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삼상 26:9, 11).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목숨을 취하지 않은 다윗의 행적에 관한 기록입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결코 해할 수 없다는 다윗의 신앙고백으로 유명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자신 역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의 집요한 기도를 피해 가까스로 도망 다니는 경황 중에도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해치 아니하려는 놀라운 신앙적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아름다운(?) 행동은 오늘날 많은 목사들에 의해 경탄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목사들의 이러한 경탄이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그대로 주입됨으로써, 감히 기름 부음을 받은 주의 종 목사(?)에게 해가 될 말과 행동을 절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족쇄로서, 또한 목사의 죄를 변호하는 방패막이로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과연 다윗의 고백이 지닌 진의는 무엇이었을까요? 사람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말이 나오게 된 주변적 정황을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말이라는 것은 그 말이 나오게 된 상황에 근거해 그 의미가 헤아려질 때에 비로소 그 진의가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처해있던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은 어떤 것이며, 그 속에서 다윗의 위치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다윗이 처한 상황을 곰곰이 따져 보면, 그리고 다윗이 다른 상황에서 처신한 행동을 비교해 보면, 다윗이 사울에 대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소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저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삼하 1:14-15).

전쟁에 지고 중상을 입은 사울 왕의 명령에 따라 왕의 안락사를 집행했다고 보고하는 자를 다윗이 처형하는 장면입니다. 처형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가 죽이고 싶어 죽인 게 아니었습니다. 전쟁에 패하고 중상을 입은 사울이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고 적에게 피살되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는 것이 낫다며 내린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마사다 요새에서 로마에 저항하던 유대 반군이 로마 군대가 성을 점령하기 직전에 남녀 노소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동반 자살한 사건을 유대인들은 교훈처럼 되씹으며 그 마사다 요새를 성역화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입니다. 사울 왕의 유품을 다윗에게 가져온 그 병사도 적에게 사로잡혀 추한 꼴을 당하느니 중상을 입은 자신의 목숨을 적에게 넘기지 않으려는 사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사울 왕을 죽인 행위는 어찌 보면 사울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절망을 덜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사울 왕의 입장에서는 적에게 잡혀 살해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명예로운 죽음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사울 왕은 이미 스스로 죽기로 다짐하고 자기 칼을 취해 스스로 그 칼 위에 엎드러진 후였습니다. 어찌 보면 사울 왕에게 은혜를 베푼 것인데, 그런 그 병사에 대해 보여준 다윗의 처사는 좀 과잉 대응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남습니다.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전에 사람이 내게 고하기를 사울이 죽었다 하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저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으로 그 기별의 갚음을 삼았거든,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 즉 내가 저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소년들을 명하매, 곧 저희를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매어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더라(삼하 4:9-12).

사울이 죽은 후 사울 가와 다윗 가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기존의 형세로 보면 사울 가가 유리한 형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울 가의 위세는 약화되고 다윗 가의 기세가 올라갔습니다. 그런 와중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휘하에 있던 두 군장이 이스보셋을 배신하고 다윗에게 투항해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두 군장을 처형합니다. 다윗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은, 사울의 죽음이 내게 좋은 소식이 아니었듯이 이스보셋의 죽음도 자신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적 이스보셋을 죽이고 투항해온 자들에게, 불의의 살인를 행했다는 죄를 물어 죽이는 다윗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주군을 한번 배신한 자는 언제든 또 배신할 것이기에 미리 선수를 친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죽였기 때문일까요?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가로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치 아니하니이까. 다윗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로 너희가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저에게 맹세하니라(삼하 19:21-23).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쫓겨갈 때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사울의 일가 친족)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하를 꾸짖는 장면입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한 자에 대해 마땅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부하의 간언에 분노하며, 오히려 자신을 저주했던 시므이를 두둔하고 그를 결코 죽이지 않으리라 맹세하는 다윗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자신을 저주하는 자에게도 관대한 다윗의 인격 때문일까요?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예전에 사울을 죽이자고 간언한 부하도 바로 아비새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해하여서는 안 된다며 아비새의 간언을 물리쳤습니다. 아마도 아비새는 그 때 일을 기억하고 이번에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저주한 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간언한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도리어 그런 말을 하는 아비새에게 분노를 드러냈습니다.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부터 자신을 수행해온 충복에게 말입니다.

위 세 사건을 가만히 살펴보면, 다윗은 사울의 집안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이 비록 백성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거품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받았던 그 환호와 열광이 거품이었듯이 말입니다. 유대 권력자들이 예수를 결박하고 골고다로 끌고 가자 그 환호하던 백성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에게 매수되어 예수의 죽음을 외치는 무리들의 목소리만이 사방에서 소리쳤습니다. 정작 권력 싸움이 벌어지면 백성들은 눈치를 보며 힘이 센 자쪽으로 붙게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은 사울가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설령 다윗이 사울을 죽였다고 하더라도 다윗에게는 득이 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왕을 죽인 반역자라는 죄목이 더할 뿐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일방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보고, 좀 너무한다 싶어 다윗에 동정적이었던 사람들까지도 '감히 왕을 죽여'라며 돌아서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을 죽일 수 없다는 말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나름대로 정당화하는 정치적 의미가 담긴 말입니다. 결코 사울을 죽일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약자 다윗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인 것입니다. '사울을 죽였다간 내가 도리어 죽고 말아'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훨씬 세련된 계산이 함축되어 있는 말입니다. 도덕적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호소합니다. 제가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안 죽였으니 나를 좀 좋게 봐달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사울에 대한 충성 서약이었습니다. 사울의 죽음을 알려온 자를 죽인 이유도 실은 자신이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향한 일종의 화해 제스처였습니다.

이런 다윗의 행태는 시므이에 대한 대응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상황에서, 자신을 저주한 시므이에 대해 결코 처벌하지 않겠다던 다윗이, 늙어 죽을 날을 앞둔 시점에 이르러(물론 시므이도 늙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아들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처형할 것을 명합니다(왕상 2:8-9). 이제 이스라엘은 다윗가에 의해 완전히 점령된 상황입니다. 이 자리를 아들 솔로몬에게 물려주어 대대로 이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사울가의 세력을 단도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 저주하며 박대했던 원한도 남아 있으니 한풀이도 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에 감히 해꼬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을 감히 해꼬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에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이 죄와 비판과 벌에 대한 면죄부일 수는 없습니다. 일종의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의미 즉 일감을 하달받았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고, 그런 그에 대해 어떤 대응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다윗의 고백을 오용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을 그런 몰상식하고도 무지막지한 분으로 몰아세우다니 하나님의 진노가 두렵지도 않습니까?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