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그동안 교회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와 여러 문제들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는 청년들을 여럿 만났다. 이들은 그런 문제들을 보면 지적하고 비판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물어왔다. 또 말을 한다면 누구에게 해야 하는 건지,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다가 부조리와 문제를 고쳐 나가는 데는 교회가 세상보다 못한 것이 아니냐고 온 마음으로 호소하기도 한다.

소위 교회 내의 '의식 있는' 청년들은 신앙생활하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아니 보려고 하지 않는 문제들을 예리하게 간파해 내지만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혼자서 끙끙 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섣불리 공론화했다가는 교회 어른들로부터 책망을 듣기도 하고, 왕따 당하기도 하고, 잘못하면 설교 시간에 직격탄을 맞기도 한다. 그러니 마음에 맞는 몇몇이 모여 자조적인 뒷담화를 하거나, 혹은 침묵하거나, 혹은 교회를 떠나 버린다. 만일 우리가 교회 내에서 어떤 부조리나 범죄, 혹은 문제를 봤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판해야 할까? 아니면 침묵해야 할까?

1. 악순환
1) 침묵할 것인가?

한국교회 교인들 대부분은, 특히 목회자나 중직자들은 비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침묵파의 가장 큰 주장이다. 그러면서 침묵파는 비판하는 사람에게 "먼저 당신의 들보를 빼시오"라고 쏘아붙인다. 그러니까 너는 뭘 얼마나 잘하느냐는 역공이다. 이와 비슷하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치시오"라는 간음한 여인을 변호하시면서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끌어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는 바울의 주장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누구나 다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단 말인가, 뭐 대충 이런 논리다.

또 복음은 정죄나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고, 용서고, 덮어 주는 것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고 한다. "요한복음 3장 17절의 말씀을 보라. 하나님께서도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하물며 감히 우리 인간이 어찌 다른 형제자매를 심판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저 사랑할 뿐…"이라고 말한다. 또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 봐라. 지금 네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가?"라고 따져 묻기도 하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왠지 그렇다고 답하기 곤란해진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할 일은 용서"라는 말은 단골 메뉴다.

좀 강경한 침묵파가 있다. 이들은 "당신의 말이 당신의 인생을 이끌 것이다"라는 섬뜩한 말을 하기도 한다. 풀어 보면, 매사에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은 인생도 그렇게 잘 풀려 갈 것이지만,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은 인생도 그렇게 꼬여 갈 것이라는 일종의 저주다. 이와 비슷한 저주로는 교회와 목회자를 대적하면, 고라당과 같이 죽임을 당하거나, 아론과 미리암같이 중병에 들 것이라는 간담이 서늘한 협박을 내뱉기도 한다.

조금 온건한 침묵파는 교회의 덕을 고려하라는 충고를 하기도 한다. "만일 네 비판이 교회 전체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개중에 좀 너그러운 사람은 "네 말뜻은 옳다. 하지만 네 태도는 옳지 않아"라며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하기도 한다. 아직 인격이 성숙하지 않아서, 혹은 아직 어려서 그렇게 비판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기분 나쁜 그러나 점잖은 충고를 하기도 한다. 또 "나는 네 말을 이해하지만 교회는 분명 네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별 효과도 없는 말을 해서 너에게 도움될 일이 없으니 그냥 조용히 지내라"라는 진심 어린 조언을 하기도 한다. 이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비판하지 말고 조용히 입 다물고 지내라는 것이다.

2) 비판할 것인가?

그런가 하면 교회의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들은 문제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일종의 선지자적인 기질의 소유자다. 그들은 교회가 세상보다는 더 나아야 하고, 세상의 본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때문에 답답해하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하기를, "'PD 수첩'이나 '추적 60분', 혹은 '긴급 출동 SOS' 같은 시사 프로그램을 보라. 세상의 TV 프로그램도 감추어져 있던 비리를 고발하고 공론화함으로써 사회를 개혁하고 개선하는 데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왜 교회는 그러한 세상만도 못하는가?"라며 슬퍼한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비리와 범죄, 부조리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침묵파의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주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주님 자신이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지 않으셨는가? 또 예언자들을 보라.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왕들을 향해 소리 높여 비판의 목소리를 전하지 않았는가? "내게 사랑이 있느냐고 묻는 것은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결국 비판의 소리를 듣기 싫은 것이 아닌가?" "용서하라고? 용서란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지, 잘못이라고 인정도 하지 않는 자에게 용서하는 것이 주님의 용서인가?"

