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원했기 때문에 그들은 유아 세례를 거부했다. 유아는 자유로 자신의 신앙을 결단할 수 없기에 유아 세례는 강제적인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고 그들은 보았던 것이다. 또한 그들이 보기에 유아 세례는 국가와 교회의 기묘한 잡종을 만들어 내며, 명목상의 신자를 대량 양산한다. 물론 그들도 유아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믿음을 갖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자발적인 결단과 인격적 관계 맺음이 빠져 있기에 유아는 신앙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고, 그래서 유아 세례는 합당하지 않다고 보았다.

또한 그들은 일체의 강제적 수단을 통한 선교, 전도, 개종, 치리 등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전도하는가? 그들의 최상의 전도 전략은 '삶의 변화'였다. 메노나이트 역사학자 앨런 클라이더의 보고를 보면, 2~3세기 초대 교회의 최상의 전도 방법은 '삶의 변화'였다. 그리고 이것이 아나뱁티스트가 택하는 전도 전략이다. 전에는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던 이들이 갑자기 바뀌고,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바로 여기서 전도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삶의 변화와 아울러서 그들은 구제, 나눔, 환대,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이들은 구제와 나눔을 개종으로 연결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의 증거'는 그 자체로 전도다. 만일 구제나 나눔이 개종의 수단이 되는 순간 그 사랑은 불순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상대방의 자유를 위협할 수 있다. 종종 건강하지 못한 교회나 선교 단체에서 '사랑의 폭탄(love bomb)'을 대단히 사악한 개종과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아나뱁티스트는 사랑을 받는 자가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로 들어오기를 기대하기는 하지만, 구제나 나눔을 개종과 지배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도 말로 복음을 전하는가? 물론 그렇다. 앞서 말했듯이 초기 16세기에 가장 왕성한 복음 증거자와 선교사들은 아나뱁티스트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유럽인 모두는 유아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었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은 그들을 올바른 신자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소위 세례 받은 신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박해가 심해지면서 점차 아나뱁티스트의 복음 전도는 상대적으로 약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들이 말로 복음을 전할 때에도 그들은 가급적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상대방을 배려하고 예의를 갖춘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믿는 바를 고백하고, 그들을 신앙으로 초대한다. 고백하고, 초청하고, 설득하고, 인내하는 것, 이것이 그들의 전도 방식이다.

지금까지는 아나뱁티스트의 탈제국주의적 특성에 대해서 살펴봤다. 아나뱁티스트는 제국주의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물음은 이것이다. 아나뱁티즘은 혹시 종교 다원주의는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면 다소 겹치는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아나뱁티스트는 종교 다원주의가 아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는지 물으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여기서 아나뱁티즘과 종교 다원주의, 혹은 아나뱁티즘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관계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 논의는 무척 지루하고 다소 학문적일 수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다루는 것이 합당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혹시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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