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5)

불과 한 세대 전에는 수백 명이 북적거리던 마을 교회가 지금은 주일에 10여 명의 노인만 둘러앉아 조용히 예배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 서구의 많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풍경입니다. 대도시의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수많은 사람이 모이던 중·대형 교회들이 이제는 관리 유지조차 힘들어 다른 용도로 개조되거나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

1995년 당시 65%의 영국인이 기독교인이라고 응답을 했으나, 단지 전 국민의 8% 미만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의 조사에서는, 1979년과 2005년 사이 단지 26년 만에 영국 교회 출석 교인 수가 반 토막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교인들이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안타까워하면서도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로 치부했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한국의 교인들도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지난 30년간 건물만 지어 놓으면 차고 넘치던 성장 신화가 이제는 거품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징조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장과 증식에 힘을 쏟아 비만해진 한국의 중·대형 교회들이 점차 고질적인 성인병으로 활력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세속적 복과 외적 성장만을 추구하며 변질된 복음을 전한 교회들에 대하여 매서운 응징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 심은 대로 거두고 있습니다. 내실 있는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계속 먹고 몸집 키우기에만 몰두를 했으니 병이 난 것입니다.

자신들의 교회를 키우기 위해서라면, 이웃의 작은 교회들이 죽든 말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신축을 위해서라면, 가난한 교인들을 압박하여 그들의 속주머니까지 넘보는 행위도 결코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건축 헌금을 더 걷기 위해, 단순히 예배와 모임을 위한 처소를 '성전'이나 '거룩한 땅'이라고 우기며 순진한 신도들을 기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바람마저 피하기 힘든 '솔로몬 행각'에서 모이던 사도행전 성도들의 그 가난한 마음과 검소한 정신은 모두 사라지고, 세속적 성취와 안일한 편리주의가 순수한 옛 신앙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또한 목적이 수단과 방법을 모두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금을 유용하여 치부하는 목사나, 성추행을 한 목사들도 설교를 잘하고 교회를 키우는 능력만 있으면 그냥 적당히 넘어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이끄는 삶'이 옳은 것이 아니라, '목적이 이끄는 삶'이 옳은 것이고 복인 것처럼 선전하며 외형적 성장에 명운을 걸어왔습니다.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들

어느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비교인들 반수 이상이 과거 교회 출석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났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반증 자료입니다. 반면에 최근 가톨릭 신도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습니다. 개신교에 실망하여 개종한 교인들도 여기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여기서 또다시 중복하여 일일이 나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한 세상이 너무 좋아서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일단은 논외로 하고자 합니다. 오히려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에 상심하여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더욱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심할 경우는 교회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니 때로는 더 머물고 싶어도, 사욕으로 눈이 먼 교권에 의해 강제로 내몰리기도 합니다. 최근 제자교회나 경0교회 사태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말세가 되니 목사가 교인들에게 교회에서 나가라고 합니다. 공금 횡령이나 성추행 의혹에 항의하며, 교회법을 지키자는 교인들의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가 그리도 부당한가요.

교인 이탈 문제의 핵심은 대량 생산으로 불량화된 목회자들의 자질에 가장 큰 원인이 있습니다. 크게 결여된 경건과 어설픈 실력에도 불구하고, 어쩌다가 호황기에 기회를 잡아 갑자기 교회 지도자라는 신분으로 급상승한 일부 인사들이 자기 분수를 까맣게 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하고 인내하는 성경의 가르침은 모두 탐욕에 저당 잡히고, 대접받고 누리고 군림하는 교만한 독재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분들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에서는 광채가 나지만 경건의 능력은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선한 논리와 마음으로 설득시키지 못합니다. 온갖 부끄러운 부정과 비리는 자신들이 다 저질러 놓고, 오히려 이에 저항하는 교인들을 위선과 교권이라는 양날의 칼로 가차 없이 잘라내고 있을 뿐입니다.