그들의 주장 이면에는 자고로 비판을 건강하게 제기하고 이를 또한 건강하게 수용하는 사회가 개선될 여지도 있는 것이다. 모든 비판을 막아 버린 전체주의 체제는 필경 붕괴되고 말 것이라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깔려있다. 목회자와 교회가 안팎의 비판에 귀를 계속해서 막는다면 필경 교회는 전체주의화되고, 끝내는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예견이다. 교인들이 교회와 목회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을 온갖 비성서적인 공갈과 협박으로 막아 버린다면, 그리고 교인들을 무조건 '아멘' 성도가 되게 만든다면 그런 교회는 자끄 엘륄이 말한 것처럼 '행복한 저능아'를 만드는 단체가 되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교회의 덕을 말한다면 생각해 보라. 비판을 막는 것이 교회에 덕이 되겠는가, 아니면 교회가 비판을 건강하게 수용하는 것이 교회에 덕이 되겠는가? "내 태도가 문제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날을 세우는 이유는, 비판을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 침묵파 때문이다. 설령 내 태도가 문제라고 하더라도 내가 제기하는 비판과 문제 제기 자체가 옳다면 그것은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교회가 끝내 비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에는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 분명하고, 나는 그런 교회에 나갈 이유가 없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비판을 들으라는 것이다.

2. 제3의 길

아나뱁티스트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도 제3의 길을 추구한다. 제3의 길이라고 했을 때 이는 완전히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위의 두 가지 주장 중에서 좋은 것들만을 가려 뽑아서 만드는 대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서의 가르침이고, 이러한 제3의 길이야말로 현실성이 있는 진짜 대안이라는 것이 아나뱁티스트의 생각이다.

글렌 스타센은 그의 <하나님나라의 윤리학>(가제, 대장간 근간)(<Kingdom Ethics>)에서 이러한 제3의 길을 '변혁적 주도 행위(transformative initiative)'라고 이름 붙였다. 이는 팽팽하게 맞서는 두 가지 적대 세력이 충돌할 때, 문제가 해결되기보다는 오히려 파괴적인 열매를 맺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때 이러한 악순환을 깨부수고 주도적으로 진정한 대안을 창조해내는 행위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변혁적인 주도적 행위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아나뱁티스트의 제3의 길은 가해자나 피해자, 어느 한쪽에게 손을 들어주는 길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가 사는 구원의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더 나아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원수 관계를 다시 이어 주고, 화해와 치유가 가능한 길을 모색하려는 시도다. 물론 이러한 길은 기존의 적대적이고 대립적인 악순환의 고리에 속해 있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어찌 보면 제3의 길은 '위장한 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야훼의 군대 장관은 이스라엘 편도, 가나안 족속 편도 아니었다. 도리어 이스라엘과 가나안 족속이 야훼의 군대 장관 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수 4:13~15)

자 그렇다면 비판할 것이냐, 침묵할 것이냐를 놓고 줄다리기하는 상황에서 제3의 길은 무엇일까? 아나뱁티스트들은 성서의 가르침에서 그 길을 찾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에베소서 4장 15절이다. 개역 성경보다는 새 번역이 본문의 의미를 좀 더 명확히 밝혀 주고 있는데 인용해 보자.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면서…." 아나뱁티스트들은 이 말씀, 즉 "Speak truth in love"라는 구절을 교회나 집에다 써 붙여 놓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나 가정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그들의 해결 방식이며, 이것은 일종의 제3의 길이다.

