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신자는 작가(author)이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믿음으로 수용하고 그분을 온전히 따르기로 결단한 이상, 그는 작가가 되는 길을 피할 수는 없다. 만약 그가 작가가 되는 길을 한사코 피하려 한다든가, 또는 어찌하든지 간에 억누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제자가 할 도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한 소행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창조주(Author)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로 세상을 창조하고, 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말로 세상을 창조했고, 요한복음은 세상을 창조한 그분이 육화된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말과 글로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가 구원받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분은 자신의 말과 글인 성경을 떠나 혹은 벗어나서 역사하지 않는다는 기독교의 오랜 신학은 로고스 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듣지만, 그분은 기꺼이 비판을 감수하시면서 그 길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말과 글이 세상을 창조하듯이, 우리의 말과 글 또한 또 하나의 세상을 창조한다.

하여 우리는 그분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이다. 창조자란 영어는 알다시피 작가란 말과 같다. 작가가 글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듯이 모든 작가의 아버지요 근원이신 하나님도 당신의 말과 글로 전에 없던 새 세상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면 순서를 바꾸어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적 작가이기에 우리도 그러하다.

<아티스트 웨이>(경당)의 저자, 줄리아 카메론의 말이다. "창조주는 우리를 창조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창조성은 신이 우리에게 내려준 선물이다. 따라서 창조성을 키우는 것은 곧 신에게 드리는 우리의 선물이다." (303쪽) 어떤 이는 이 책이 범신론이나 뉴에이지 냄새가 풍긴다고 경계하지만, 그 요체는 유신론 신앙과 멀지 않다. 창조자인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다른 종교나 사상에서 뭐라 말하든 간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길을 카메론은 글쓰기라고 잘라 말한다. 예술가들이 상상력과 에너지가 고갈되면 으레 술을 마셔 대며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는 꼴을 보다 못한 그녀는 모닝 페이지를 제안한다. 모닝 페이지란, '간단히 말해 매일 아침 의식의 흐름을 3쪽 정도 적어 가는 것'이다. 쓰고 싶은 것 마음껏 쓰면 된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맞춤법이나 문장의 아름다움 따위에 신경 쓰며 멋있게, 폼 나게 쓰려는 생각일랑 처음부터 접어두고 내키는 대로 마구 쓰는 것이다.

카메론의 제안은 솔깃하기는 하지만, 주의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언제까지나 모닝 페이지를 쓸 수는 없다. 이것은 말 그대로 창조성의 고갈을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이자, 일시적인 해법일 따름이다. 다른 하나는 모닝 페이지는 기독교의 묵상이나 일기와는 다르다. 창세기는 창조 이전의 세계를 흑암, 공허, 혼돈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전체적으로 충만케 하는 일이었다. 하여, 성서와 독서로 우리 내면을 채우지 못하면 계속해서 우리는 영적, 심리적 고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요지는 소중하다. 하나님은 창조자이고, 우리도 창조자이며, 우리 안의 창조성을 깨우는 나팔은 다름 아닌 글 읽기와 글쓰기이다.

하나님 자신이 창조자이지만, 글 역시 창조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글쓰기는 창조 행위이다. 예컨대, 소설가의 작품이 그가 창조해 낸 또 하나의 세계이다. 이는 비단 소설가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모든 글이 그러하다. 그것이 각각 빚어내는 빛깔이 달라도 그 모든 것이 지향하는 바는 동일하다. 글쓰기는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모방하는 또 하나의 창조 행위이다.

글은 자신의 반영이지만, 반대로 글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 간다. 글을 쓰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는 점에서 글쓰기는 지성을 다듬고, 내면의 상처를 직면하게 하여 회복시킨다는 점에서 놀라운 치유 능력이 있다. 짧은 핸드폰 문자나 트위터의 140자,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엽서나 편지가 서로의 관계를 얼마나 가깝게 하는지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모른다. 글과 책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글로 기도를 써 본 사람은 안다. 하나님이 참으로 친밀해진다는 것을. 글쓰기는 나를 온전하고 순전하게 만든다.

