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을 하면서는 대개 극동방송을 듣습니다. 참 많이 들려주는 곡 중 하나가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지요. 저는 이 노래를 보내겠다는 진행자의 말을 들으면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까? 대부분의 찬양사역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태여난 사람'이라고 발음을 합니다. 아마 전국의 교회에서도 그렇게 불려지고 있겠지요. 이제껏 딱 한 명의 가수가 바르게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말씀하십니까? 은혜로우면 다 된 것입니까? 무관심으로 훼손되는 우리말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작년에 저는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담임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308장 부르실 때, 무르익은 저 곡식은 '낫을' 기다리는데 라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고 조심스럽게 일러드렸습니다.

전에 계시던 목사님들에게도 몇 번이나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목사님은 열린 마음으로 들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더 이상 '낮을'기다리거나 '낯을' 기다린다는 우스꽝스러운 찬양을 부를 수 없어 용기를 낸 것입니다. 설교하실 때 '빗을' '빚을' '빛을'에 대하여서도 구분하여 주실 것도 내친 김에 말씀드렸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항상 '이제 성경을 받들어 봉독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였던 생각도 납니다. 봉독이란 낱말에는 '받들어'라는 뜻이 이미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저도 '그렇게 빗(빚)이 많아?' '햇빗(빛)이 너무 눈부셔' 하고 잘못 말할 때가 있고,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사건'을 '사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을 상대로 할 때는 우리말에 대하여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쓰이고 있는 말과 글에 관하여 논의될 만한 것은 무척 많겠으나 숲을 볼 식견이 없는 저는 나무도 아닌 풀 한 포기를 보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나라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믿음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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