1) 진실을 말하라

만일 목회자나 교회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 말해야 하느냐, 침묵할 것이냐만을 두고 아나뱁티스트의 입장을 묻는다면 그들은 주저 없이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공동체며, 성령의 전이며, 하나님나라의 현존의 징표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빛과 진리가 왕 노릇해야 한다. 때문에 교회에는 일절 위선이나 가식이 있어서는 안 되며, 문제나 비리를 은폐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교회 구성원 모두가 가식 없이 진실을 말할 때 성령께서 온전히 운행하실 수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때문에 공동체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건 중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진실 말하기는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다. 진실을 말한다고 했을 때 이는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자신의 주관적인 평가나 판단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말하는 이는 무엇보다도 사실을 말해야 한다.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해야 하며, 이때 그 사실에 대한 자신의 평가나 판단은 배제해야 한다. 예컨대, "장로님이 되어 가지고 어떻게 그런 OO를 하실 수 있나요?"라는 식은 진실 말하기가 아니다. 진실을 말한다는 뜻은 A라는 교인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를 정확히 말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실을 정확하게 말하고 난 후에라야 비로소 그 사건에 대해서 자신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때 자신이 그 일에 대해서 받은 느낌도 평가나 판단이 아니라야 한다. 거대한 담론을 끌어와서 옳고 그름을 논단하는 것은 진실 말하기가 아니다.

또한 진실 말하기는 과장되거나 축소해서 말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는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당신은 만날(언제나) 행동이 그따윕니까?"와 같은 수사는 진실 말하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곡하게 돌려 말하는 것도 진실 말하기가 아니다. 세부적인 부분까지 애매하거나 돌려서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한다는 것이 바로 진실 말하기다. 평가하지 않으면서 직접 커뮤니케이션(direct communication)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종종 작은 일에 상처를 받아 놓고, 자신이 상처를 받은 작은 일은 말하지 않은 채, 큰 담론을 끌어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진실 말하기가 아니다. 이처럼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의외로 어렵다. 이것은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이러한 훈련을 하다 보면 비판을 잘하는 사람도 사실은 자신이 의외로 진실을 잘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2) 사랑 안에서 말하라

"Speak truth in love(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라)." 아나뱁티스트는 우리가 진실을 말할 때, 반드시 사랑 안에서 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사랑 안에서 말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말할 때 부드럽고 나긋나긋하게 말하라는 뜻인가? 물론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진실을 말하는 목적이 궁극적으로 사랑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죄나 문제를 바라볼 때 그 죄나 문제에 시선을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깨어진 관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A와 B가 다투다가 A가 B에게 전치 4주의 상해를 입혀 치료비가 100만 원이 나왔다고 해 보자. 만일 이 사건을 사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A는 B에게 치료비 100만 원과 심적인 위자료에 해당하는 변상 의무를 지게 된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잘못한 만큼 형사 처분을 받아야 한다. 만일 A가 형사 형벌을 받고 변상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 사법적으로 그 사건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둘 사이는 영원히 원수 관계가 되고 말았는데 말이다.

관계라는 점에서 봤을 때 형벌이나 변상 의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문제 해결은 A와 B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선이다. 물론 그러한 관계 회복이 립서비스가 아니라 참되고 진실하기 위해서 A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B에게 용서와 선처를 구하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며, 아울러서 A의 치료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B도 A의 잘못에 대해서 보복하고 싶거나, 자신이 고통스러웠던 만큼 고통을 되안겨 주고 싶은 욕망을 제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A와 B, 모두는 다시 관계를 회복하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려는 자세로 대화에 임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진실을 말하는 것, 이것이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한다는 뜻이다.

교회 안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는 반드시 얘기되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 얘기는 반드시 대화라는 형식을 취해야 한다.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거나, 명령하거나, 가르치거나,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그 문제와 연루된 당사자들이 직접 대화에 나서야 한다. 이러한 진실한 대화가 공동체를 공동체 되게 한다. 대화가 없는 공동체는 공동체라고 하기 어렵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대화의 능력을 신뢰한다. 무엇보다 사랑을 세우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가진 이들의 대화라면 성령께서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하시리라고 신뢰한다. 때문에 그들은 어떠한 주제든 가리지 않고, 모든 문제에 대해서 관련 당사자들이 성실하고, 신실하고, 책임감 있게 대화에 나서라고 조언한다.