하나님 자신이 말과 글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에 창조적 성격을 부여하신 것은 우리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이다. 사정이 이러하거늘, 성경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는 것은 감히 말하건대, 신성 모독에 다름 아니다. 너희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말로 하나님의 세상을 닮은 세계를 만들지 않느냐, 너희는 성경이라는 글로 자신을 제한하여 육화되신 하나님을 신앙하면서 너희 자신도 글로 담아내려는 데는 어찌 게으르냐. 돌들이 소리 지르며 우리를 탄핵하고, 발람의 나귀가 우리를 꾸짖는 글을 짓는다. 하나님의 형상인 너희들 모두는 창조주(Author)를 닮은 작가(author)들이라고. 그 목소리를 듣는가?

글을 쓰는 일에 사람들이 이리도 주저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세 가지다. 하나는 그딴 글쓰기를 왜 하느냐는 생각이다. 그럴 시간에 성경 보고, 기도하고, 전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는 글을 잘 못 쓴다는 자괴감이다. 그리하여 글쓰기는 타고난 소수의 몇 사람의 일이라 치부한다. 마지막은 글을 써 보는 훈련이 부족하고 방법을 잘 알지 못해서이다. 사실 글을 글답게 쓰지 못하는 까닭은 평상시 써보지 않아서 그렇다. 해 보지도 않고서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비유하자면, 마르틴 루터가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로마교도들의 세 가지 담에 견줄 수 있겠다. 루터는 독일의 교회가 개혁되지 못한 이유를 로마 가톨릭이 쌓아 놓은 담에 길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세 가지는 영적인 일이 세속적인 일에 우선한다는 것, 누구도 성경을 해석할 수 없고, 교황만이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떠드는 것, 마지막으로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거짓말이다.

루터는 영적인 것과 속된 것을 나누고 전자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가톨릭의 행습에 대항해서 모든 신자야말로 사제이고,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영적이라는 말로 사제들이 만들어 놓은 계급 이데올로기를 한 방에 깨끗하게 날려 버린다. 모든 신자가 침례를 받고 거듭난 이상, 그들은 베드로 사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왕 같은 제사장이다. 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분에 있어 동일하고, 기능과 역할이 다를 뿐이다.

글을 쓰는 것이 비영적인 것이라고 폄하하고, 글쓰기로 치유가 일어난다고 말하면, 그럴 시간에 차라리 성경이나 읽고 기도나 하겠다고 말하면 루터가 화를 낼 일이다. 고상한 영적인 일과 천한 속된 일을 구분하는 너 자신이 속될 뿐, 그 자체가 속된 것은 없다고 말한 바울이 상당히 언짢을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말과 글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다고 하면 심한 말일까?

그것도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일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구현하는 글쓰기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가. 그딴 글쓰기 왜 하느냐 말하지 말라.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찌 세상을 지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단 말인가. 하나님은 최고의 작가이다. 그분의 아들딸인 나와 당신도 작가이다.

신자의 글쓰기를 방해하는 두 번째 장애물은 글은 특별한 예외적인 사람이나 한다는 편견이다. 그간 글쓰기 학교를 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나더러 하는 말이, "목사님이니까 그렇지 제가 어떻게 책을 써요?" 하고 반문한다. 내심 그러고 싶으면서도 제 스스로 만들어 놓은 담에 짓눌려 드넓은 하나님의 세상 속으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다.

루터는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며, 진실이 그렇다면, 교황과 같은 이라도 배워야 한다. 이는 곧 교황도 실수와 허물이 많으며, 성정이 우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도 하나님으로부터 날마다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평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학문에 능한 아볼로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크게 한 수 배운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루터의 말을 조금 많이 패러디하여 말하면 이렇다.

"그러므로 글을 짓거나 책을 만드는 일이 홀로 저명한 몇몇 작가에게만 속한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할 성경의 증거를 한 조각도 찾을 수 없는 밑도 끝도 없는 조작된 낭설일 따름이다. 책을 쓰는 열쇠는 오직 한 사람이 아니라 전체 기독교 공동체에게 주신 것이 분명하다. 백 번을 양보하고 말해 보자. 그것이 베스트셀러를 쓴 특별한 작가들이라고 해도 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의 책에도 문장이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며, 좋은 책이 있는 만큼 그들의 이름을 깎아내릴 만큼 허접하기 그지없는 책도 있다. 하물며 우리랴."