많은 경우, 노회도 총회도 모두 한통속이니 거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입만 열면 "아멘"하고 화답하는 맹신도들이 뒤에서 든든히 후원을 해 주고 있습니다. 과거 군부 독재자들에게도 추종자들이 많았는데, 성직자로 포장된 이들에게 어찌 맹신도들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이들 목회자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위 교회 생활을 오래 하였다는 주요 직분자들에게도 답답한 문제가 적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 내에서 좋은 목사님, 전도사님, 장로님, 집사님 들을 너무 많이 보아 왔고 그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분들이 주신 사랑의 빚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가 그렇지는 못한 듯합니다.

먼저 가까운 지인이 경험한 일을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느 도시로 이사를 하여 근처의 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별로 크지도 않은 교회인데, 근 3개월이 지나도록 장로라는 분이 한 번도 다가와서 인사를 나누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원래 성격이 저런 분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먼저 고개를 숙이며 가벼운 눈인사를 자주 드렸다고 합니다. 물론 반응은 아주 시큰둥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좀 부유해 보이는 사람들이 새로 오면 이 장로님이 아는 척도 하고 잘 어울리더랍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이 장성 출신이었습니다. 아마 자신의 수준에 맞는 사람들만 골라서 상대하겠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생업 때문에 그 교회를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서먹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비단 이런 장로님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집사님들도 예배가 끝나면 자기들끼리만 즐겁게 몰려다닙니다. 그 구분은 거의 한가지입니다. 재산이 있거나 사회적 신분이 좀 좋아 보여야 거기에 낄 수가 있습니다. 그 순간 아파트 단지에서도 아이들이 평수대로 어울려 논다는 말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운한 마음을 누르고 이 친구는 가능하면 구석에서 소외받는 다른 교인들을 살피고, 가깝게 지내려고 더욱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결국은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담임목사님 역시 차별적 분위기를 조장하는 데에 은근히 앞장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교인들과는 친밀하게 지내시고, 그렇지 못한 교인들은 그저 의례적으로만 대했습니다. 설교도 너무 기복적이고 비성경적이며, 헌금만 지나치게 강조해서 교회 생활이 매우 불편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후일에 들으니 교회 수련원 부지를 구입하면서, 일반 교인들이 모르게 사모 명의로 등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세월이 한참 지나면 이런 수법으로 교회 재산이 슬그머니 목사의 사유 재산으로 둔갑하게 될 것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교회를 세습하여 대를 이어 죽도록 충성을 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험은 단지 하나의 삽화에 불과합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교회에서는 드문 일이 아닙니다. 필자는 과거 지방 근무나 출장 중에 여러 교회들 주일 예배에 참석할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 시간 내내 지역 목사님들이 단체 관광을 다녀오신 지루한 체험담만 듣다가 예배를 마친 기막힌 경우도 있었습니다.

같은 지역의 또 다른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님이 예배 중에 성령을 받으라고 바람 소리를 내며 기도하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부부가 각자 십일조를 따로 내라거나, 일 년치 헌금을 미리 작정하라는 등 정말 보기 민망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극소수가 비정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상당수가 비정상이라는 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 저급한 목회자들, 오만한 장로들 그리고 방자한 집사들이 한국교회 전도의 문을 정면에서 막고 있습니다. 아니 가만히 있는 교인들마저도 교회 밖으로 내치고 있습니다. 많은 여집사님들의 부드러운 입방아 또한 큰 재난입니다. 그리하여 교회 내에서 배고픈 것은 참아도, 기죽고는 도저히 못살게 만듭니다.

과도한 돈 자랑, 자식 자랑, 그리고 남편 자랑이나, 반대로 무책임한 험담들이 교회를 병들게 하고 믿음이 연약한 교인들의 마음을 멍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에 목말라 교회를 찾아왔으나, 가슴에 상처만 가득 담고 떠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수년 전에 어느 노부모님을 겨우 설득하여 집 근처 교회에 출석하시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거기서 얼마나 상처를 많이 받으셨는지, 지금은 목사나 예배당 소리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십니다.

극에 이른 교회 부패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거룩한 교회가 깊숙이 세속화되어 세상이 추구하는 속된 가치관을 그대로 따르며 수용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사장, 교수, 판사, 장관, 장성, 기타 부유층이면 교회에서도 금방 장로나 권사 그리고 집사가 됩니다. 반면에 서민들은 교회에서도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귀족들이 대접을 받던 중세 교회만 흉을 볼 일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중세적 성직 차별이 현재 한국 개혁 교회 내에 폭넓게 퍼져 있습니다. 중·대형 교회 목사는 교황이나 주교처럼 고위 성직자로 군림하고, 장로나 집사나 신도들은 평민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하인이 주인을 부리며 행세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다.