3. 마태복음 18장의 화해 프로세스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라는 것이 대원칙이라면, 마태복음 18장 15~20절은 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대화의 절차와 과정을 보여 준다. 흥미롭게도 이 말씀은 '용서'라는 큰 주제 안에 있는 주님의 가르침이다. 용서는 잘못을 대충 눈감아 주거나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책망이나 징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용서란 '형제(자매)를 다시 얻는 것'의 다른 말이다. 죄지은 우리의 형제(자매)를 다시 공동체 안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용서다.

본문에서 주님은 용서의 방법에 대해서, 즉 죄지은 형제를 어떻게 다시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다. 건강한 공동체는 죄를 다룰 줄 안다. 마치 능숙한 조련사가 사나운 개를 다루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공동체는 죄를 음지가 아니라 양지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원리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건강하지 못한 공동체는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면 화들짝 놀라거나 충격을 받는다. 놀라거나 충격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죄를 짓지 않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죄인인데도 말이다. 죄인이 죄를 짓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물론 죄짓는 것이 당연하거나 옳다는 뜻이 아니다. 필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죄는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 죄를 짓는다. 안 그런 척할 뿐이다. 잘 은폐되던 죄가 어쩌다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 사람들이 놀라고, 충격을 받고, 실족한다. 이것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도의 증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이며, 또한 공동체가 죄와 악 앞에 무력하다는 뜻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죄나 갈등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이다. 그들은 만일 우리가 인간이라면 갈등은 있기 마련이고, 우리가 죄인이기에 늘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복음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고,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 죄를 지으면 그를 공동체에서 도려내려고 하지 않는다. 형제(자매) 중 한 명이 넘어진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는 그를 다시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

1)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교회 안의 누군가 죄를 지은 것을 한 사람이 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그것을 본 사람이 당사자와 직접 일대일로 상대하여 권면해야 한다. 20세기의 위대한 아나뱁티스트 신학자 존 요더(John Yoder)는 그의 <몸 정치학>(가제, KAC 근간)(<Body Politics>)에서 주님의 이 가르침의 중요성에 대해서 힘주어 역설한다. 그는 여기서 목사나 장로, 사모, 집사, 권사, 전도사 등 그 어떠한 사역자가 아니라, 그 문제를 목격한 자가 그 죄를 지은 형제(자매)에게 가라고 말씀하신 가르침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권면이나 권징을 목회적 특권으로 여겨 왔던 가톨릭교회나 대다수 개신교회에게 큰 도전을 준다. 아나뱁티스트는 이 말씀을 공동체 안에서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상호 권면과 권징의 책임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그들이 이해하는 만인 제사장의 의미다.

이렇게 했을 때 그 형제(자매)의 죄는 음지가 아니라 양지로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찾아가는 자가 선생이 학생을 책망하듯, 그렇게 잘못한 형제(자매)를 꾸짖고 책망해서는 안 된다. 죄를 지은 자, 혹은 잘못을 범한 자에게 그가 한 잘못을 직접 커뮤니케이션의 방식대로 정확히 일러 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몰래 은밀하게 짓는 죄를 밝히 드러내서 깨닫게 하여, 그 죄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이 이 대화의 주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대화는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라'는 원칙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이 대화를 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다. 그것은 '제3자에게 일절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형제(자매)의 죄나 문제를 제3자에게 발설하는 순간 죄의 권세는 양지가 아니라 음지에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힘은 바로 뒷담화다. 뒷담화는 죄가 어둠 속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죄는 음지가 아니라 양지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반드시 당사자 간에 대화를 먼저 해야 한다.

