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6월은 많은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리게 되는 달입니다. 월드컵 축구경기와 동시지방선거에서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우리 국민의 마음은 지방선거에 대한 관심보다는 한국축구대표팀의 16강 진출에 대한 꿈으로 한껏 부풀어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의혹의 눈길을 받아 오던 히딩크 감독은 단숨에 위대한 명장으로 칭송을 받게 되었고 한국대표팀에 대한 국민의 열광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은근히 지금부터 걱정이 됩니다. 만일 한국팀이 16강에 오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94년 월드컵 당시 비운의 두 주인공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과의 경기에서 자책골을 넣고 귀국한 후에 어는 술집에서 총에 맞아 피살된 콜롬비아의 수비수 에스코바르, 그리고 브라질과의 결승전 마지막 승부차기에서 어이없는 실축으로 이태리 팀을 패배의 수렁으로 빠뜨린 로베르토 바지오! 지금도 그들의 슬픈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승부의 세계는 정말 냉정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스포츠에서 짜릿한 흥분과 카타르시스를 맛보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중들의 열광적 환호와 화사한 축제의 뒤안길에서 비운의 주인공들이 감내해야 될 고통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나친 승리주의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스포츠에 승부가 있는 것은 우열을 가리는데도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적당한 긴장감을 줌으로서 각자가 최대의 기량을 발휘하도록 자극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스포츠에는 패자를 위한 자리도 있어야 합니다. 승자를 탄생시키는데 일조했기 때문이요 패하기는 했어도 최선을 다한 그의 모습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예수님이 좋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패자도 기댈 수 있는 넉넉한 어깨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마 25:14-30)를 통해 주인이 다섯 달란트의 이익을 남긴  종하고 두 달란트의 이익을 남긴 종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은 말로 똑같이 칭찬해주는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적으로 표시된 이익의 크기가 아니라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착하고 충성된 마음인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세상은 3달란트를 더 번 일등에게만 모든 영광을 보냄으로 이등은 설자리를 거의 잃고 맙니다. 그래서 작년 초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동메달을 땄던 남승룡 씨가 매우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같은 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손기정 선수의 그늘에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모회사 광고 문구에 등장했던 "이등은 기억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무리 거부하고 싶어도 냉혹한 사회현실을 정확히 반영해주기 때문에 여전히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현실을 뒤집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패자도 웃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지금의 세계화 바람이 가능하도록 정치경제학적 기초를 다져놓은 하이에크라는 저명한 경제학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정당성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았기에 그 체제를 존속시켜주는 법과 규율에는 최고의 이성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힘이 옳다"고 선언함으로써 "진화론적 오류"에 빠지고만 셈입니다. 이는 일종의 신화입니다. 월드컵도 결국은 이렇게 왜곡된 신화를 바탕으로 해서 열광적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해 6월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왜곡된 신화를 무력화시켜 나갈 사명이 있음을 꼭 마음에 새겼으면 합니다.

도망자 다윗 주변에 이스라엘의 사회적 패자들이 몰려들어 어깨를 펴고 웃음꽃을 피웠을 아둘람 굴이 더욱 그리워집니다(삼상 22:1-2).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