성경이 고백하는 바,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다. 간단하다.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이다. 본디 하나님의 형상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관계와 책임이다.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신의 형상을 닮은 자는 딱 하나다. 왕이다. 오직 왕만이 신의 형상이고, 그만이 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권위와 힘은 바로 예서 온다. 이 때문에 그는 나라를 신의 뜻에 맞게 가꾸어 갈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 사이에 별반 차이가 없다. 있다면 그것을 단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느냐,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하느냐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듯, 모두가 작가이다.

종교 개혁을 가로막고, 글쓰기를 방해하는 세 번째 요소도 같다. 교회 개혁을 위한 공의회를 교황만이 소집할 수 있다는 주장에 반해 루터는 평신도인 귀족들에게도 동일한 권한이 있다고 역설한다. 마찬가지다. 책을 내는 것은 베스트셀러 작가들만이 하는 일이 아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유통되는 베스트셀러들의 대다수는 목회자들의 설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교회 교인들만 사도 웬만한 작가들의 판매 부수를 훌쩍 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목회자들에게는 책은 대형 교회 목사들이나 쓰는 것이지 우리 같은 작은 교회 목사가 할 일이 아니라는 좌절감을, 평신도들에게는 그저 그런 책을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하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신·구약 성경을 기록한 이는 모세와 바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에스라와 같은 뛰어난 신학자도 있었고, 다윗, 느헤미야, 다니엘과 같이 현장 경험이 풍부한 정치가도 있었다. 에스겔과 같은 몰락한 가문의 제사장도 있었고, 아모스나 하박국같이 농사꾼도 있었다. 마가같이 나약하고 심약한 부잣집 아들도 있었고,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마인드로 무장한 누가도 있었고, 가방끈이 짧은 베드로도 있다.

모두가 바울이 되려고 하려는 것이 병폐다. 큰 집에는 금 그릇, 은그릇, 나무 그릇, 질그릇이 있지만, 그 그릇 모두 제각기 할 일이 있고, 소용이 다르다. 나무 그릇이면 어떻고, 질그릇이면 어떤가. 씻어 놓지 않아서 더러우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글쓰기도 매한가지다. 갈고 닦으면 될 일이다.

내가 그 증거다. 나는 대학을 마칠 때까지 글쓰기 대회에 참여한 적이 없다. 글짓기 대회에 나간 적이 없으니 어찌 상을 받았겠나. 그리고 그 흔한 문예반에 가입하지 못했다. 시골 학교라 그런 것이 없었다. 책도 읽은 것이 별로 없다. 청소년기에 읽어야 할 책을 읽지 못해, 가끔 아들에게 핀잔을 듣는다. "아빠, 이 책을 안 읽었어요?" 그때 읽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청소년 인문학적 독서와 글쓰기를 한다. 하여간에 대학 이후로 책을 미친 듯이 읽기를 20년을 했고, 글쓰기를 10년 동안 온몸이 아프도록 쓰고 또 썼다. 그러던 것이 지난 4년 동안 매해 약 3,000매 분량의 글을 썼다. 300쪽 짜리 3권 분량이고, 200쪽으로 치면 네댓 권이다. 연습하면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책을 낼 수 있다. 요즘은 전자책으로, POD 방식으로 책을 낼 수 있다. 예전과 달리 전문 작가가 아니더라도 책을 낼 수 있는 기회가 엄청나게 많아졌다. 그 길을 가지 않을 뿐, 문을 열지 않을 뿐이다. 시도하지 않았을 뿐이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말라위 소년 윌리엄 캄쾀바는 도서관에서 읽은 몇 권의 책으로 풍차를 만들어 전기를 생산했고, 아프리카에 희망을 주었다. 어떻게 풍차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엉겁결에 그가 한 말이다. "해 보고 만들었어요." 누구나 할 수 있다. 다만 하지 않을 뿐. 한두 번 하다가 그만두기 때문에 진보가 없을 뿐.

캄쾀바는 읽었고, 시도했고, 이루어 냈다. 우선 읽어라. 다음 써 보라. 특별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읽고 써라. 그러면 당신이 바로 그 특별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고, 글쓰기가 당신을 재창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하자. 하나님은 창조주(Author)이다. 우리는 작가다. 하여, 모든 신자는 작가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책을 써야 한다.

* 김기현 목사의 '글쓰기'는 작가 사정으로 연재를 잠시 중단합니다.

김기현 / 부산수정로침례교회 목사·<글 쓰는 그리스도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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