당사자끼리 먼저 대화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죄지은 형제(자매)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즉 그가 느낄 수치심을 최소화해서, 가급적 방어적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그가 죄를 깨닫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공적이기보다는 덜 공적인 형식의 대화를 시도하라는 것이다. 간혹 어떤 공동체에서는 초대 교회가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공적으로 고백했다고 해서 자신의 잘못을 공적으로 고백하도록 강요하곤 하는데 이는 주님의 가르침과는 다른 실천이다. 본문은 결벽증적 율법주의를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구속력이 약한 덜 공식적인 대화로부터 시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덜 공식적인 대화는 사법적 효력도 없다. 율법에 따르면 공식적인 증언은 2명 이상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화가 덜 공식적이니만큼 대화를 통해서 죄지은 형제(자매)의 사정도 이해하고, 그의 말을 잘 경청할 수 있는 여지도 그만큼 생긴다. 따뜻하고 격려하는 대화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배려인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이 대화가 결국 형제(자매)를 다시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만일 형제(자매)의 권면에 귀를 기울이고, 잘못을 반성하며, 죄에서 돌이키겠다고 응답하면 죄의 권세는 그 자리에서 멈추게 된다. 넘어졌던 형제(자매)가 권면하는 형제(자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함께 기도하기 시작한다면, 그 사람을 다시 얻을 수 있게 된다. 누가 얻는가? 권면한 사람은 물론이고, 공동체, 그리고 그리스도가 귀한 한 형제(자매)를 죄의 권세에서 다시 빼앗아 올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렇게 할 경우 권면한 형제(자매)는 넘어졌던 형제(자매)를 기도로 도우며, 그가 죄와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생긴다. 물론 제3자에게는 발설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하지만 종종 전문적인 치유 그룹이 필요할 경우가 있는데, 이때에는 당사자와 협의해서 치유 그룹 안에서 치유해 나갈 수도 있도록 도울 수도 있다.

2) 두세 증인의 입으로…확증하게 하라

하지만 종종 죄를 지은 형제(자매)가 자신의 죄를 부인하거나, 변명하거나, 회피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아니 아주 많다. 그러면 최초로 권면했던 형제(자매)는 신뢰할 만한 다른 형제(자매), 한두 명을 더 데리고 가서 권면해야 한다. 이때 역시 권면에 참여하는 이들은 자신들 이외의 3자에게 발설해서는 안 된다. 뒷담화는 금물이다!

두세 명을 더 데리고 가는 이유는 넘어진 형제(자매)가 한 사람의 권면을 경홀히 여길 수 있기 때문에 보다 진지한 권면을 하기 위해서다. 아울러서 두세 사람이 함께 권면에 참여할 때 이제 이 문제는 다분히 공적인 사안이 된다. 따라서 넘어졌던 형제(자매)가 권면을 더 이상 사사로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된다. 또한 두세 사람의 증언은 법적인 증언의 효력을 발생하게 되며, 그만큼 대화는 구속적이 된다. 이것은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증인을 확보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물론 이때의 대화도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라'는 원칙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보다 주의 깊은 토론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종종 논의되는 문제의 사안이 복잡한 경우가 있다. 즉 명확하게 '죄'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그러한 사안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때에 따라서는 권면하는 형제(자매)의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편견이 반영되어 생겨난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성숙하고 현명한 지도자들이 논의에 참여함으로써, 행여나 그릇된 판단이 개입될 소지가 있다면 이를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의 신중한 대화와 논의는 문제의 성격을 정확히 분별하고 그다음 조치를 어떤 식으로 해 나가야 할지를 정할 수 있게 된다.

3) 교회에 말하라

두세 사람의 증인의 말에도 듣지 않을 경우 교회 전체에 알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교회'를 단 두 번 언급하시는 데, 한 번은 마태복음 16장의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한 번 하고, 여기서 또 한 번이다. 그런데 두 번 다 주님은 교회가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말씀하신다. 교회의 권세는 하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 즉 교회의 결정은 그만큼 중요하며, 권능이 부여된다는 뜻이다. 법원으로 치면 교회 공동체는 최고 법원 내지는 최종 심급이 된다는 뜻이다. 교회는 놀라운 치리 권능의 소유자라는 뜻이다. 이를 요더는 묶는 권세(binding)와 푸는 권세(loosing)로 표현했다.