이런 한심한 모습을 더 이상 안 보려면, 우선 중·대형 교회 목사들의 권한을 가르치는 직무에 맞도록 전문화하고, 크게 제한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를 최고 경영자(CEO)로 보는 잘못된 관념부터 철저히 뜯어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중·대형 교회의 갱신과 개혁을 원한다면, 우선 부유한 목회자들에게 유입되고 있는 지나친 돈줄을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무슨 명분이든, 목사가 사역 기간 중에 수십억 원을 모을 수 있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과도한 목회 사례비와 외부 강사비 역시 과감하게 축소하거나 삭감하여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여튼 목사의 주변에 흐르는 돈이 넘치게 되면, 항상 부패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유감스럽게도, 회칠을 한 무덤처럼 한국교회 속에는 은밀한 불의와 부정이 일반화하고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은 교회 공금 횡령, 과도한 집회 사례비, 교회 세습, 성추행, 사기, 월권, 학위 세탁, 헌금 강요, 재단 운영, 정치 참여 등 온갖 속된 방법을 다 동원하여 부와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속은 구토가 나도록 썩었는데, 겉으로만 치장하고 눈가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신자들만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내부 사정을 깊이 알게 될수록 더 큰 좌절을 느끼며 떠나는 중견 교인들도 많아졌습니다.

중세 시대의 암울한 역사가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소위 고위 성직자들은 사치스러운 부를 누린 반면에, 지방의 말단 사제들은 끼니를 잇기가 어려울 정도로 혹독한 가난에 시달리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대형 교회와 미자립 교회 간의 극단적인 양극화가 이를 잘 재현하고 있습니다.

극히 일부 목사들만의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제 구차한 변명이 될 뿐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총회, 노회, 연회 그리고 각 교회에 기생하며 거룩한 직분을 모독하고 사욕을 채우는 인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불의한 돈이나 뇌물을 하나도 안 뿌리고 당선된 교단 총회장이나 노회장, 그리고 기독교 단체 대표회장이 과연 몇 명이나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니 사회에서도 교회를 '공공의 적'으로 보는 혐오감이 급속히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의 지탄을 단골로 받는 정치권보다 더 부패한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정치 목사들입니다. 이스라엘 하스몬 왕조의 사악한 왕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었을 때, 백성 중에 아무도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혼자서 실소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소위 한국교회 지도자라는 인사들의 표리부동한 행태를 보면서, 그 백성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진리가 아니면 계속 목마를 수밖에 없는 그런 영적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두세 번 정도는 속더라도, 계속해서 속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신도들도 점차 그 진실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느냐고 묻습니까? 물론 세상의 유혹이 너무 커서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교회가 준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더 이상 속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또한 더 이상 변절한 목사님들의 욕심에 이용을 당하기 싫어서 떠납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이 물론 좋은 일도 아니고, 결코 권할 일도 아닙니다. 또한 이를 정당화하거나 미화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냉철히 직시하고, 문제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유형 교회의 한계와 새로운 시도들

많은 분들이 개혁을 논하다가, 이제는 교회 현실에 너무 실망하여 탄식할 힘마저 없다고 말하십니다. 실제로 교회 정의가 개선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그 교묘한 수법이 지능화, 고도화, 조직화, 그리고 일반화하며 악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는 한국 대부분의 제도권 교회들은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는 절망적 결론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 의욕도 점차 약해지고, 냉소적이며 비판적인 방관자로 변하기 쉽습니다.

