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희 시인이 쓴 <나>라는 시(詩)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너무나도 가슴에 와 닿는 이 시가 더욱 더 감동적인 것은 이 시를 쓴 시인이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있다.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해도 온 몸을 비틀며 한 마디씩 해야만 할 수 있는 그 시인이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 노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세상은 공평하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평하신가? 송명희 시인은 자신에게는 지식도, 재물도, 건강도 없지만, 하나님을 알게 된 그것 때문에 공평하다고 외치고 있지만, 만일 하나님을 알면서 지식도 있고 건강과 재물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하나님은 공평하다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답을 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는 인간이 모두 공평하게 태어났지만, 나태했던 사람은 힘들게 사는 것이고, 열심히 수고한 사람은 모든 것을 누리게 된 것일 뿐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나고 처음부터 가난한 가정에 태어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주 오래 전에 나왔던 아마데우스(Amadeus)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모차르트와 당시 궁정의 악장이었던 살리에리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이 영화에서 살리에리는 왜 하나님이 모차르트와 같은 난봉꾼은 정말 뛰어난 음악을 만들어 내는 재주를 주시고, 자신과 같은 성실한 자에게는 그런 재능을 주지 않았는지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관한 질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과연 하나님이 공평한가 질문을 던질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별 노력 없이도 풍부함을 누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런 질문이 우리들을 괴롭힐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형은 아버지를 향해서 외친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29~30)  탕자의 형이 아버지에게 제기한 문제도 공평함의 문제이다.

사실 나도 두 딸을 기르는 아버지로서, 그리고 여러 성도들을 목회하는 목사로서 공평의 문제가 쉽지 않은 문제임을 느낀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딸들이 어렸을 때 서로 엄마를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일이 많았다. 잠자리에 누워 엄마가 큰딸을 바라보고 누우면, 작은딸이 불만이고, 엄마가 작은딸을 바라보고 누우면 큰딸이 불만이었다. 이럴 때 아빠가 한 딸을 맡으면 좋겠는데, 섭섭하게도 아이들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얼굴을 두 개 가지고 있다는 야누스가 아닌 이상, 하나의 얼굴을 가진 엄마가 산술적으로 공평하게 딸들을 바라보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까 산술적으로 모든 인간들에게 공평하게 대우하시고자 한다면 하시겠지만, 사람들은 결코 그 하나님의 공평함을 실감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하나님이 각각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그 사랑의 표현들을 표준 점수화시킬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의 공평함이란 산술적인 공평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시는 마음의 크기의 공평함이다.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할 때, 모든 것을 산술적으로 똑같이 해 줄 수 없고, 목회자가 모든 성도들을 산술적으로 똑같이 심방하거나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녀들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그 부모의 마음의 크기는 공평할 것이다.

어느 날 우리 가정에서 큰딸이 부모의 공평함의 문제를 제기했다.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왜 자신에게는 동생에게 해 주는 것처럼 해 주지 않았느냐?"는 것이 질문이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너를 사랑하는 방식은 우리가 네 동생을 사랑하는 방식과 같지 않을 것이다. 너에게 맞는 사랑의 방식이 있고, 네 동생에 맞는 사랑의 표현이 있다. 하지만, 아느냐? 우리가 너와 네 동생을 사랑하는 그 크기는 똑같다. 그것은 너희를 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너희에게 우리의 심장을 빼어 내 줄 만큼 너희를 사랑한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대답은 이렇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눅 15:31) 이 말은 산술적으로 따져 보자는 말이 아니라, 부모가 그 아들을 향한 마음이 100%임을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늘 하면서 산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까? 하나님이 왜 나에게는 행복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게 하셨을까? 왜 나에게는 건강이 없는가? 하지만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크기는 너무나도 크며, 그 크기는 똑같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모두 사랑하셔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불공평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는 그 외침을 하나님은 무시하셨다. 아무 공로 없는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