교회에 알리라고 했을 때, 이제 한 사람의 문제는 교회 전체의 문제가 된다. 그와 함께 교회는 이 문제를 신중하게 분별하고, 성실하게 판단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지게 된다. 이것은 교회의 중요한 문제를 당회나 제직회, 혹은 사역자 회의에서 독점적으로 논의하고,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한국교회의 몇몇 경우와 상반된다. 교회 전체는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성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만일 교회가 일치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고 판결한다면, 당사자는 이를 주님의 뜻으로 여기고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종종 교회 전체가 한 가지로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때에는 교회 전체가 합의할 만한 긴 논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때로는 성서에 대한 주의 깊은 연구가 필요하며, 또 때로는 신학적인 전문적 연구가 필요하기도 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 과학적 분석이 요구되기도 하고, 역사적, 문화적 연구가 병행되기도 하다. 그러한 긴 논의 과정에 한 사람의 목소리도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합의에 이르는 결정이라면 그것은 주님께서도 인정하시는 권위 있는 결정이 되리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문제의 주인공이 교회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제 교회의 결정은 주님께서 부여해 주신 권능 있는 가르침이 되며, 그는 여기에 복종해야 한다.

4)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

하지만 끝내 교회의 권면에도 복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교회는 그를 교회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 사람을 교회 밖으로 내보내는 일은 쉽게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최소한 그러한 결정은 모든 교인이 동의하고 합의한 주님의 뜻에 근거해서 내려져야 한다. 어느 날 담임목사가 강단에 올라가서 전후 과정을 생략한 채 '모년 모월 모시로 OOO 형제(자매)는 교회에서 출교되었음을 알립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영혼을 얻기 위해서 교회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치리와 권징은 혼내고, 벌주고, 내쫓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자매)를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종치 않는 자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치 않는 자니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제자도 아니며, 교회의 구성원도 될 수 없다. 그러니 그는 더 이상 교회 안에 있을 수 없다.

4. 이것이 가능한가요?

문제는 과연 한국교회에서 이러한 프로세스를 거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까? 글쎄,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일지 모르지만 아마도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대안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이것이다. "이것은 대안이다. 아니 이것만이 대안이다." 우리가 할 수 없다고 해서 대안이 대안이 아닐 수는 없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대안이 아닌가?

아니다. 불가능하지 않다. 왜냐? 아나뱁티스트들, 특히 메노나이트 교회에서는 지난 500년 간 이러한 프로세스를 신중하게 연구하고 개발하고 실천해 왔다. 비록 그들도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들은 분명 한국교회에 비해서 월등하게 주님의 이 가르침을 실천해 오고 있다. 그러니 불가능한 대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분명 가능한 대안이다. 가능할 뿐만 아니라 성서적인 대안이다. 다만 지금 우리가 하기 어려울 뿐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이 고상한 가르침을 준수하기를 위해서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왜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애초에 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교회가 공동체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공동체를 이루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메가 처치 현상이 휩쓸고 있는 한국교회에서 공동체의 참된 의미는 잊혀진 지 오래다. 자 한 번 생각해 보라. 힘겨운 일이겠지만 어느 교회가 마태복음 18장의 화해 프로세스를 충실히 거쳤다고 해 보자. 그랬는데도 죄인이 끝내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겠다고 할 경우 그 교회는 죄인을 쫓아내야 마땅하다. 하지만 죄인이 쫓겨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주부터 다른 교회로 출석해 버릴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시장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생겨난 일인 것이다. 게든 고동이든 아무나 찾아오면 무한 환영을 하는 시대에 징계나 치리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교회는 첫 단추부터 다시 끼어야 한다. 즉 교회가 공동체를 세우는 노력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것이다. 다소 허탈한 결론일지 모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정도다. 필자는 이러한 식의 분석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석은 한국교회가 근본에서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는지를 분명히 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며, 또 한국교회가 어느 방향으로 개혁되어야 하는지 그 방향성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가 아나뱁티스트에게서 진짜로 배워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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