반면에 이런 냉소주의를 극복하고, 바른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새로이 구체적인 노력을 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예배당 건물이 없는 교회, 담임목사가 없는 교회, 십일조가 없는 교회, 계급적 직분이 없는 교회, 유급 사역자가 없는 교회, 헌금 채가 없는 교회, 그리고 무기명 헌금만 받는 교회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대부분은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욱 크게 부각된 현실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시도들이 모두 옳고, 기존의 교회 제도가 무조건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기성 교회들이 스스로 바르게 개혁할 수 있으면 더욱 바람직합니다. 또한 새로운 형태로 이룬 교회들 역시 언젠가는 또 다른 문제점으로 인하여 다시 개혁을 요구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그겠습니까. 교회 역사는 언제나 '순수'와 '비순수'의 싸움이었으며,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성찰과 개혁이 필요함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세속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유형 교회들은 그 제도에 관계없이 계속해서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 이름이 유대교든,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또한 앞으로 그 무슨 이름이 새로 붙게 되든지, 근본적으로 그들의 구성원인 부패한 인생들이 쉽게 변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냉소적으로 방관하거나 좌절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일 기존 교회에 정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다시 시작하면 될 것입니다. 교회 개혁이 루터나 칼뱅의 전유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두세 명이 모이면 어떻습니까. 열 명이나 백 명이 모이면 더욱 좋습니다. 작은 공동체도 지역 사회에서 그 능력에 맞게 얼마든지 유익한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박해 시대의 지하 교회들보다는 훨씬 좋은 여건이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신도들의 인내에도 금이 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어느 해외 도시에서는 십여 가정이 전임 목회자도 없이 별도로 모여 예배를 하고 있는 곳도 보았습니다. 대부분이 지역 한인 교회들에서 크게 실망했거나 상처를 받은 분들이었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다가 그것도 지쳐서 아예 가까운 지인들끼리 따로 모이게 된 것입니다.

또한 필자가 존경하는 어느 선배 부부는 작은 '가정 교회'를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현직 회계사로서 자비량 사역을 위해 탄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신앙 공동체들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마치 과거 청교도의 모체이었던 '회중 교회'를 연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한국적 여건에서는 이 회중 교회의 장단점을 자세히 연구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신의 밥그릇을 크게 염려하는 일부 기득권 목회자들은 적극 반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쉴 만한 물가’가 되어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은 거의 텅 비어 가고 있고, 한참 흥행하던 미국의 교회들마저 급격히 쇠퇴하고 있습니다. 미국적 성공주의로 위장된 잘못된 복음의 약발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년마다 수백만 명이 교회를 이탈하고 있습니다. 오죽해야 그 기세가 등등하던 수정교회마저 파산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이제는 한국교회를 주시해야 할 때입니다.

옳든 그르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교회가 이들에게 '쉴 만한 물가'를 충분히 제공해 주지 못했기 때문임은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떠나는 분들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폄하할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래도 한 가지는 있습니다.

비록 사정에 의해 '유형 교회'를 일시적으로 떠나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인 '무형 교회'는 절대로 떠나지 말자고 격려해 주고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다시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또한 이를 위해 우리 자신들도 모이기를 더욱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해야 할 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고, 또한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간판이나 종탑이나 십자가가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목사나 장로나 감독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들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면 그것으로 일단 족합니다. 당장 무슨 대단한 일을 하기 이전에, 우선 교인들이 영육으로 '쉴 만한 물가'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교인들 사이의 화평과 사랑의 교제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무엇이 그리 복잡하고, 화려하고, 요란하고, 분주하고, 이리도 번잡합니까. 오히려 이런 껍데기들을 열심히 챙기다가 속 알맹이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요.

결론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교회들이 타락하고 무너지고 있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짐이 너무 무겁고, 실망과 낙심이 우리를 매우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 사도처럼 이미 복음에 빚진 자들이며, 하늘의 소망과 믿음의 비밀을 함께 나누는 참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은 교회에 남는 것입니다. 날 선 비판과 이유 있는 변명의 혼재 속에서, 제자들마저 교회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크기나 형태는 문제의 핵심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교회'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며, 마지막까지 남아 믿음의 순결을 지키는 그루터기가 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그네 된 삶을 사는 동안, 부족하지만 주님 안에서 더욱 용기를 내어 형제들을 서로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교회를 이루는 일이라면, 언제든지 감연히 나서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런 작은 다짐들이 모아지고 열매를 맺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우리의 이웃들과 더욱 풍성하게 나눌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7)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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